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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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앞에서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개인뿐만 아니라 인간이 조직한 사회의 움직임은 어떠한 모습일까?  종교는 어떠할까.  위기앞에 공간을 제약당한 고립된 사회에서 선과 악은 어떻게 다시 정렬되는 것일까.


  페스트의 엄습앞에서 누가 언제 죽어갈지 모른다.  이 위기앞에서 해안의 도시를 담당하는 당국은 페스트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위정자의 이기적인 우려는 인간애적인 우려를 애써 폄하하려 한다.  그리고 마지못해 페스트를 선언한 도시는 모든 외부교류를 차단당한 채 고립된다.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에 맞딱뜨리자 대혼란에 빠진다.  외부로 향하는 통로에서는 폭동이나 다름없는 혼란이 일어나고 서로의 옷깃을 스치는 것도 염려스러워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옆집의 사람들이 드러눕고 격리되어 하나 둘 사라지는 순간에도 차츰 안정을 찾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 현실은 정상적이지 않다.  체념의 끝에서 벌이는 조금은 무분별해 보이는 쾌락에의 추구와도 같은 모습이다. 


  외부인은 끝까지 외부인의 입장이기를 주장하며 고립된 계에서 나가려 한다.  그는 잠재적 위험인자의 처지가 되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현실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람들의 선악은 모호해졌다.  경비대는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야만 한다.  무더운 낮의 해가 저물고 난 선선한 저녁의 기분좋은 공기를 나름의 방법으로 최대한 즐기려 함은 행위의 방법에 있어 이제 어떠한 것도 비난의 대상은 될 수 없다.  페스트 전파의 매개체인 개나 고양이를 죽이는 일은 필수조건이 되어버렸다.  범죄자는 도시의 혼란으로 인해 공권력의 시선밖으로 내몰려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체념과 동시에 극복을 시도하는 이들도 나타난다.  보건대를 꾸려 의심증상의 환자들을 격리시키고 치료를 시도한다. 


  위기앞의 다양한 군상들에게 종교는 신의 형벌임을 강조한다.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마저도 부정하던 종교는 결국 인간의 노력 역시 신의 뜻이라 인정하며 이를 설파하던 신부도 일개 인간으로서 페스트의 희생양이 된다.  페스트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해수병을 앓는 허약한 늙은이를 놓아두고 보건대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젊은이를 희생시킨다.  인간의 노력역시 페스트는 존중해주지 않았다.  혈청을 주사함으로 살려보려 하던 어린아이를 페스트는 더한 고통속에서 좀 더 오래 괴롭혔을 뿐, 결국 인간의 노력을 좌절시키고 만다.


  절명의 위기앞에서 인간군상의 다양한 반응은 당연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추구한 선, 그러니까 위기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과연 얼마나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노력은 인간의 운명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일까?  그 노력이 인간군상에게는 존중받을 수 있겠지만, 자연의 섭리와 신의 의지앞에서 이는 얼마만의 가치로 존중받을 수 있을까?  인간사의 수많은 위기와 희생앞에서 인간행동이 보여주는 수많은 현상들이 드러내는 도덕적 가치의 충돌과 혼란안에 존재하는 딜레마, 그리고 인간행동의 도덕적 가치와 섭리안에서의 가치가 충돌하며 보여주는 딜레마는 영원한 의문으로만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소설의 흐름은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잔잔한 흐름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예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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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조 사코 지음, 정수란 옮김 / 글논그림밭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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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과 지배의 역사에서 이의 주체들이 언제나 내세우는 것은 '억압받는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인민은 최대의 피해자이자 희생자가 된다.  역사의 순간순간 있었던 제노사이드 또는 학살에 있어서는 인민 자체가 목표가 되었고, 그런 순간역시 가장 힘없이 사라져가야 했던 이들은 인민이었다.  


  어쨌거나 인간역사의 모든 충돌에 있어 인민의 희생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시에 인민은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었지만, 어떤 이유로든간에 적군에 의해 또는 아군에 의해 가장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였고 그렇게 죽어간 존재들이었다.  625당시의 국민방위군도 그렇고 노근리나 거창양민학살사건 등등이 우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민학살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학살은 기록마저 불분명한 채, 누군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아서는 안되게 하며, 희미하게 남은 생존자의 기억과 입 언저리에서나 떠도는 이야기로 존재할 뿐이다.


  인민학살의 역사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중이고 조 사코는 그러한 역사 중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침탈과 희생의 역사를 글과 그림을 통하여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그는 1956년 가자지구 내의 칸 유니스에서의 학살사건에 주목한다.  현재의 기록만큼이나 과거의 사건을 발굴하는 작업이 가지는 의미는, 그렇게 의미없이 죽어간 이들을 기억함으로서 현재의 시간에서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런 희생을 겪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는 제목 그대로 1956년 칸 유니스 학살과 연관된 이들을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기억을 되살려내어 기록한다.  이미 노년의 나이가 되어버린 그들의 기억은 많은 부분에서 불분명하지만 조 사코는 퍼즐조각 맞추듯 증언들을 하나하나 대조해가면서 일치하는 것들을 맞추어가며 사건을 시간순으로 재구성해 나간다.  인민 속에 숨은 팔레스타인 병사들을 찾는다는 구실로 자행된 이스라엘군의 학살은 나름 형식적이면서도 잔인한 폭력이었다.  길거리 곳곳의 담벼락에서 남자들은 총에 맞아 죽어갔고, 학교로 집합하는 과정에서 길을 가다가 총에 맞아 죽어야했고 학교에서는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죽어야했던 인민의 기록이 완성된다.  하지만 조 사코는 이게 아주 정확한 재구성인지에는 스스로에게도 의문을 던진다.  50여년의 시간속에 애써 가라앉혔던 노인들의 트라우마를 다시금 꺼내게 만든다는 것의 괴로움과 저마다 기억의 혼란과 어긋남 속에서 기록은 정확성을 완벽하게 갖추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자지구는 지금도 이스라엘의 은근한 군사적 압박속에서 이유없이 집을 잃고 팔과 다리를 잃어야만 하는 처참한 상황이다.  누군가가 조 사코에게 소리지른다.  "1956년이라구요?  지금이 1956년입니다.  대체 달라진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현재의 고통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억의 재구성은 사치였던 것이다.


  부록으로 실린 1956년의 문서와 자료를 살펴보면 그러한 학살을 자행한 주체들은 인민들의 증언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보관된 문서 안에서도 학살의 규모는 증언보다는 작고, 상황에 대한 나름 정당성있게 해석되어있다.  그리고 현재의 이스라엘이 가자 접경지역에서 행하는 거주지 파괴작업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 그들은 그들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그런 작업을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공식적인 입장과 자료, 증거는 언제나 파괴의 주체, 전쟁의 주체, 학살한 자에 의해 기록되고 보관된다.'  이는 곧, 희생당하고 억압받고 학살당한 이들에 의한 기록은 전무하다는 의미이다.  결국, 언제나 약자인 인민의 기억과 전쟁과 파괴와 학살의 주체가 남긴 기록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생각한 건, 그래서 인민의 입장에서 쓰여진 증언과 기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안네의 일기가 주목을 받은 건 그런 이유때문이 아니었을까.  좀 더 확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노동자의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역시 마찬가지이다.  문득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는 작은책 편집장 안건모씨의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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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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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이후로 정치는 사회의 운영과 개인의 삶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세상엔 여전히 정치의 흐름과 정치인들의 움직임이 자신들의 삶과 무관하다며 아무런 관심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만, 정치와 개인의 삶은 따로 가지않을 수 없음이 진실이다.  문제는 이를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의 탈이념성, 삶의 굴레에 매여 깨달을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어쩌면 탈이념과 속박된 삶도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의 한 움직임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와 삶의 밀접함을 느끼는 것도 대개는 관념적이었다.  정치가 삶에 영향을 준다면, 나쁜 정치에 대해 개인의 삶은 어떤 움직임을 보여야하는 걸까 하는 고민에 대해서는 나올 수 있는 답은 그닥 몇개 없었다.  거대한 사회를 조직하고 움직이기 하는 정치에 맞선 한 개인의 저항의 초라함은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또다른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연일 것이다.  통계에 익숙하고 교도소 수감자들의 교화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정신의학자가 정치와 삶의 관계를 분석하여 객관적인 물증을 내어 구체적으로 설명해냈다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이제껏 탈이념과 무관심, 관념성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줄곧 고민만 하던 이들에게 이런 명쾌한 답은 너무도 반가운 일일 것이다.  답의 명쾌함은 너무 간단하기까지 하다.  결국 '투표 잘해라.'라는 이 답.  이 책은 적어도 이 답에 대해서는 이견조차 내밀지 못하도록 상세하고 분명하다.


  이미지의 정치속에 숨어있는 저들의 의도, 정당정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이 책의 내용과 대입해보면 오히려 우리의 선택을 분명하게 해 준다.  보수의 기득을 위한 정치적 행보는 소수 가진자의 이득을 위해 이루어지며 대다수 국민들의 어려움은 개인적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빠져들어 그것이 결국 자살과 살인의 심리적 기제로 작용한다.  반대로 진보(라고 일단 표현하자.)의 정치적 행보는 소수 기득권보다는 다수 국민의 분배문제에 집중을 하고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과 평온의 심리를 형성케 하여 자살과 살인의 심리적 충동을 감소시킨다.  게다가 보수와 진보가 보여주는 자살과 살인율의 증가속도와 감소속도는 저자가 말한대로 치명적 전염병의 증가속도와 감소속도의 양상을 보인다는 데 있어 상당한 의미를 보여준다.  비유하자면 보수와 진보는 치명적 중독성 약물과 이를 해독해주는 해독제의 관계랄까.  이런 관계를 정신심리적 분석기법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 역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한 이해를 하게 만든다.


  물론 이는 미국내의 문제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집권한 두 보수세력의 집권에 따른 미국내의 자살과 살인율, 그 증감속도의 변화는 통계적으로 분석되었고 두 정당의 성향역시 분명하게 밝혀진 바이다.  그러면 이 결과를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집권정당에 따라 비슷한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성향적인 부분에 있어 극우 기회주의정당인 새누리당과 우파정당인 민주당을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에 그대로 대입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우리 정치환경에 분명히 존재하는 중도보수정당과 온건좌파정당, 그리고 정통좌파세력으로 결집하려는 소수세력의 존재환경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자살과 살인율이 감소하는 그나마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가 극우 기회주의정당에게 표를 주는 '미친짓'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때문에 개인적인 이유로 사람이 죽고 죽인다는 게 언뜻보면 이해되지 않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현상이고 분명한 현상앞에서 우리가 '미친짓'을 한다면 그건 개인이나 집단이 '미쳤음'을 자인하는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왜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고 '미친짓'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객관적 통계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많이 늦긴 했지만, 이제 우리는 스스로 미쳤음을 자인하는 꼴은 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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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의 몸 건국인문총서 2
몸문화연구소 지음 / 쿠북(건국대학교출판부)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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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있다는 글에서 시작해보자.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이 문구를 인용한 저자들은 몸이 거하는 일상의 판에서 몸의 이미지와 표현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시각은 다양하다.  인간본연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몸의 이미지를 따라가려는 인간의 노력, 억압에 저항하는 몸의 움직임과 이미지의 구성, 예술의 방식으로 표현되던 몸의 이미지 등등..  일상안에 존재하는 몸과, 몸이 움직임으로 채워가는 일상은 역사와 현재의 시간안에서 춤을 추듯 서로 엉겨 존재해왔다.


  가끔 나는 내 의식과 분리된 몸을 생각해보곤 한다.  내가 노화의 과정을 거쳐 수명을 다하면 나의 의식과 분리된 몸은 썩어 없어질 것이고 그렇다면 이후의 나의 의식은 어디에 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도 가져보곤 했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  일단 나는 나의 의식이 거하는 내 몸을 활용하고 움직여 시간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일상을 채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나의 의무이기도 하고 그것이 어떤 모습이던간에 내 몸의 기력이 다하기 전까지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일상에 존재하는 내 몸의 이미지와 행동은 사회에 매몰되어 수많은 영향을 받아낸다.  결혼과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 둘러싸여 욕망과 감정관계의 자기검열을 강요받고, 세상은 몸짱이라는 표현으로 그것을 건강과 결부시켜 '건강한 몸의 이미지'를 강요한다.  그것은 자본순환의 부품으로 쉴새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현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좀 더 건강한 부품이 되기 위해 시간을 쪼개라는 반강요가 되고, 그렇게 지친 몸과 의식은 브라운관 안에서 과도한 노출로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며 노래하는 젊은 여성들을 바라보며 관음증적 시선을 통해 또다른 몸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직업이 의사인지라 몸에 대한 이미지와 인식과의 싸움도 만만치 않다.  과로를 강요하는 사회에 맞서기보다는 병원에서 한알의 약으로 과로와 질병을 단숨에 해결하고 다시 과로의 사회로 자신의 몸을 내모는 사람들과의 싸움.  그리고 강요된 이미지에 자신의 몸을 성형을 통해 획일화된 미의 테두리 안으로 넣으려는 사람들에 대해 저항의 권유, 그렇게 미의 테두리 내 진입에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의학적 돌봄의 역할.  자연적 욕망에 대해 의학적 도움을 갈구하는 이들에 대한 심정적 지지 등등.. 일상은 하나의 전쟁이자 저항이고 어수선한 난장판이자 어렵게 만들어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상속의 몸은 의식하는 개인과 의식하지 않는 개인의 구분을 떠나 그렇게 각자의 모습으로 한 배를 탄다. 


  일상속의 몸을 인문학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충분한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사뭇 어렵기도 하고 쉽게 다가가지지도 않는 단점을 가진듯 하다.  어렵지않은 의미전달이라는 것은 점점 가볍고 쉬운 것으로만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회변화때문에도 요구되고 있지만, 필자의 의미전달능력이라는 의미도 있어 때론 인문학의 소외가 이런데서 기인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몸과 일상이라는 어쩌면 평범할수도 있는 주제를 이렇게 인문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평범해서 잘 느껴지지 않는 첨예한 부분을 깨닫게 해 주는 의미있는 작업임엔 분명하다.  조금만 더 쉽고 친근한 내용의 글들이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글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만 아니라면, 평범함에 묻힌 일상과 몸이라는 주제를 첨예하게 드러내어 호기심마저 충족시킬 수 있었던 재미가득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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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백혈병의 진실 세트 - 전2권 - 사람 냄새 + 먼지 없는 방 평화 발자국
김수박.김성희 지음 / 보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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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입장도 다른 많은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삼성자본을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만큼의 정당성과 온당함을 가지고 있는지에는 솔직히 자신있게 말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외국의 번화가에 걸린 삼성의 광고를 보고 자랑스러워하는 천박함에서 벗어나고 한 나라의 시스템을 장악하려는 그들의 파렴치함에 비판의 시선을 가지는 정도는 되었지만, 나 개인은 삼성자본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당장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컴퓨터와 항상 들고다니는 스마트폰안엔 삼성의 반도체가 들어있고 집안에는 삼성가전제품이 있으며, 장보기는 종종 삼성자본의 유통망안에 존재하는 대형마트를 이용한다.  비판의 시선을 가질수록 마음만 불편한 이 현실앞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삼성자본의 틀을 벗어날 수나 있긴 한걸까?  설령 온전히 벗어난다 해도, 우리는 그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을까?


  '사람냄새'의 작가 김수박의 말대로 우리의 욕망이 얼마만큼의 악을 묵인하거나 용서할 수 있을까?  이미 현실이 되어 이렇게 책으로까지 쓰여진 두 사람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의 희생앞에 과연 우리는 얼마나 양심적이고 당당할 수 있을까?  삼성자본의 이윤과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얼마만큼이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두 작가가 그리는 두 사람의 희생은 우리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재벌자본 주도의 기술발전이 가져온 편리함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우리들에게, 작품은 그들의 희생을 안타깝게만 그리지 않는다.  작품제작을 위해 녹취한 자신의 녹음기가 삼성의 녹음기임을 그림에 그려넣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대자본의 틀 속에서 움직여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묘사하면서,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욕망과 양심차원의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삼성사람이라는 자부심에 속절없이 우쭐하던 순진한 사람들,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회사의 책임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직원에게 송이를 대접하던 순박한 사람들은 과연 삼성의 희생양만 되어왔을까?  작품 속 희생자들의 상징성을 확대해석해보자면 언제나 있어왔던 대자본, 재벌에 대한 힘없는 이들의 희생에 대한 기록의 연속이다.  먼 옛날 산업사회의 초기, 5살 아동노동의 잔인함으로 시작하여 근대 청계천 평화시장 창문없이 시다일하다가 폐병으로 죽어가던 어린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어져 지금 현재, 삼성이라는 대자본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기록까지 오게 된 것이다.  조금 다른 면이 있다면, 이전과는 달리 현재에는 소수의 희생이 자본의 이윤과 다수의 욕망이 딱히 표현할 수 없는 선에서 타협한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자본, 특히 재벌자본의 구조는 너무도 견고하다.  사회시스템까지 장악해 들어가는 이들의 힘은 희생자들을 위한 싸움을 너무도 어렵게 만든다.  우리의 생활 역시, 그들의 패악을 알면서도 그 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필수를 넘어선 편리와 풍요에의 욕망과 연관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위해 얼마만큼의 악을 용인하거나 묵인해야 할 것인가.  의문은 여전히 유효하고 답에 근접조차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우리는 생각하기를 멈추며 살아간다.  의문과 답을 고민할 생각만이라도 하기 위한 방법은 과연, 자본에의 직접적인 희생에의 당사자가 되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고민이 여기에까지 미치다보면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은 과연 인간적이고 공존가능한 방식인가 하는 의문까지 닿게된다.  시스템과 자본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을 보고 어쩌면 우리가 그런 이들의 입장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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