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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평점 :
나는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를 이전에 먼저 만났었다. <금수>를 읽을 때도 조곤조곤하게 작가의 문장들이 연한 순두부처럼 보드라우면서도 섬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책의 내용은 그다지 밝을 수 없는 소재이지만, 따뜻함은 내내 지속된다. 책을 다 읽은 후에, 나는 주인의 손에 내맡긴 채 잠에 든 얌전한 강아지가 된 듯했다. 멍하니 있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부터 그런 조짐이 있었고 역시나 나의 예상이 딱 맞았는데, 그것에 대한 후폭풍이 몹시 심각한 것이었다. 그랬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 그랬냐는 것이 중요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중요했다.
일본 여행 중에 뇌졸중으로 죽음을 맞이한 기쿠에 고모의 사후정리를 하기 위해 고모가 살던 로스앤젤레스를 가게 된다. 조카였던 겐야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는 놀라움을 느낄 새도 잠시, 변호사가 보여준 유언장에는 찜찜한 문장이 있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여섯 살에 백혈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이던 레일라가 죽은 게 아니라 행방불명이 된 거라니?
“삭제된 마지막 다섯 줄에는 마약 레일라를 찾게 되면 겐한테 물려준 모든 유산의 70퍼센트를 레일라에게 주었으면 좋겠지만, 찾지 못하면 레일라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운동에 유용하게 썼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문구가 덧붙여져 있었어요. (…)”
“레일라 요코 올컷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곧바로 백혈병으로 죽었어요.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레일라는 여섯 살 때 행방불명되었어요. 1986년 4월 5일이에요. 보스턴의 집에서 차로 15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막 개장한 대형마트에서요.”
겐야는 어쩌면 무모하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레일라를 찾기 위해, 아니 생사라도 알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게 된다.
159. “레일라는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야? 적어도 그것만이라도 알려줘. 너희들의 깨끗한 마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야. 만악 레일라가 살아 있다면 도와줘.”
이 책의 가장 매력이라 함은, 착한 등장인물'들'에 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뿐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자꾸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모두 착하기는 힘든데 말이지- 하면서. 책의 등장인물들은 레일라를 찾는 데에 여념이 없다. 겐야도, 사립탐정인 니코도 그 누구 하나 소홀함이 없다. 레일라의 실마리는 니코에 의해 하나씩 베일을 벗게 되지만, 그렇다고 가정만 할 뿐, '왜'가 없다. 겐야는 교코와 케빈에게서 '왜 그렇게 했는지,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듣게 된다. 호흡을 길게 하여 천천히 읽고 싶었지만, 그런 속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는 손은 야속하게 점점 빨라지기만 한다. 그렇게 마주한 충격적인 진실에 나는 머리가 어수선했다.
377. 레일라는 4월 5일에 죽는다, 나는 레일라 묘의 묘석으로 살겠다.
내가 기쿠에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나는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서 그런 감정을 이입하는 것 자체가 조금 힘이 들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쉽게 이입이 됐다. 그보다 나의 배우자가 이언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것이 훨씬 더 이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기쿠에라면'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엄마라는 건, 나아가 '정상적인' 부모라는 건, 그런 걸까.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단 말인가.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내가 그녀였다면 나도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리고 남은 생을 견뎌내야 했던 순간까지 얼마나 외로웠을까. 모든 진실을 마주하고 난 뒤에 나는 기쿠에가 안쓰러워 표지의 여인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것 같다. 마치 표지의 여인이 기쿠에인 듯.
41. 배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각각의 꽃이 그저 피고 싶을 때 피는 자연스러운 조합이 아름답다. 정말이지 잘난 체하지 않게 심어 놓았는데, 반대로 그것이 바로 기쿠에 고모의 잘난 체라고 생각하며 겐야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158.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160. 그 순간 풀꽃들의 수런거림이 시작되었다.
분명치 않은 웃음소리. 속삭이는 목소리. 얌전한 중얼거림.......
나는 이 책을 발코니에서 읽었다. 내 발코니에는 얌전하고 가지런하게 나의 식물들이 놓여있었다. 나는 나의 식물들에게 오랜만에 하나하나에게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식물들에게는 내가 모르는 속삭임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키우던 식물이 죽으면 한동안 의욕이 상실되는 것도, 똑같은 식물을 키우는 것을 겁내는 것도 그와 상응한다. 레일라를 둘러싼 이야기도 이야기였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기쿠에의 정원이 탐 나서 나는 잠시 사그라들었던 전원주택의 꿈을 생각해내었다. 기쿠에는 어쩌면, 상실을 위로하는 방법으로 이와 같은 멋진 정원을 가꾸어낸 것은 아닐까. 식물들에게 말을 걸었을 기쿠에, 식물들과 교감하며 잔잔하지만 큰 슬픔을 마음속에 묻어두었을 기쿠에. 하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미야모토 테루의 결말 하나로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고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서른세 개의 거베라 화분은 기쿠에의 바람처럼 언제까지고 싱그럽게 자라날 것이다. 이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