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운동은 과도해지기 마련이고, 주관성을 지향하는 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운동은 개인을 강조한 루터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했지만, 그 논리에 따라 결국은 개인이 완전히 종속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진리의 주관성‘이라는 개념은그 개념을 뒷받침한다고 여겨지는 전제로부터 제대로 추론할 수없는 성급한 주장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관습은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많은 것들을 신학적 믿음에 의존하는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동일한 종류의 환상에 빠져살았다. 그러나 새로운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오류에 기댈수는 없는 법이다. 사상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초연하고 객관적인 태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특정한 전통 믿음과 연결되어있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초연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믿음 없이도 가능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중요한 일이다. 중요한 작업을 할 때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행동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어느 정도는 고립되어야 한다. 동시대 대중의 찬사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신학적 믿음이 쇠퇴해서가 아니라 고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속에도 나타나는데, 특히 형편없는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남성작가가 쓴 삼류 소설에는 작가가 사랑하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대개 모든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다소 무력하여 남성들이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처럼 여성은 격분한 증오의 대상이자 절망적일 만큼 사악한 존재로 그려진다. 남성 작가는 여주인공을 묘사할 때 관찰에 의존하지 않고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부여한다. 다른 여성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자신이 노트에 쓴 기록을 참고할정도로 더 객관적이 되면서 말이다. 그러나 남성 작가가 사랑에빠졌을 때, 그의 열정은 그와 숭배하는 대상 사이에 안개를 뿌린다. 여성 소설가들 또한 자신의 작품에 두 종류의 여성을 등장시킨다. 하나는 작가 자신으로서 매력적이고 친절하며, 악한 이에게는 욕망의 대상이고 선한 이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며, 감수성 풍부하고 고결하며 끊임없이 오해받는 인물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여성들로 대표되는 소심하고, 악의적이며, 잔인하고 기만적인 인물이다. 여성을 편견 없이 판단하는 것은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 같다.
플라톤은 극작가가 여성인 등장인물을 창조할 때실제 여성을 모방해야 한다는 점이 희곡에 대한 중대한 결점이라보았다. 기독교가 도래하면서 여성은 요부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은 성녀가 될 수 있는 능력도 있다고 여겨졌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요부보다 성녀가 훨씬 더 강조되었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유혹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성의 우월한 미덕은 그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이유가 되었다. 정치에서는 고상한 미덕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이 논리를 뒤집어 여성의정치 참여가 정치를 고귀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이 환상으로 판명된 이후, 여성의 우월한 미덕에 대한 이야기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여성을 요부로 보는 수도승 같은 견해를고수하는 남성들이 많았다.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을 현명한 존재로 생각하며, 남성들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어리석은 일 때문에벌어진 폐해를 바로잡는 것이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여성에 대한 모든 일반화를 불신한다. 호의적이든 비호의적이든, 남성의 관점이든 여성의 관점이든, 고대의 것이든 현대의 것이든모두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은 경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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