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세미나 -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
김규항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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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급을 받고 일하다가 자영업자가 되었다.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었다.  내가 주인이라는 마음으로 내 일을 꾸렸는데, 나는 전보다 더 무언가에 휘둘리고 답답한 마음만 들었다.  노동자 입장에서 자본가 입장이 되면 내가 선 자리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일하고 진정한 지배자는 자본’이고 ‘자본가 역시 자본 운동을 수행하는 노예’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자본론을 앞세워 자본주의를 오독하는 일은 곳곳에 산재했다.  보통 자본을 지배하는 자는 자본가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을 그러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깨달았다.  착취라는 말도 그렇다.  자본의 원리상 착취가 없다면 자본가는 이윤을 만들 수 없고, 이윤을 만들 수 없는 자본은 자본이 아니게 된다.  노동자의 임금은 또한 어떤가?  임금은 노동자의 노동력에 대한 계약이지, 노동 자체에 대한 댓가는 아니다.  만약 임금이 노동에 대한 댓가라면, 말 그대로 일 한 만큼 수당을 받아가고 자본가에게는 주어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제일 큰 미덕은 우리가 현실 안에서 흔히 오해하고 있는 이런 개념들을 바로잡아주는 데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오해를 바로잡다 보면, 무노동 무임금이라던지, 탈성장 자본주의라던지, 노동/계급해방같은 구호들이 실은 불가능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다음엔 나름의 과제가 남는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 구조 안에서 어떻게 합리적인 조율을 이끌어 낼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선 다른 세상을 상상하던지..


  저자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를 권한다.  인간해방의 차원에서 자본주의는 넘어서야 할 현실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사유하는 개인’들의 탄생을 기대한다.  그런 개인들이, 적절한 순환구조 안에서 노동을 사유할 것임을 상상한다.  경험해보지 않은 구조 안에서의 삶을 상상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전제한다면, 경험해보지 않은 구조 속으로 우리는 서서히 진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 사유하는 개인들이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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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 안준범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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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조금은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계급의 소유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귀족 평민 성직자로 구성된 과거의 체제에서부터, 현재의 권력과 자본소유에 따른 계급체제까지,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계급투쟁과 사회갈등을 겪어왔음에도 소유구조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상위 10%가 전체 자본의 40% 정도를 소유하고, 하위 50%가 전체 자본의 10-20%를 소유하는 구조는 얼핏 보기에도 부당하지만,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  이 구조가 딱 한 번 흔들린 적이 있는데, 바로 2차 대전 이후부터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시작되기 전 까지였다.  


  이 때엔 전쟁비용의 부담과 전후 복구를 위해 상위계급에 세율을 높이거나 특별세를 도입해 징수했다.  그래서, 상위 10%의 자본소유는 조금 줄어들었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발전이라는 현상이 도드라진 시기였다.  이 구조를 유지시킨 다른 원인으로는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사회의 존재였다.  냉전으로 대립하는 세계는 각자의 체제의 우월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다.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는 체제의 우월을 증명하려고 상위계급의 희생을 강요했고, 이는 자본의 분배와 경제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과거의 불평등 체제로 서서히 회귀 중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며 대립할 세력이 사라졌고, 유럽에 존재했던 사민주의연합의 노력은 실패로 귀결하면서, 신자유주의는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상위계급을 위한 구조를 회복시키는 중이다.   


  읽는 입장으로 하여금 우울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통계적 분석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는 원래 그리고 생각보다도 더 불평등했고, 잠시 누그러지던 불평등은 다시 회복 중이라는 증명은 -국가와 문화마다 정치구조, 역사, 종교적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해서, 우리가 현재의 자본구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고 단정한다.  방법은 계급투쟁을 통한 구조의 변화겠지만, 그게 쉽지도 않고 역사적 분석을 통해서도 보면 투쟁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거나 그저 제자리를 보존하기만 했다.  최근, 프랑스의 노란조끼운동을 조세정책 측면으로 보면 탄소세를 하위계급에 부과함으로 상위계급의 세율을 보존해주려는 정부의 의도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정부의 의도는 결국 좌절되었지만, 권력과 제도가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었던 문재인 정권은 정권 초반부터 친 대기업 정책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부동산정책에서는 미온적인 태도와 눈치보기로 거듭 실패만 하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지도 모를 일이다.


  노동자는 점점 소외된다.  정치적 지형으로 보아 우파는 점점 상인계급이 장악한다.  전통적 지배계급이던 우파의 구성이 점점 그렇게 변화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 현상이 트럼프의 당선이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던 좌파는 시간이 흐르며 지식엘리트가 된 노동자들의 후세들로 채워진다.  피케티는 이들을 브라만 좌파로 정의한다.  그들은 결국 상인 우파와 대립하며 그들의 기득을 위해 싸운다.  노동자는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소외당한다.  동시에, 분리지배를 당하며 그들끼리도 분열한다.  미국의 민주당이 그러하고, 우리나라의 민주당도 -지식엘리트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노동자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실제적 좌파라 불릴만한 좀 더 왼쪽에 위치한 소수정당들은 그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모여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말싸움의 장이 되어가면서 스스로 몰락하는 중이다.  다행이랄까, 이런 현상이 굳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전세계적 현상이다.  


  결국 해법은 분배다.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의 흐름을 감시할 수 있게 1%의 자본세를 도입하자던 피케티는 이제 누진소유세를 제시한다.  상위 10%의 소득에서 노동소득은 미미하고 대부분이 자산소득이기 때문에, 보유한 자산에 대해 해마다 누진적 소유세를 부과하자고 한다.  징수의 근거로는, 자산의 대부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축적한 것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대대로의 축적은 역사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노력해서 만들어 낸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기인한다.  따라서, 자산은 한 개인의 영구적 소유물이 아니고 공동체에 얼마간의 지분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자산은 일시적 소유물로서 존재할 때 가장 정의롭다고 말한다.  누진소유세로 징수한 세금은 국민소득의 약 5%에 해당할 것이며, 이를 만 25세가 된 사회구성원들에게 사회적 배당 형태로 평균소득의 60% 수준으로 지급하기를 제안한다.  피케티는 교육투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위계급과 상위계급의 자녀들과, 진학과정에 따라 투자되는 교육비의 차이를 줄이고 좀 더 보편적인 교육투자를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좌파정치는 노동자들을 좀 더 끌어 안아야 한다고 비판한다.  피케티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말한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층계급에 대해 소득수준에 따른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것이 분배와 사회정의에 부합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에는 현재의 정치경제구조상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단정한다.  


  국가나 공동체 집단 단위의 사회현상이나 체제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나로서는, 다시 말하지만 우울감만 많아졌다.  분석은 실제 존재하는 상태나 현상을 드러낸다.  해법이나 제안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제언일 뿐이다.  피케티를 포함해 분배를 위한 다양한 제언들이 현실화된 것은 거의 없었고, 이 책에서 제시한 제언도 그다지 실현가능성이 없다.  권력과 소유는 언제나 상위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이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격화되고 있다.  계급간 사다리는 이제 거의 썩어서, 아주 조심스레 디디지 않으면 부서져버린다.  개인의 투쟁과 노력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힘을 모으는 일 역시 의미있는 일일까..  좀처럼 변하지 않는 소유구조와 피케티가 정의한 브라만 좌파라는 단어에서 의문은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진다.  이러다가 인간의 철학, 역사, 정치에의 고민마저 의미를 잃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남는 건 각자의 고군분투로 알아서 살아가는 일일 뿐인지 모른다.  두어 달의 꾸준한 독서는 의미있었지만, 의미는 어떻게 내 생각의 양분이 되어야 할 지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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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 쪽팔린 게 죽기보다 싫은 어느 응급실 레지던트의 삐딱한 생존 설명서
곽경훈 지음 / 원더박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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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던트 시절, 나에게도 ‘악당’은 존재했다.  국립병원이라 직원들은 거의 공무원 신분이었는데, 그 중에서 의료기사들이 나에겐 악당이었다.  그들은 응급수술을 앞둔 환자의 필수혈액검사 항목을 두고, ‘마취과의 승인지가 없으면 해 주지 않겠다.’며 의학적 월권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응급실에 콜받고 내려온 내과 레지던트는 의식없이 실려 온 환자의 포터블 엑스레이를 요청했는데, ‘지금은 운용시간이 아니다.’라는 기사의 답변에 분개하여 들고있던 혈액팩을 바닥에 내팽겨치기도 했다.  위암 수술 후 3일이 된 병동환자가 갑자기 심한 복통이 생겨 응급으로 CT를 요청하는 전화를 했더니, 전화기 너머 기사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나를 윽박질렀다.  새벽 매 시간마다 ABGA 결과를 확인해야 했던 중환자실 환자의 혈액을 직접 채취해서 검사실까지 들고 뛰어가면, 당직기사는 십여 분을 기다려야 부스스하게 잠에서 깬 모습으로 마지못해 검사기를 돌려주곤 했다.  년차가 어느 정도 올랐을 때의 나는 그런 일들이 너무 부당하고 화가 나서, 때마침 구축된 원내 전산시스템의 게시판에 장문의 항의문을 종종 올리곤 했었다.  덕분에 나는 기사들의 표적이 되었고, 학과 과장님과 함께 병원장 면담을 두 번 불려갔었다.


  곽경훈 선생님이 지원했던 당시의 응급의학과는 설립초기였는데, 본문에서 나온 대로 굴욕으로 점철된 고난의 시기였다.  우리 병원도 다르지 않았다.  응급실 스텦으로 지정된 전문의는 일반외과 출신이었는데, 아침 출근과 오전 퇴근 시간에 응급실 내부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때 외에는 거의 응급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개인적 용무가 있을 때에만 어쩌다 응급실 스테이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병원의 모든 과는 그래서 응급의학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해당과가 응급콜을 받으면, 협진과 각 과 역량으로 환자를 해결하곤 했다.  그 사이에서 처음으로 선발된 응급의학과 전공의 역시 굴욕과 치욕의 시간을 보냈다.  응급의학과 스텦이 자기과 전공의를 챙기거나 가르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전공의 사이에서,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자존심을 누르고 굴욕을 참아가며 콜받고 응급실에 온 각 과 전공의들에게 물어물어 눈치껏 응급처치를 배워나갔다.  나에게도 한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아 있다.  토요일 낮 퇴근을 하려는데,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전화해서 ‘정말 죄송한데 다리 열상환자가 근육까지 찢어져 있어서, 근육 좀 봉합해 줄 수 있겠냐.’요청해 왔었다.  복잡다단한 마음을 가지고 응급실에 내려가, 전화한 응급의학과 전공의와 함께 근육을 봉합했었다.  그렇게 버티던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끝까지 수련을 완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후 두어 달을 보이는가 싶더니 그는 어느날 수련을 포기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권위 뒤에 숨은 무능을 쉽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시기였다.  재빠른 자본과 학문의 발전 사이에서 과거의 영화만 남아 화석으로 변해가는 병원에는, 의욕을 가지고 제대로 된 수련을 받으려는 전공의들이 많지 않았다.  윗년차 전공의는 의국 회진 때마다 환자들을 수련대상 정도로 바라보고 실제 그런 눈빛을 쏘아대어서, 뒤따르는 내가 환자들을 다독이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이미 기피과가 되어버린 나의 외과의 현실은 이처럼 심각했고, 나는 묵묵히 버텨나가면서 가끔 되먹지 못하거나 괴팍하게 주변을 뒤집는 그런 인간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수련 이후의 의사로서의 생존에 얼마간의 집착이 있었고, 그래서 과 업무 외의 손이 닿을 수 있는 여러 술기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곽경훈 선생님의 병원은 상당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추인다.  책을 접하는 사람이 정말 주의할 부분이다.  전공의 생활을 경험한 입장에서 절대 없는 이야기를 꾸미거나, 불가능한 인물들을 가공해 내지는 않았다.  공감할 만큼, 나 역시 그런 인물들을 전공의 시절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고마운 동료들과 스텦들도 많았다.  병동 수간호사님을 비롯해서, 내가 스스로 복부 CT를 판독할 수 있게 때마다 가르쳐주신 영상의학과 스텦 선생님, 그리고 내가 내시경에 지대한 관심을 보일 때 스스럼없이 내시경을 가르쳐주신 내과와 외과 스텦 선생님들이 계셨다.  수술과 논문에 있어 길을 만들어주시며 직접 해보라 지도해주신 스텦 선생님은 내가 수료조건을 충족하고 전문의가 되기까지 절대적으로 도움을 주셨었다.  화석이 되어가는 병원이었지만, 내가 속한 외과를 거쳐 회복되어 퇴원하고, 고맙고 감사하다는 환자들의 인사는 수없이 받았다.  국립병원인 만큼 이름없는 노숙자들이 수없이 실려들어왔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았다.  우리는 항문농양이 터지고 엉덩이가 다 헐어 구더기가 들끓는 노숙자의 신체에 장갑을 끼고 스스럼없이 손을 넣어 괴사한 조직들을 제거해 나갔다.  병원은 본문의 부정성보다 더 많은 긍정성이 규모있는 시스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산되고 운영되는 기관이다.  그리고, 10년도 넘은 과거의 모습을 지금에 이어 여전히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엔,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그 안에서의 생존만 감안하더라도 병원은 변해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당시 어설픈 싸움꾼이긴 했지만, 고단했던 내 기억 속 전공의 시절은 지금의 나를 가능케 한 중요하고도 보람있는 시간이었다.


  초창기 응급의학과 전공의로서 곽경훈 선생님의 투쟁과 생존기를 존중한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나도 이 독후감의 시작을 ‘곽경훈식’의 어투로 나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동시에 조심스럽다.  에필로그에서 ‘이미 10년 전의 경험이고, 반드시 이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언급했으나, 책에서 그려지는 병원이라는 공간 전체가 한꺼번에 암울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의학분야의 경험담이 생산되는 영역이 응급의학과나 정신과 그리고 일부 외과영역에 국한되는 상황이 흥미와 자극때문은 아닐까 생각되어 조금 답답하다.  의학분야에서 생산되는 재밌는 읽을거리는 어떻게 확대될 수 있을까 라는 작은 고민을 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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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 일하다 죽는 사회에 맞서는 직업병 추적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 나름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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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료실에서 환자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 있다.  어째서 아플까, 무슨 이유로 환자는 끊임없이 자신이 불편해하는 증상을 이야기할까.  치료는 감염증과 같이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치료가 가능한 영역이 있고, 감기나 기다리면 사라지는 가벼운 통증처럼 단순히 대증적으로 접근하는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말끔하게 치료가 된다면 치료자 입장에서는 기쁘고 다행인 일이지만, 일차 의료 현장에서 대부분의 환자는 같거나 비슷한 증상으로 매번 진료실을 찾아온다.  여러모로 답답해진다.


  일차 의료현장에서 환자를 마주하다보면 좀 더 크게 깨닫는 점이 있다.  환자를 마주한다는 것은 하나의 삶 전체 또는 얼마 간의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의학적 지식만으로 환자를 진료해서는 잘 알 수 없었던 불편의 이유가, 환자가 들려주는 삶의 일부분을 듣고 나면 암막 커튼을 걷어내듯 명확해진다.  손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부스럼의 이유는 세멘트를 계속 다루어야 하는 환자의 현실에 있었다.  손목이 아프고 기침이 멎지 않는 이유는 식당 주방의 습기와 끊이지 않는 주방일 때문이었다.  조절되지 않는 당뇨와 혈압임에도 보름 이상 늦게 병원에 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밤 늦게 마무리되는 현장일 때문이었다.  밭에서 쉴 새 없이 귤을 따야 하는 사람들은 허리와 어깨 무릎 등이 아팠고, 직업상 하루 만 보 이상 걸어야 하는 누군가는 무릎과 발목이 아팠다.  


  본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한 환자를 마주한 의사가 메탄올 중독을 떠올리고 바로 산업의학과 의사에게 연락한다.  의학적 지식을 넘어서, 환자의 삶이 자리한 환경에 대한 어떤 감각이 메탄올에 의심을 품게 했을 것이다.  반면에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 군은 증상을 가지고 고민만 이어가다 뒤늦게 그것이 수은중독에 의한 증상임을 알 수 있었다.  의학적 지식만으로는 진찰과 검사 등의 시간이 걸리는 단계적 절차를 통해 밝혀낼 수 있는 증상의 원인을, 마주한 의사가 겸비한 관심과 감각을 통해 좀 더 빠르게 의심하고 밝혀낼 수 있다.  이 책은 그 감각을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한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산업의학 측면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의료적 현실을 경험과 분석으로 설명한 책이지만, 일차 의료현장의 의사인 나는 좀 더 단순한 수준에서 진료의 감각을 단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물어봤던 추가적인 질문들, 그것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증상을 이해하는 커다란 단서가 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무리하게 쓸 수 밖에 없는 몸이 내보내는 신호를 어떻게 하면 신호를 경감시킬 수 있는가만 생각할 것이 아닌, 어째서 무리하게 몸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  그리고, 무리하게 몸을 쓸 수 밖에 없는 삶과 사회의 현실을 알아가는 것.  결국 사람이 아픈 이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굳이 거창하게 산업의학적 측면까지 바라보지 않더라도, 당장의 내 주변의 현실 안에서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되는 진실이다.  


  이 책이 읽히는 이유는 산업현장에서 밝혀진 질병의 원인이 밝혀지고, 환자의 상태도 의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해결되거나 해결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현실의 보이지 않는 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여도 해결될 기미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사소한 문제들이나 현실들은, 그것보다 좀 더 커다란 그것들에 의해 가려져서 보이지도 해결되지도 않는다.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요리를 해야 하는 주방장의 팔꿈치는 잠시 나아지다 다시 아프기를 반복하고, 70이 가깝도록 반복되는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할머니는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남편의 저녁을 차려주기 위해 우울증을 안고 병원을 나선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의사로서 필요한 폭넓은 감각에 대한 성찰을 했지만, 내 진료실을 오가는 사람들에게서는 좀처럼 속 시원한 해결을 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여전히 사회는 부작용처럼 아픔을 생산하고,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는 아픔의 포말을 잠재우려 허우적댈 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서 조금 우울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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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자본주의공화국 - 맥주 덕후 기자와 북한 전문 특파원, 스키니 진을 입은 북한을 가다!
다니엘 튜더.제임스 피어슨 지음, 전병근 옮김 / 비아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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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위원장을 만났을 때와,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남북관계에 있어 막연한 무언가에 대해 희망과 기대가 생겼었다.  그것은 두 권력의 악수를 통해 긴장의 완화, 그로 파생되는 남한의 긍정적 삶의 변화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연달아 악수했던 북한의 두 부자는 여전히 우리에게 장막을 펼치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고 좀처럼 말하지 않았던 그것은, 북한 인민들의 삶 자체였다.  


  우리가 일반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북한 인민들의 삶이란, 그저 수령님 옆에서 감동에 찬 표정들 뿐이었다.  최근의 남북교류 이후 남한의 예술가들이 북한에서 공연을 할 때에도, 보여진 것은 가면과 연극같은 일부 기득권층의 예상된 모습들이었다.  철저하게 가려진 북한 인민들의 삶을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들은 매우 새롭고, 매우 흥미롭다.  알 수 없었던 북한의 실상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려진 장막의 뒤로 자연스레 들어가, 제 3자의 눈으로 둘러본 후,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재구성해 낸 북한의 모습은, 입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여전히 금단의 땅인 우리에겐 청량하게 환기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북한은 90년대 중반 대홍수와 기근 이후에 권력과 국가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리면서, 통제가 약화되고 자본이 유입이 빨라졌다.  국가기반의 공식화폐 가치와 인민들 사이에 형성된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화폐의 종류와 가치가 달라지며 시장가격의 혼란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중앙권력의 구조와 통제력은 여전히 공고한데, 그것은 단지 김정은 혼자만의 지배력이 아니라, 하부 권력구조 간의 견제와 협력 위에 상부 김씨 일가의 상징성이 얹혀 공생의 형태로 유지된다.  국경지역에서는 활발한 자본과 물자의 교류가 형성되고, 외부 통신과의 접촉이 많아지면서 국경지역 인민들의 사고는 좀 더 개방적이다.  따라서, 북한 인민들은 수령의 영도력에 경도된 충성스런 로봇이 더 이상 아니다.  요약하자면, 북한에도 자본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인민들의 사고와 생활이 변하고 있고, 권력은 공고하되 인민들의 변화에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읽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북한의 실상에 대해 오래된 버전의 기억으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최근의 북한에 대해 이해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  최신의 정보력과 수단이 아닌, 텍스트로 이해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이 아직도 존재하고, 그 영역이 바로 우리와 국경을 맞댄 지역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어색하다.  그리고, 제 3자의 시선으로 객관적이며 분석적인 글을 써내려가는 기자의 글은 반갑고 고맙다.  다니엘 튜더가 쓴 책을 세 번째 읽는다.  그의 글은 언제나 그러했다.  그의 글은, 기자출신으로서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어떤 기조가 있다.  간결, 쉬움, 객관성, 사실성이 분명하게 배어 있다.  군더더기는, 근거가 아주 분명하지 않은 사실을 말할 때에만 덧붙여진다.  거기에 제 3자로서의 객관적 의견은, 당사자인 우리가 쉽게 깨닫지 못하는 무언가를 적절하게 드러낸다.  


  북한은 어쩔 수 없는 변화의 물결에 물들어가며 주변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고, 우리는 기자출신의 합리적인 문장을 통해 그들을 새롭게 바라본다.  우리에겐 아직 금기의 영역이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나라의 현실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타인의 현실이기에, 이 책은 어떤 생각과 처지에 있어서는 필독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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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5 1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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