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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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남도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있는 곳에서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지만, 내게는 언제나 이성적인 생각을 빼앗기고 감성에 푹 젖어버리게 만드는 그곳은 사람들의 인식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남도로 존재한다.  하지만, 남도는 예전의 남도가 아니었다.  새로운 길을 만들고 고속도로를 만든다며 여기저기 파헤치고 산을 깎아내리며 필요없는 도로확장등으로 흙먼지가 날리고 포크레인 삽날소리가 가득하며 돌깨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짙푸른 숲 사이사이로 드러난 벌겋고 회색빛의 속살들..  마치 고통속에 몸부림치는 중환자실에 누운 환자들같았다.  어떻게든 이 통증을 가라앉게 해달라는 이들의 절규, 그 절규는 비단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허리를 패인 저 산들 역시 나에게 절규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아프다고..  마음이 아려오고 이성의 사고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문득 한탄스런 바램이 생긴다.  그냥 있던 그대로 두면 안되겠냐고..



  절규는 그런 말없는 자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삶도 지금은 곳곳의 절규투성이다.  소설속의 한 대목처럼,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곳곳마다 싸우지 않는 곳이 없다.  소셜네트워크의 힘을 빌어 유성과 전주와 부산 영도와 제주 강정이 주목을 받고 있어 그나마도 다행이지만 소소한 곳에서 소소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며 주목받지 못한 채 저항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에 대한 소설형식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사람이 지금껏 살던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권리임에도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로, 개발자본의 이윤추구와 공정성이라고는 그닥 느껴지지 않는 합법이라는 판단아래, 사람들은 당연한 권리마저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 단지 살던 그대로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것이라 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삶은 생존의 기본권 자체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자본의 본성과 자본을 획득한 이들의 권력적 속성을 논함을 떠나, 그저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살던 이들마저도 투사로 만들고 내몰아버리는 사회가 과연 인간이 살 만한 사회일까?  사회적 낙오, 사회적 타살, 사회적 격리가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는 세상, 그리고 그런 번 외의 인간영역이 점점 넓어져만 가는 지금의 흐름이 과연 인간사회의 당연한 현상이라 말해도 될까?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사회체제는 신석기시대였다는 인류학자의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이미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한복판에 문화와 문명이라는 편의의 세례를 받고 사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계급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시스템에 의해 낙오되는 사람이 최소화된 사회이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들려오는 소식은 영도의 희망대오에 최루액 섞은 물대포를 쏘았다는 것과 구럼비에서 아침기도를 하던 활동가를 연행해갔다는 소식이다.  억압당하고 고통받던 이의 자살소식과 수많은 평범한 이들이 겪는 고통에의 소식은 이제 점점 자극성이 줄어든다.  그만큼 평범한 이들의 저항도 점점 늘어난다.  돌공장의 소음과 먼지의 고통에 팔십평생 처음으로 데모라는 것을 해 본 할머니가 저승길에서 웃으며 한 말처럼, 안해도 될 것들을 해보고 사는 저항중인 우리도 지금의 세상은 '꽃같은 시절'인 것일까?  어쩌면 참 지랄맞게도 징그럽고 허탈한 제목이고 세월이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가 영화로 제작되어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런데, 도가니라는 소설은 이미 2년전에 발표된 소설이었고 실제 사건은 훨씬 그 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물론 지금의 도가니 현상은 문학과 예술이 반드시 해야할 사회적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준 긍정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이런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사건이 사건 그 자체로서는 부족한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의 역할과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것 또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뒤늦은 반응과 분노는 또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현상이다.  이 책이 '도가니'와도 같은 역할을 해 낼수 있을까?  사회적인 고발과 성찰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지만 아직은 반응이 시큰둥한 느낌이다.  꼭 그렇게만은 않더라도, 어디선가 평범한 삶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광범위하게 퍼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문학의 사회적인 역할에 매우 충실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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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6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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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10여년전의 일이 되어버린 군의관 시절의 군대는 나의 마음속에 비효율이라는 단어와 의구심만을 남겨주었다.  물론 바닷가 깡시골에서 보냈던 근무 외의 시간들은 수많은 추억과 즐거움이었지만, 군대라는 집단 안에서 보았던 조직의 모습은 나라를 지킨다는 목적아래 훈련에 매진하고 업무에 충실하다기 보다는 장기복무자들의 진급을 위한 눈치보기와 보여주기 일색의 행사일색이었다.  물론 군의관이라는 입장은 직접적인 부대활동에서 조금 옆으로 비껴난 위치이긴 하지만 조직안에서 일정부분의 역할을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군복을 입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이했던 것은 이상하게도 그런 의문의 귀결이 군대조직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정보다는 어떤 모호함으로 귀결이 되었는데, 그것은 목적의식도 왜곡되고 효율도 없어보이는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어떤 딜레마같은 기분때문이었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조직 안에서 느껴야만 했던 의구심과 비효율, 그리고 불필요함..  참 괴롭기만 한 기분이었다.




  공권력의 정체성과 정당성에 대한 고민은 조금 오래되었는데 결국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체성이란 그저 합법이라는 옷을 입은 폭력이며 정당성이란 권력자가 부여한 정당성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결국 인간 본연의 문제에서 따져보면 그저 부정해야만 할 폭력이자 정당성 자체가 부여될 수 없는, 그저 철저한 현실론자들이나 긍정하게되는 부당한 힘이자 집단인 것이다.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몸짓은 근본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가 전투행위에 참가하지 않음으로서 발생하는 조직질서의 파괴와 사기의 저하, 그리고 다른 이가 받게 될 부담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신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인간의 본능적 입장과 공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라는 전제 하에 당연하다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전시가 아닌 지금의 상황에서도 의무적으로 끌려가 공권력의 일부로서 바라본 내부의 모습이 앞에서 말한대로인데, 전시에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모습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전시의 체제 안에서도 인간사회는 언제나 모습 그대로 흘러간다.  누구는 부하의 희생을 통해 진급을 꿈꾸고, 누구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을 위해 자기의 부대를 폭격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전쟁으로 망가진 감성은 '하찮은' 창녀하나를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워문다.  그 옆에서 또다른 공권력은 명백한 살인자의 옆에 선 밀입국자를 먼저 연행해 간다.  서류위조에 대한 수사는 엉터리이지만 그 수사결과에 대한 처벌은 엄격하고, 서류상의 내용은 사람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정체성도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한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근본을 따라 불합리와 부조리로 점철되어 있고, 그러기에 더욱 더 집단의 존재감은 부정당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부정한 존재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들에 의해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결국, 공권력은 권력자들의 필요악으로서 힘과 자본을 가진 자들을 위해 충실히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것이 소설속의 2차대전의 남의나라 군대속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애먼 젊은이들을 억지로 군대에 집어넣고 직업군인들의 진급과 영달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힘이 없으면 당한다는 논리는 지금현재 우리사회에서 군에 입대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입대하여 배치받은 보직들을 둘러보면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군대라는 공권력 안에서 증명이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나름 코믹하게 풀어낸 이야기이긴 한데 이런 말장난 같은 미국식 유머가 그닥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냥 무겁거나 우울한 흐름을 부담없게 만드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듯 하다.  그리고 무의미한 듯한 인물들의 행동이나 소설속의 분위기는 하나하나 어떤 의미들을 담고 있는데 이를 군대라는 조직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나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의미들이어서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느끼는 고전 안에서의 현실인식..  세상은 끊임없이 그대로인 채 흘러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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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ft 1848-2000 -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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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수, 꾸역꾸역 읽은 시간은 9개월..  이 책을 구입하며 좌파에 대한 어떤 기대를 함께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나의 실수인지도 모르겠다.  기대도 분량도 읽어나갔던 시간도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어떤 절망같은 것을 마음속에 심어주었던 과정들인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들에 비추었을 때, 더욱 두려움과 절망감을 느끼게 해 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좌파의 역사는 자본의 패악이 극에 달했을 때의 반동으로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반작용이자 반격이었다.  그래서일까, 좌파의 약진은 적어도 이 책이 이야기해주는 유럽이라는 공간 안에서만큼은 능동적인 때가 단 한번도 없어보인다.  자본을 거머쥔 우파와의 정당한 싸움보다는 자본구조의 약점이 두드러져 스스로 무너져내릴 때 반작용으로 좌파는 약진할 수 있었고, 때로 좌파의 성장은 우파의 헤게모니 안으로 잠식해 들어가면서 힘을 잃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령 좌파가 권력을 쟁취했더라도, 마치 권력의 짧은 유통기한을 증명이나 해주듯이 스스로 부패과정을 통해 힘을 잃어버리는 모습은 권력의 순환이나 인간사회의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했다. 




  좌파 스스로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 모습 역시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좌파내의 페미니즘이 약진할 수 있었던 것도 전쟁으로 인한 남성인력의 부족이 기회가 되었지만 그나마도 좌파내의 마초적 특성으로 인하여 여성들의 권익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스위스의 여성 참정권이 1970년대가 되어서야 가능했던 사실은 좌파의 마초적 성향을 상징적으로 증명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좌파를 견제하던 우파가 내몬 공권력의 폭력에 대해서도 어떤 두려움이 증폭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80년대 영국 탄광노동자를 탄압하던 대처정부의 공권력이 보여준 잔인함이나 20여년전의 문화투쟁에서 보여준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압은 소위 선진국이라는 문명국가 안에서도 공권력은 아무렇지 않게 잔인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들이 아니었을까.  이를 지금의 우리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대입시켰을 때,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폭압으로 억누르고 연행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그들의 실적으로 계산해내는 무식함과 잔인함은,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폭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저 두려움만 앞서게 만드는 일이다.  더욱이 권력이 자본에 넘어갔다는 극단의 자유주의 사회에서 이윤에 방해가 되는 것들에 대한 일방적 탄압은 과연 얼마나 폭압적인 모습으로 다가올까 하는 상상은 그 자체마저도 두렵게 한다.




  너무 좌파의 수동성과 의존적 속성만을 느낀 것일까?  물론 2차대전 중의 파시즘을 물리치고 지속적인 견제를 유지케 한 것은 좌파의 이념이었고 우리에게는 남미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좌파의 약진에 대한 기대감이 있지만, 좌파의 폭력성은 단계적으로 거세되어야만 했고 온건성은 부르주아 이념에 흡수되어 제대로 된 모습조차 파악하기 힘들어 진 것이 사실이다.  남미 좌파의 약진 역시, 너무도 극단적인 계급분리현상과 시기에 맞게 나타난 리더쉽의 조화가 만들어 낸, 어떤 의미에서는 특수성이 가미된 현상이라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에게는 아직 좀 더 낙하해야만 하는 수직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암울함만 느끼게 한다.  결국은 인간사회란 가진자로 표현되는 우파와 저항자로 표현되는 좌파의 영원한 싸움과 순환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아직은 진정한 좌파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가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일말의 기대감은 남아있지만, 이 책에서 보여준 좌파의 세상 역시 인민에 의해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 조금은 암담해지고 실망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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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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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신경과 의사의 임상경험을 모은 책이라고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던 중에 우연히 손에 들게 된 책의 내용은 상당한 인상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그것은 어떤 불편함을 몸의 어딘가에 지니고 살아야하는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같은 것이랄까?  그런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는 대부분 육체적으로 어딘가가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이 책은 그런 이들 말고도 사고, 감정, 느낌, 표현, 환경에 대한 인식이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좀 더 포용력있게 인식하도록 권유한다.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에게 장애인 또는 장애우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그것의 경계라는 것은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일까?  만일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즉 뇌의 기질적, 부분적 이상에 의한 사고나 행동, 인식이 어색한 사람들도 장애우, 또는 장애인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이들을 감별해 낼 수 있을까?  만일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 책의 저자처럼 치밀한 분석으로 어떤 문제를 파악해내는 의료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의 뇌기질의 이상을 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장애인, 장애우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도 수긍하지도 않는 입장에서 그런 단어가 규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구분의 기준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하는 기회가 되었다.  좀 더 폭넓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기질적 또는 비기질적 장애인일 수 있는데, 그런 우리가 누군가의 기질적 문제점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분석하고 밝혀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자신이 분석하고 있는 환자에게 과연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까 의심하는 대목이 나온다.  두 대목에서 나오는데 처음에는 그런 의문을 품는데 대해 바로 후회하지만, 두번째 환자에 대해서는 그런 의문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한다.  인간의 두뇌를 이토록 세밀하게 분석해내는 신경과 의사의 이런 고민은 의사인 나에게도 어떤 의문을 제시한다.  인간의 영혼은 과연 마음에 자리하고 있을까?  아님 두뇌의 기능과 함께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마음에 자리잡은 영혼의 기능을 두뇌의 기질적 이상이 가리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얼마나 괴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까?  손으로 밥을 먹던 사람이 손을 잃어버린 후 그렇게 하지 못함에 대한 괴로움을 내면에서 억눌러야만 하는 것 같이 말이다.  그런 괴로움은 과연 의학적으로 밝혀낼 수 없는 것일까..  영혼이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인식되어야만 하는 존재일까? 




  이 책은 읽고나서 더 많은 혼란과 고민거리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인간의 상태에 관한 재인식,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성과 영적, 육체적인 인간의 정의, 그리고 장애우라는 단어에 대한 확고한 재고..  이 책의 내용은 저자가 만난 수많은 임상케이스 중에서 특별한 케이스들만을 모아놓은 것이기는 하지만, 기질적 문제에 따른 독특한 행동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와중에도 수없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과, 그런 환자들에 대해 저자의 시선은 단지 신기한 케이스만이 아닌 인간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과 신기함 외에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폭넓은 시선을 가지게 한다.  특히 의사인 나에게는 인간의 신체적 의문과 고민을 한층 더 깊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질병에 대한 희귀하고 어려운 고민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인간적 이해를 어떻게 폭넓고 깊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기질적 문제를 넘어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환자들의 모습은 투약이나 처치를 넘어 이해를 통해 안정과 일말의 치유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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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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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역사가 그러하듯, 인간의 역사도 지구환경에 대한 적응의 과정이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적응하여 생존해나가고 대를 이어나가는가 하는 문제는 생명을 품은 모든 종들의 본능적 숙제였다.  그 숙제는 지구상의 무기물을 바탕으로 풍성한 유기물의 조합을 이루었으며, 그 조합 역시 세대를 이어내려오며 시대마다의 사소한 변화만 보였을 뿐, 풍성함을 유지한 채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지구상의 인간의 출현은 과연 지구의 환경에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떠나 상당한 독특한 적응과 생존의 역사를 보인다.  다른 종들의 생존은 지구상의 특이할 만한 극적인 환경변화가 없는 한, 적응가능여부에 달려있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한 유전자가 내재된 종은 그 모습 그대로 세대를 이은 생명을 지구상에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좀 더 발달된 방법으로 좀 더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것은 유전자에 적응력이 인식되기 전에 환경을 극복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각각의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적응한 모습의 차이가 서로를 정복하고 몰살하는 원인이 되어 어떤 면에서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생존을 결정하는 독특한 역사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인간문명의 역사를 논하는 두꺼운 책의 결론은 결국 문명은 민족마다의 차이보다는 환경에 대한 적응의 모습에서 지금의 특징을 형성했다는 것인데, 단순한 환경적응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적응과정에서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익숙해진 무기와 병균과 금속에 의해 민족간 인종간의 차이가 존재하는 현재의 모습들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그것이 지구상의 다른 종과는 다른 인간의 생존과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의 역사적 특징의 포괄적인 고찰이다.  저자의 수십년간의 노력과 연구는 상당히 돋보이고 존경할 만 하지만 이런 연구서의 통상적인 특징이기도 한 하나의 결과에 대한 길고 반복적이며 자세한 설명은 종종 지루함을 유발하여 독서에의 집중을 흐릿하게 만들곤 한다.  




  문득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를 떠올렸다.  지구의 역사에서 가장 짧고 작은 존재에 불과한 인간의 역사가 지구에게는 얼마나 해롭고 부정적인 존재였던가를 객관적으로 증명해 내었던 내용과 비교해보면 이 책의 내용역시 객관적 서술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문명에 촛점을 둔 역사적 고찰은 지구 안에서의 인간의 역사를 상당히 비중있고 의미있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단순한 착시현상인지, 아니면 인간으로서 인간의 역사를 과장되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영민함을 부정적으로만 보기에는 종의 존재자체의 부정으로 이어질 것 같아 주저스럽고, 자연계 안에서 보여주었고 지금도 보여주고 있는 인간의 파괴가 단순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도 슬프고 버겁다.  결국 두 권의 책을 읽고 난 이후 내게 남은 것은 지구상의 인간존재에 대한 의미적 해석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라는 의문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이들의 감정을 자극할 만한 책표지와 부록의 논문.. 꼭 이렇게 했어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과 짜증이다.  더한 것은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저자의 논문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여 과도하게 부풀려놓은 내용들이다.  광고내용때문에 보고싶은 영화에 대한 욕구가 확 떨어지듯, 이 책의 표지는 내용에 대한 기대를 수그러뜨리기에 충분한 모습이다.  부록에 실린 다른 이들의 서술도 책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의미보다는 저자가 한반도에서 전해져 내려간 일본문화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만 강조함으로서 상당한 짜증을 유발하게 한다.  역사적 현상에 대한 객관적 연구와 고찰을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아전인수식의 강조와 반복으로 일종의 홍보와 관심을 유발하는 모습은 저자의 인류사적 연구의 의미와 이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편집과 출판과정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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