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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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았던 세상의 변화는 언제나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던가를 생각해본다.  신대륙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면서부터 벌어졌던 지배와 정복의 잔인한 모습들, 풍경들, 그리고 몰락해버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새로운 자원과 영토에 대한 욕심과 쫓겨난 이들이 터전을 위해 벌였던 정복과 확장의 야욕은 결국 오랜시간 그자리에 살아왔던 토착민들을 잔인하게 몰살시키는 비극을 낳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이민족에 의한 폭력적 물갈이는 인간의 본성과 양심에 대한 회의와 고민을 품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다.



  자본이 형성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함께 토착민을 말살했던 이주민들은 이제 자신들의 터전 안에서 자신들끼리 폭력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포구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대포를 쏘아대는 그런 방식의 폭력은 아니지만,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트랙터로 대변되는 자본과 기계문명은 척박함 속에서도 터전과 핏줄을 이어가던 사람들을 몰아내어 이방인으로 만든다.  총칼은 펜대로 바뀌었고 죽음은 이방인으로만 치환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몰려내어진 이방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또다른 이방인이 되어 자본의 담합과 부의 불공평속에서 시들어만 간다.  내몰린 사람들의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불안과 형체를 느낄 수도 없는 폭력에의 노출.. 이는 신기하게도 지금의 우리사회와 비교해보아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은 익숙함으로 다가온다.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은 폭력행사에 있어 점점 세련됨만을 더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랬던가, 악은 구조와 제도에서 기인한다고.  일자리를 구하려 해메이던 오키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싶었으나 결국 농장주들의 담합과 은행의 은밀한 압력에 품삯을 깎아내릴 수 밖에 없었던 어느 농장주에 대한 묘사에서 어느 한 사람의 선행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사회구조의 문제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피억압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깨뜨리기 위한 개별적인 폭력, 피억압자들끼리의 이간질을 통한 연대의 파괴, 서로간의 폭력에 대한 법집행에의 이중적 잣대는 지금 이 시대만의 답답함과 분함이 아닌 역사적으로 공권력이라는 명분하에 자행되었던 제도의 폭력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탄광노동자 가족들로 대변되는 하위계급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공감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다.  존 스타인벡 역시 20세기 초반 미국의 대공황과 이후의 현실속에 억압당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의 모습을 직시하기를 작품을 통해 주문한다.  그래서 작품에는 케이시 목사류로 대변되는 저항세력의 구체적인 행동묘사가 없다.  케이시의 죽음은 너무도 허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들짐승과도 같이 살아야만 했던 이주민들의 생활과 폭우로 바닥에 물이 차오르는 위험속에 산모는 사산을 해야만 했던 절망감, 굶주려 죽어가는 어느 아이아빠를 살리기 위해 비가 퍼붓는 헛간 안에서 산모의 젖을 물렸던 그들의 절박한 동정과 연대는 사회구조의 한켠으로 떠밀려진 절박함 속의 사람들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제가 되어준다. 




  자본이 잔인한 것은 자본 자체가 나빠서일까, 아니면 자본을 활용하는 인간이 나빠서일까?  아니면 자본이 구성하는 인간사회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단순히 자연스러운 변화에 의한 발전과 소멸의 순환은 분명 아닌 것으로 보이건만 우리는 왜 여지껏 100여년전의 작품속 현실을 현재의 세상안에서 실감나게 느껴야하는가.  덤불속으로 숨어버린 이방인 톰 조드는 한국이라는 현재현실 속에서 투쟁의 끝에 결국 철장에 갇혀버린 노동자들이며, 곡괭이에 맞아 죽어버린 케이시는 환생하여 지금 85호 크레인 위에, 단식농성장의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힘겹게 흘러가는 차 안과 수로옆 맨땅에서 숨을 거두어야만 했던 톰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토록 지키려 했고 떠나려 하지 않았던 고향은 현재의 강정 구럼비이지 않을까. 




  매달 고전을 접하면서, 나는 왜 매 작품마다 현실과 꼭 들어만 맞는 오버랩 현상을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보편적 사고는 결국 고전을 접함으로서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며, 뒤늦게 고전을 읽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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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드™ 2011-10-22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고전인이유, 인간 삶의 본질은 어디에서나 비슷하게구현된다는 것을 잘보여주는작품이네요. 리뷰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