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교육 이야기 - 꼴찌도 행복한 교실
박성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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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시장이 되었다.  누가 더 훌륭한 싸움닭이 되는지, 훌륭한 싸움닭을 많이 많들어내는 훈련소가 어딘지, 그렇게 함으로써 뽑아내는 이득은 얼마인지.. 우리의 관심사는 주로 이렇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훈련소의 조련사가 시원찮으니 내자식에게 베팅한 부모들은 좀 더 속 시원하고 효과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조련사를 찾아 사립 훈련소를 뒤져본다.  베팅을 한 부모는 아이가 대학이라는 결승점에 도달할때까지 아이를 닥달한다.  조련사들은 베팅한 돈을 두고 배당을 얼마나 가져갈 것인지 서로 경쟁하기에 바쁘다.  그 사이에서, 레이스 또는 사각의 격투장에서 아이들은 피터지게 달리고 추월하고 싸워야하는 줄 알고 그렇게 한다.  자신의 부모가 수건을 돌리며 지르는 고함소리와 자신을 닥달하는 조련사의 매서운 눈빛을 힐끗 바라보며..  
 

  아이들을 위한다는 교육은 이제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또는 도박패로 전락시켰다.  전인교육, 능력있는 개인, 리더쉽은 결국 대학이라는 최종결승을 앞둔 아이들의 패싸움 실력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가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교육은 '미쳐버린' 것이다.  

 

  저자는 이전의 저서 '꼴지도 행복한 교실'에서 대한민국의 교육이 미쳐있음을 분명히 적시했다.  왜 미쳐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 저자는 '이제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라고 독일의 예에서 제안을 하고자 이 책을 펴냈다.  사실 이 미친교육의 상황에서 어떤 나라의 제도교육을 들이대도 좋은 예가 아니될 수 있을까마는, 저자의 독일교육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특히 두 아이를 독일에서 키우며 학부모로써 직접 느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제안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객관적 설명과 동시에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독일학부모로써 비교분석적이고 설득력있는 주관적 견해가 담겨있어 한층 가깝게 다가온다.  그 내용에는 교사의 막대한 권한하에 아이의 능력이 스스로 자라나게끔 지도하고 스스로 깨우쳐가며 더욱 깊은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말 그대로의 '전인교육, 실용교육'이 담겨있다.  학부모는 직접 교육을 지도하지 못하면서도 아이의 실질적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신경쓸 수 밖에 없는 독일의 제도교육은 그 모습 그대로 제도교육으로서 최선을 다하려하는 그들의 의지도 엿볼 수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독일의 직업교육인 마이스터 과정에 대해 상세한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독일교육의 두 축인 대학진학과 직업교육 중에서 직업교육에 대한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설명이 없이 몇 페이지로 마무리 된 것은 아마도 저자의 아이들이 아직 교육과정 중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스터고라는 이상한 교육과정을 도입한 한국사회에서 독일의 직업교육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야 함은 시의성과 동시에 중요함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실 마이스터 과정뿐이랴..  아직도 미쳐 돌아가는 한국사회에서 이 제안은 어차피 받아들여지기에 아직 요원해보인다.  저자의 수많은 제안과 견해가 정성스레 쌓여있는 이 책이 이 사회의 부모들과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는 위정자들에게 관심이나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암담함부터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을 담보로 경쟁과 이득의 아수라가 되어버린 교육의 바다에 던져진 이 책을 포함한 수많은 의미있는 이야기들이 옳은 길에 대한 가능성이 되어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해주었으면 하련만, 아이들의 먹거리가지고도 쌈박질을 해대는 기본조차도 없는 이들이 만드는 거친 파도는 좀체 잠잠해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바라는 것은, 오랜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책에서 이야기되는 제안들이 조금씩 조금씩 구체적인 관심을 얻고 조금이나마 실현되는 것이다.  핀란드 교육에 대한 관심같은 피상적이고 일시적 유행같은 관심말고, 독일교육이라는 주제를 떠나 진정한 교육적 의미에서 던져지는 이 제안들이 조용하지만 힘있게 오래도록 미친 파도에 맞설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극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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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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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지목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주장하며 권력은 그것을 제도화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예술이 사람사는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일부 해답이 될 수 있는 말인데, 동시에 어느시대이건 인민이 예술에 항상 요구해왔던 명제이기도 하다.  예술 역시 사람이 표현하는 방식이기에 예술 자체가 어떤 일관된 주장을 가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명제하에서 예술은 꼭 그래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예술은 자체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도 있고 작가 개인의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이 사람과 세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 민감함이 필요하다.  세상을 이야기하는 모든 분야에서 그렇듯, 이 부분에서는 공통분모가 필요하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을 말할 것, 즉 진실을 이야기하고 직시하는 것이다.  진실을 바라봄으로서 형성되는 공감과 흐름, 그것이 사람들의 인식과 주장일 것이다.  미술분야에서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 그것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방법일 것이다.

 

  저자는 진실을 그리는 것이 자체로 미적인 매력을 발산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표현력으로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본 그것 그대로 그린 그림은 실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오토 딕스의 전쟁제단화라던지,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적 정체성이 담긴 그림들, 다니엘 살라사르의 천사가 함께하고자 하는 과거를 기억하는 현재의 작품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하며 끝까지 자본과 상술에 타협하려 하지 않았던 고흐까지..  그들은 보이는 것 그대로를 그렸을 뿐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그 가치를 존중받고 있다.  

 

  보이는 것 그대로의 진실이 아름다움이 되고 지극히 인간적인 비판력을 지니게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실은 언제나 이야기거리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긍정이든 비판이든 진실과 현실은 분명 마찰하며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야기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한 현실에의 안주때문은 아닐까?  사실 지금의 세상은 그다지 많은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그저 현실속에서 의미없는 소리만 난무할 뿐..  그것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술을 바라보는 소양이나 경험의 문제뿐만 아니라 예민한 부분을 집어내는 예술은 없거나 탄압받으며, 음악은 값싼 사랑타령이나 하면서 벗고 보여주기의 난장판이 되었고,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난해하기만 하다.  저자가 마지막에 실린 부록에서 누군가에게 한 말, '예술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묻지 말고, 왜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를 물어보라'는 말, 그것은 사람들이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이 갖추어지기를 바라며, 진실과 현실의 갈등에서 언제나 현실에의 안주가 강요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지 않았을까?  진실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한, 언제나 직시당하지 못하는 사생아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공허하고 의미없는 이야기속에 둘러 묻혀있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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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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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에 의한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학살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상식이 되어 있다.  물론 그 상식이 이제는 진부해서 그다지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식으로 전 세계인의 의식속에 인간의 존엄과 교훈의 차원에서 더욱 각인되고 기억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정도로 망각과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중에 있다.  망각과의 싸움과 상식으로의 각인은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각각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대표적으로 '쉰들러 리스트'가 있을 것이고, 음악에서는 Henryk Gorecki가 Symphony No. 3로 유대인 학살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미술에서는 재일조선인 서경식씨가 유태인 화가 Felix Nussbaum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아우슈비츠 생존자 쁘리모 레비와 그의 문학을 회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만화라는 장르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아버지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회고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게다가 월트 디즈니가 심어준 쥐와 고양이라는 유머러스한 적대관계를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일방적 적대관계로 전환하여 묘사함으로서 더더욱 주목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부록에 들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천사, 해설등은 작품 자체의 분위기와는 달리 너무 호들갑스럽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유태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나 나찌의 악랄함을 여기서 이야기하고싶지는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깊고 세밀히 표현한 이야기들은 굳이 내가 반복하지 않아도 이미 많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 작품이 가지는 두가지 축, 생존자인 아버지의 이야기와 아버지와 작가인 아들과의 갈등, 그 중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에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과 일방적 억압과 공포가 만든 하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대물림이 되어 고통이 되어야만 하는 트라우마, 작가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다른 집 아버지들이 날마다 한밤중 잠을 자다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자기애가 강한 나머지 자신의 것에 과도하게 집착을 하고 자기 외에는 다른 가족들마저 믿지 못해 생기는 갈등은 다름 아닌,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의 본능이 불러 일으킨 정신적 트라우마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역사적으로 변방의 위치에서 한반도와 왜구의 시달림과 최근에는 전체 도민의 10분의 일이 학살당한 4.3을 겪은 내가 있는 곳 제주를 떠올렸다.  제주 현지민들에 대한 외지인들의 부담감, 불편함.  거의 모든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의심과 텃세를 보이는 이들..  그것은 단지 바람많고 척박한 땅에서 힘겹기만 한 자연환경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인위적인, 그리고 강압에 의해 당할 수 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 등등에서 참전하고 돌아온 미국이나 한국의 병사들이 정신적으로 겪는 트라우마는 자세히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얼마전 심리치료를 하시는 분께 들은 기억도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일종의 제국주의 파시즘이라는 폭력에 의한 상해라 이해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이들에게는 해외파병의 댓가로 주어지는 좀 더 많은 액수의 월급말고는 어느 누구도 그런 상해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또다른 모습의 제국주의 파시즘과 이들에 의해 조장되는 이념적 갈등의 폭력이다. 

 

   아쉬운 것은 이 작품에서도 저자는 그런 트라우마를 단지 개인의 경험이 가져다주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지쳐버린 상황에서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아버지 개인의 문제로만 묘사된다.  개인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의 미국사회를 살아왔기에 그랬던 것일까?  그것이 아직도 지속되는 파시즘이 가져다 준 폭력에 의한 후유증이라 왜 말하지 않는 것일까?  기회가 된다면 내가 저자에게 한번쯤 문제제기를 해 보고 싶은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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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밟으며 살다 - 함께하는 삶을 일군 윤구병의 공동체 에세이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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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조금 다르다.  자연과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자신의 소소한 일과와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들이 주로 소개되는데, 이 책에서는 사람이 읽힌다.  분명 변산공동체라는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자연보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도드라져 읽힌다.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낀 것들, 자연과의 관계도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먼저 이야기되고 그렇게 사회, 세상의 이야기로 확산된다.  단순한 흙을 밟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윤구병 선생님 자신의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이야기속에는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옆에 누군가가 있어 함께 주인공이 되어있다.  그렇게 이 책에는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  하지만 단지 사람만의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연속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깨달은 식물들과의 관계, 고추농사를 지으며 고추모종 옆에서 수북히 올라오는 풀들이 마냥 잡초같지만 그것들은 서로 상호관계속에서 경쟁과 보완의 작용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땅 위의 모든 것은 상호관의 관계를 이루며 함께 성장한다는 사실 역시 이야기한다.  그래서 잡초는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자연은 뭇 생명들이 겸허히 고개를 조아리고 들어가 살아야 할 터전이고 그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땅위의 생명과 생명들이, 그리고 사람과 생명들이 관계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  아마도 이 책은 그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핵가족화라는 말이 생겨나 지금껏 그 개념이 유지되고, 모든 것이 점점 원자화되어 관계마저도 단절될 때, 저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라 이야기한다.  그 관계는 단지 서로간의 교류를 통한 알고지냄의 차원을 넘어, 삶을 유지하는 일에 역할을 분담하고 서로 공유하는 관계를 이룸으로서 생명의 보존과 유지, 생산까지도 일구어내는 일이라 설명한다.  그것이 자연을 구성하는 땅과 물을 바탕으로 이루어짐이 명백한 바, 지금의 왜곡된 도시집중사회에서 농촌으로 다시 돌아와야 함은 당연한 일이라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이 일군 공동체가 오랜시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보여준 모습과 지금의 정착된 모습을 보며 이야기하는 확신이지 않을까.  

 

  윤구병 선생님의 오랜 시간 써왔던 글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하나하나가 참 좋은 글들인데 아쉬운 것은 각각의 글들중에는 시의성이 있어야 이해될만 한 글들이 있어 그것이 언제 쓰여졌는가를 알면 더 이해하기 좋은 글들도 있다는 것이다.  근 30여년간의 글을 정리한 것이니 최근의 일이 아니고서야 이게 대충 언제쯤 쓰여졌겠다 싶은 추측만 남는다.  하지만, 모든 의식이 편향되고 편향성과 경박함이 시간이 흐를 수록 더해가는 지금의 세상에서 선생님의 글은 30년이란 시간을 초월한 깨달음의 힘을 가지고 있다.  아니, 반대로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대단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선생님이 말하는 흙을 밟는 일, 그것은 관계의 회복이고 이제는 어떤 이들에게는 진부한 주장이 되어있겠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자연으로 들어가자는 주장이 아니다.  자연을 바탕으로 한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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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 레벌루션 -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기원
제임스 R. 베니거 지음, 윤원화 옮김 / 현실문화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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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  아니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던 사물, 현상등을 설명하는 방법에 있어서 조금은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랄까?  새로운 듯 하면서 익숙한 내용들이다.  동시에, 시선과 이해를 조금 다른 방향에 두어 좀 더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제어혁명,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어할 수 밖에 없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지구의 역사, 생물의 역사, 산업사회의 역사를 이끌어왔다는 내용이다.  결국 '제어'로 해석된 'control'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한 것이다.  통찰적인 면에서 이것은 인간사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의미 즉, 세포단위 속의 유전자 제어까지도 포함되는 개념이다. 
 

  생물은 꼭 필요한 정보와 성장과 진화에 필요한 정보를 위해 유전자단위에서 제어를 한다.  그것은 우성 유전인자의 존속을 통해 생존 자체의 수단이 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태어났으며, 인간은 다시 문명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꾸려나갈 사회를 만들어낸다.  사회는 인간들 사이의 정보 교류와 물적 교류를 바탕으로 하고 그것이 점점 많아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어떤 규칙, 즉 제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정보와 물적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면서 제어의 개념도 상대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제어의 방법 역시 인간의 손과 서류를 통하는 방법에서 연산기나 컴퓨터같은 기계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발전하게 되고, 개념역시 정보, 물량의 교류나 교통제어등을 떠나, 광고등을 통한 제어권 안으로의 유인, 그리고 정치, 경제 등의 분야에서 유용하게 사용됨으로서 넓어지게 된다.  

 

  제어라는 개념을 통해 이 책은 사회현상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다른 시선을 제공해주지만, 더 이상의 새로움이나 깨달음은 없는 듯 하다.  단지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한 역사서같은 느낌도 있다.  사회과학 서적에서 제어의 개념을 통해 생물학이 소개되는 부분에서는 조금 흥미로웠지만, 그리고 북미지역 초기 개척시대의 무역과 교통의 발전에 따른 제어개념의 발전은 비교적 재미있으나, 뒤로 갈수록 미국 안에서의 제어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우여곡절의 세밀한 분석 그리고 시간상의 흐름에 따른 사건의 나열은 시야가 좁아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서술에서의 힘도 떨어지는 느낌이다.  1900년대에 들어와서 제어라는 개념은 마치 미국 안에서만 발전한 것 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20여년전에 나온 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 근대사회현상을 제어의 개념으로 설명한 부분은 존재하지 않고 제어의 발전에 있어 저자의 어떤 주장이나 비평도 없어 단편적인 역사서같기도 하다.  게다가 경제의 흐름과 관리, 정치적 견제와 통제, 전자기계의 이해등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결국 '제어'일테고, 다시 반대로 풀어내자면 우리가 지금껏 깨닫고 느껴온 그런 것들이니 새로운 맛도 그리 크지가 않다.  말장난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데 딱히 뭐라 집어낼 꺼리도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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