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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 안준범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평점 :
우리가 조금은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계급의 소유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귀족 평민 성직자로 구성된 과거의 체제에서부터, 현재의 권력과 자본소유에 따른 계급체제까지,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계급투쟁과 사회갈등을 겪어왔음에도 소유구조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상위 10%가 전체 자본의 40% 정도를 소유하고, 하위 50%가 전체 자본의 10-20%를 소유하는 구조는 얼핏 보기에도 부당하지만,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 이 구조가 딱 한 번 흔들린 적이 있는데, 바로 2차 대전 이후부터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시작되기 전 까지였다.
이 때엔 전쟁비용의 부담과 전후 복구를 위해 상위계급에 세율을 높이거나 특별세를 도입해 징수했다. 그래서, 상위 10%의 자본소유는 조금 줄어들었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발전이라는 현상이 도드라진 시기였다. 이 구조를 유지시킨 다른 원인으로는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사회의 존재였다. 냉전으로 대립하는 세계는 각자의 체제의 우월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다.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는 체제의 우월을 증명하려고 상위계급의 희생을 강요했고, 이는 자본의 분배와 경제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과거의 불평등 체제로 서서히 회귀 중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며 대립할 세력이 사라졌고, 유럽에 존재했던 사민주의연합의 노력은 실패로 귀결하면서, 신자유주의는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상위계급을 위한 구조를 회복시키는 중이다.
읽는 입장으로 하여금 우울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통계적 분석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는 원래 그리고 생각보다도 더 불평등했고, 잠시 누그러지던 불평등은 다시 회복 중이라는 증명은 -국가와 문화마다 정치구조, 역사, 종교적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해서, 우리가 현재의 자본구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고 단정한다. 방법은 계급투쟁을 통한 구조의 변화겠지만, 그게 쉽지도 않고 역사적 분석을 통해서도 보면 투쟁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거나 그저 제자리를 보존하기만 했다. 최근, 프랑스의 노란조끼운동을 조세정책 측면으로 보면 탄소세를 하위계급에 부과함으로 상위계급의 세율을 보존해주려는 정부의 의도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정부의 의도는 결국 좌절되었지만, 권력과 제도가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었던 문재인 정권은 정권 초반부터 친 대기업 정책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부동산정책에서는 미온적인 태도와 눈치보기로 거듭 실패만 하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지도 모를 일이다.
노동자는 점점 소외된다. 정치적 지형으로 보아 우파는 점점 상인계급이 장악한다. 전통적 지배계급이던 우파의 구성이 점점 그렇게 변화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 현상이 트럼프의 당선이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던 좌파는 시간이 흐르며 지식엘리트가 된 노동자들의 후세들로 채워진다. 피케티는 이들을 브라만 좌파로 정의한다. 그들은 결국 상인 우파와 대립하며 그들의 기득을 위해 싸운다. 노동자는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소외당한다. 동시에, 분리지배를 당하며 그들끼리도 분열한다. 미국의 민주당이 그러하고, 우리나라의 민주당도 -지식엘리트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노동자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실제적 좌파라 불릴만한 좀 더 왼쪽에 위치한 소수정당들은 그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모여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말싸움의 장이 되어가면서 스스로 몰락하는 중이다. 다행이랄까, 이런 현상이 굳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전세계적 현상이다.
결국 해법은 분배다.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의 흐름을 감시할 수 있게 1%의 자본세를 도입하자던 피케티는 이제 누진소유세를 제시한다. 상위 10%의 소득에서 노동소득은 미미하고 대부분이 자산소득이기 때문에, 보유한 자산에 대해 해마다 누진적 소유세를 부과하자고 한다. 징수의 근거로는, 자산의 대부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축적한 것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대대로의 축적은 역사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노력해서 만들어 낸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기인한다. 따라서, 자산은 한 개인의 영구적 소유물이 아니고 공동체에 얼마간의 지분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자산은 일시적 소유물로서 존재할 때 가장 정의롭다고 말한다. 누진소유세로 징수한 세금은 국민소득의 약 5%에 해당할 것이며, 이를 만 25세가 된 사회구성원들에게 사회적 배당 형태로 평균소득의 60% 수준으로 지급하기를 제안한다. 피케티는 교육투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위계급과 상위계급의 자녀들과, 진학과정에 따라 투자되는 교육비의 차이를 줄이고 좀 더 보편적인 교육투자를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좌파정치는 노동자들을 좀 더 끌어 안아야 한다고 비판한다. 피케티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말한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층계급에 대해 소득수준에 따른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것이 분배와 사회정의에 부합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에는 현재의 정치경제구조상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단정한다.
국가나 공동체 집단 단위의 사회현상이나 체제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나로서는, 다시 말하지만 우울감만 많아졌다. 분석은 실제 존재하는 상태나 현상을 드러낸다. 해법이나 제안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제언일 뿐이다. 피케티를 포함해 분배를 위한 다양한 제언들이 현실화된 것은 거의 없었고, 이 책에서 제시한 제언도 그다지 실현가능성이 없다. 권력과 소유는 언제나 상위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이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격화되고 있다. 계급간 사다리는 이제 거의 썩어서, 아주 조심스레 디디지 않으면 부서져버린다. 개인의 투쟁과 노력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힘을 모으는 일 역시 의미있는 일일까.. 좀처럼 변하지 않는 소유구조와 피케티가 정의한 브라만 좌파라는 단어에서 의문은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진다. 이러다가 인간의 철학, 역사, 정치에의 고민마저 의미를 잃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남는 건 각자의 고군분투로 알아서 살아가는 일일 뿐인지 모른다. 두어 달의 꾸준한 독서는 의미있었지만, 의미는 어떻게 내 생각의 양분이 되어야 할 지 혼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