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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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물이라고까지 하기엔 좀 그렇고, 나의 기억은 전주의 시내중심, 지금 가보면 너비가 내 어깨너비를 조금 넘는 골목이 미로처럼 있는 허름한 동네의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펑퍼짐하게 살찐 몸으로 언제나 자기네 대문에 주저앉은 채 더운날의 한낮을 보내던, 어린 내가 보아도 좀 모자란듯 보이던 고모뻘의 여자와 백발이 다 되어서도 혼자사는 아들뒷바라지와 빚더미에 가난한 동네의 전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할머니, 온갖 허세는 다 부리며 다니다가 어느날 비슷한 나이의 여자와 강보에 싸인 간난아기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 결국 온 동네에 모자간의 고성을 들려주고야 말았던 이웃집 형을 보며 지내왔던 어린시절의 기억.  그것은 분명한 가난과 무지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들며 부딫히며 때로는 싸우며 보대껴야만 살아낼 수 있었던 밝지만은 않은 동네의 풍경이었다.


  밝지만은 않은 도심 슬럼가의 슬레이트 낮은 지붕집 하나가 우리집이었고 그것은 그나마 밤낮으로 일하고 먹을것 입을것 아껴가며 빚을 갚아야만 했던 부모님의 유일한 밑천이었을 것이다.  그 밑천과 두분의 알뜰하고 부지런함은 우리가족을 '좀 더 밝은' 동네로 나올 수 있게 해 주었고 그 동네에 대한 기억은 나의 중학시절에서 멈추게 되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지금의 그 동네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에 의해 정확히 반으로 두동강이 나버렸고 주변은 개발과 상권의 변화로 대부분이 변한 채로, 내가 휘젓고 다니던 골목은 파편처럼 군데군데 모습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파편화된 골목에 기억의 파편으로 남은 낮익은 건물은 시간에 부식된 채로 여전히 가난한 누군가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벽돌을 올려 담을 만든뒤 세멘을 바르고 거기에 세멘을 뿌려굳힌 뾰족한 모서리에 맨살이 쓸려 하얀 생채기를 낼 때의 아픔은 어릴때나 지금이나 같은데, 시간은 건물을 부식시켰고 그곳엔 이제 아는 사람이라곤 한사람도 없다.  분명 내가 떠나온 그곳엔 작별인사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부랄친구도 있었고, 스멀스멀 오르는 전세금에도 전전긍긍하던 백발의 할머니도 남아있었고, 자기집 대문에 종일 앉아만 있다가 대소변이 마려우면 공동화장실로 어슬렁 발걸음을 옮기던 펑퍼짐한 몸집의 모자란 고모도 있었는데, 난 그들이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동네에 갈 때면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흘깃 쳐다보게 되는 모습은 내가 챙기지 못한 그들의 안부, 마치 가지고 놀다가 아무렇지 않게 던져버린 나뭇가지마냥 내려놓아버린 그곳에의 기억에 대한 죄책감때문일까?  김현진의 기억에 관한 에세이에 비하면 나는, 너무도 무책임하고 생각없이 기억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다.


  김현진은 여전히 치열하게 기억을 기록한다.  치열함 속에 만나는 이들과 거쳐간 시간과 경험을 조금은 시니컬하면서도 주저앉아 수다떨듯 기억해내고 표현한다.  그것은 단순한 가난에의 동정이 아닌, 개발의 명목하에 곧 사라져갈 삶의 자취를, 스스로 처해야만 하는 부당과 불편함의 입장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나의 기억 역시 그런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의 경험이었다.  단지, 난 어느시점에선가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처해야만 했던 위험과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현재의 현실적인 큰 차이를 만들었고 나는 이것이 온당한 현상인지 부당한 현상인지 판단하지 못한채, 김현진의 글을 읽으면서 왠지모를 가슴속 모래의 서걱거림을 느껴야만 했다.  


  나에겐 어느순간부터 겪지 않게 된 기억에의 회상을 불러일으킨 책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나의 그런 기억을 지금 현재의 시점에도 이어서 겪고 있음을 서글프도록 실감나게 해 준 책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것이 그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아니면 내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인위성을 갖추게 되었거나 부당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잘 모르겠다.  단지, 김현진의 치열하고 눈물나는, 철거위기에 처하거나 가난의 풍경가득한 동네이야기에 단순히 애틋해하거나 우울해하며 생각없이 가볍게 읽을 수만은 없었을 뿐이다.  무겁고 둔해지는 마음이 한없이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김현진의 글에서 보이는 희미한 미소가 깃들인 듯한 위트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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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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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양심때문에 스스로 자책에 빠진다는 것은, 그리고 그 자책때문에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은 얼핏 생각하기에 패배에 가득 찬 모습때문에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일본 패망직후의 허무주의 비관주의에 비추어보면 인간적 양심을 바탕으로 한 가장 솔직한 행동과 사고의 방법으로 인정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무작정스런 비관과 회의를 받아들이기엔 사람들의 생각은 많이 변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 인간이 자신의 양심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깊은 감성의 소유자인가의 증거가 된다.  사실 시대적 상황과 유행에 따른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를 떠나 지금의 우리는 깃털처럼 가벼운 감성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내면의 감성을 키우기보다는 보고듣는 것에 대한 즉자적 반응과 적당한 자기치장이 중요해진 세상에서 감성을 깊게 키우기란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양심에 반하는 자신의 가족환경에 스스로를 자책에 빠뜨리고 이를 유쾌함으로 숨기려는 주인공의 모습은 치밀함, 감성적인 등등의 단어를 생각케 한다.  때로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사춘기 소년의 감성이나, 순수를 지키려는 순수하지 못한 방어행태를 느끼게도 된다.  '삐에로의 눈물'과는 다르지만 대입해 볼 수 있는, 슬픈 자아를 숨기려는 웃음을 간직했달까.  


  그가 숨기려 했던 슬픈 자아, 순수한 양심은 결국 온 몸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이제는 드러난 감성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절망과 배반을 안겨준다.  그것은 세상이 그에게 의도한 것이 아니다.  적당히 양심을 가리고 욕망과 피상적 반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자연스레 도태될 수 밖에 없었을 뿐이다.  그가 내면에 간직한 인간에 대한 희망, 순수함에 대한 꿈은 보여지지 않은 채, 사회 부적응자로서 낙인 찍힌다. 


  자살..  그에게는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희망과 꿈의 좌절에 더 이상의 자아와 양심을 지킬 수 없었던 순간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근본의 가장 바닥에서 흔들릴 수 없었던 판단의 기준인 양심이 무너져야만 하는 순간, 둘러싼 모든 것이 자신을 배반하여 괴로움밖에 남지 않은 때에 '그래도 살아'라는 말은 사람을 얼마나 더욱 괴롭게 만드는 말일까?  그리고 그렇게 생을 마감한 후에, 그의 내면에 존재했던 순수함과 인간적 양심을 알아주었던 사람이 작게나마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시선을 얼마나 안타깝게 만드는 일인가.  


  인간실격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관성, 패배적 느낌, 읽는 동안 가슴의 바닥을 흐르는 어떤 답답함은 사실 내가 살아가며 지키지 못한 내면의 어떤 것에 대한 일깨움이다.  제목이 주는 단적인 느낌은 그렇게 단적으로 내 마음을 뒤집어버린다.  순수한 양심을 지켜내려는 갈망, 비관적이고 대책이 없어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둔 어떤 희망, 그리고 희망을 피워보려지만 너무 버거운 세상의 무게에 압사당하고 결국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수순..  작가이기도 한 주인공의 삶을 통속적인 세상의 기준으로 말하기엔 그 입과 머리가 한없이 가벼움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위험을 감수하게 만드는 이야기..  이 작품은 그렇게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함으로서 인간의 존재감을 두텁고 비중있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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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정승일.이종태 지음 / 부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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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착하게 다가오는 자본주의란 가능한 것인가?  사실 그런 자본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 속성상 불가능할 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공정하고 이상적인 모습은 기회균등과 최소조건의 보장, 이런정도가 아닐까 한다.


  공정하고 이상적이라는 말은 그 모습이 현실과는 거리가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말일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어느정도 인정한 채로 보더라도 현실은 좀 더 비인간적인 모습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대공황이후의 세계대전이 이를 증명하고 있고, 우리가 현 시대를 살아가면서 겪고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발전'이다.  그들사이에서의 차이라면 발전을 위한 과정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장기적인 안목을 바라보는  착한 자본주의체제를 강조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 아닐까 싶다.  민영화와 FTA 등으로 대표되는 무한경쟁 체제를 통한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발전보다는 일정부분 자본의 국가통제와 복지시스템을 통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책속의 대담을 읽고있자면 박정희체제부터 시작하여 MB정권까지 이루어지는 수많은 사회경제적 결정에 대한 우리의 비판 즉, 일상과 SNS상에서 회자되는 비판에 상당부분 의견에는 같이하지만 비판의 핵심은 상당부분 다름을 느낄 수 있다.  경제학자들의 예리한 시선이기 때문일 수 있지만, 여론의 흐름과 무의식적 혐오에 의해 이해와 분석이 왜곡되어진 우리의 모습때문임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어 또다른 의미의 책읽기가 되어준다.  때로는 모든 현상을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판단하기에 일반적이거나 비경제적 관점에서는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도 보여진다.  예를 들어, 재벌체제에 대한 관점은 해체를 주장하는 진보적인 관점과는 다르게 사회와의 타협안을 제시하는데,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국경없는 자본의 무자비함 앞에서 재벌체제에 대한 별다른 대안이 없기에 납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맞딱드리게 된다.


  우리가 이해하는 복지시스템, 복지국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던가.  개인적으로는 복지를 인간의 삶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보장하는 안전장치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단순히 그렇게만 바라보지 않는다.  복지를 경제발전을 위한 하나의 투자요소로 정의한다.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이 재기하여 다시 경쟁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건강성을 유지케 하는 일이며, 사회발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요소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복지를 투자의 요소로 이해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할진대, 과연 우리는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자발적 가난과 분배를 통한 불편의 보편화는 공존을 위해 이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는 발전과 성장보다는 안정적 유지를 위해 기본소득제같은 새로운 경제체제가 제안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경제학자들은 과연 이런 제안과 생태환경주의 차원에서의 경제시스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나의 투자개념으로서 이해하는 복지시스템이라면, 세상은 지속적 발전이 가능하며 내가 떠올린 이런 대안적 경제체제는 아직 시기상조인 제안에 불과한 것일까?  대담자들이 이야기하는 복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사실 복지라는 것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발생하고 만들어지고 유지된 시스템이긴 하지만, 복지를 자본주의를 포괄하는 모든 형태의 국가경제체제가 의무적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하나의 안전망, 자본과 사회시스템을 떠나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인간적, 자연적 성격의 요소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인지, 그리고 대안경제체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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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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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 적은 많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못한 바램뿐이어서 그런지 그저 흥분과 기대의 느낌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딴생각하듯 잠시 멍한 상태에서 펼쳐보는 상상속에서는 내가 하고싶었던 일을 가진 능력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기도 했다.  해결하고 나면 짜릿함과 쾌감이 뒤섞인 흥분만 남아 현실에의 답답함에 대한 대리만족감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능력자들의 쾌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사물에 남은 인간의 흔적을 읽는 사이킥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능력에 대한 부담과 괴로움으로 간신히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이는 마치 우리사회의 성 소수자나 장애우들의 자신없어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그런 모습과 비슷한 느낌이다.  현실계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교류, 역할자체도 복잡하고 부담스럽지만, 이면에 존재하는 비현실계의 인간의 마음속 흐름들까지 자의와 무관하게 알면서 살아가야하는 이의 삶의 부담은 두 배로 무거워지는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하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의 장애 또는 일반성의 영역밖에 서야만 하는 소수자의 불편함과 외로움인 것이다.


  문득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예지자들이 생각났다.  자신이 원치 않았던 예지의 능력때문에 기계에 감금당한 채 이용당해야만 했던 이들, 그들에게 범죄예지의 능력은 스스로를 무척이나 괴롭히는 불편함일 뿐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신체를 구속받아야만 하는 불운의 삶이기도 했다.  영화의 마지막엔 그들을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게하지만 과연 그들은 괴로운 예지의 능력에서마저도 벗어날 수 있었을까?  이 소설에서는 능력자 소년들이 자신의 능력을 통한 괴로움을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함으로서 벗어나려 한다.  때로는 문제해결에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 소설의 추리적 구성을 만들어내는 중심적 동기가 되고 이는 작가의 뛰어난 구성력에 의해 흥미진진함과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능력자 소년들의 말미는 결국 비극이 되어버린다.  그들이 그토록 괴로워하는 그들의 능력과 어울리게도 말이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질 듯 말듯한 긴장감이 추리소설의 일반적 특성상 논리적으로 해소되며 만족감이 가득해진다.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궁금증을 이 소설을 시작으로 접해보고 해소해보려 한다.  첫 만남이 아주 만족스럽다.  초능력이라는 주제를 잘 다룬다는 작가의 다음작품에서는 어떤 긴장감을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장을 덮자마자 기대감이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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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의 시 1 세미콜론 코믹스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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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것은 그저 사치일 수 밖에 없는, 태어나면서부터 희망이나 행복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차단당한 한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여자의 현재는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하기만 하다.  남편이라는 이는 하는 일 없이 경마장과 빠칭코에나 들락거리며 날마다 술을 마시고 기분이 나쁘면 밥상을 뒤엎는 건달이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한없이 사랑하며 식당주방과 배달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간다.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감수하고 준비한다.  현재의 모습자체만으로도 한없는 답답한만 가득한 그녀의 삶은 대체 왜 그런 모양일까 하는 궁금증만 일게 한다.  코미디류의 4컷 만화이지만 마냥 웃음만 나오지는 않는다.


  절망과 포기상태에서 맞이한 희망은 그 가치가 얼마나 커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든 걸 포기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듣는 위로의 말 한마디가 때로는 큰 힘이 되어주듯,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포기한 자신의 손을 잡아올리는 상대는 그게 누가 되든간에 고마운 사람이자 커다란 의지처가 된다.  작품에서는 절망속의 주인공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어준 사람이 두 사람이 등장한다.  현재의 밥상을 뒤엎는 건달인 남편과 과거 중학시절 끝까지 자신을 기다려주고 지켜준 가난하고 못생긴 친구이다. 


  어쩌면 그 둘과 주인공과의 관계묘사는 조금 통속적일 수 있다.  주변의 시선에 친구를 버리지만 버림받은 친구는 끝까지 기다리다가 주인공이 궁지에 몰렸을 때 손을 내밀고 함께 있어준다는 깊은 우정에의 묘사, 그리고 삶의 절망과 포기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 구원해 준 남자에 대해 바보스러울 정도의 사랑과 헌신을 한다는 내용은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를 다시보는 느낌을 준다.  마지막에서 임신을 통해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에 대한 용서와 어떠한 삶이든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는 깨달음은 뱃속에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나가는 여성의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어떤 페미니즘적 감성이랄까.. 


  전체적으로 이 작품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이야기 구성방식의 승리라는 느낌이다.  4컷만화라는 형식도 그러하고 처음에는 한없이 답답하기만 한 이야기들로 채워지다가 뒤로 갈수록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추어냄으로서 시간의 역순으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고 결국엔 모든 인과관계가 밝혀진 상태에서 페미니즘적 감성을 자극함으로서 감동을 만들어낸다.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성방식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주인공의 삶이 그저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아쉽거나 허전한 느낌이기 쉬운 그런 내용임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관계적 경험이라던지 감성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읽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면의 무덤덤함과 아쉬움이 살짝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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