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홀릭 - 두 바퀴 위의 가볍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나다
김준영 지음 / 갤리온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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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 책을 선물받고는 무척 반가웠다. 자주 한강으로 나가 자전거를 타는 터라 자전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그 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탄지는 참으로 오래 되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자전거로 등하교를 했고, 자전거를 탈 수 없었던 대학 시절을 제외하면 자전거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뿐만 아니라 운동기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자전거가 운동기구가 될 때, 일정한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자전거가 좀 더 잘 나가줘야 하므로 일상적으로 정비도 좀 해줘야 하고 기름칠도 해줘야 한다. 바퀴의 바람에도 신경이 더 쓰인다. 약간의 장비들도 더 필요해진다. 밤의 라이딩을 위해서는 등불이 필요하고, 운동상황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속도계도 있는 것이 좋다. 일상적으로 위험한 구간을 달릴 경우에는 헬멧도 필요하다. 땀도 많이 흘리게 되니 땀을 잘 흡수하면서도 통풍이 잘 되는 옷도 필요하다. 이래 저래 돈이 좀 쓰이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은 딱 나같은 자전거 이용자를 위해 쓰여진 듯하다. 그냥 생활자전거 끌고 장도 보고 가까운 곳도 가는 정도로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딱히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책에 적힌 수많은 정보와 경험담을 몰라도 그런 정도의 이용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자전거에 대한 필요한 지식을 제법 챙길 수 있었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도 많고, 이미 알던 것들도 적지 않았지만, 좀 더 체계적으로 알게 된 것들도 적지 않다. 

다만 자전거를 보는 저자의 눈이 나보다 훨씬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백만원짜리 자전거를 샀다는 것도 내게는 낯선 일이고, 온갖 업글 경험의 이야기도 내게는 별로 와닿는 게 없었다. 내가 지금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마련하고 이런 저런 필요한 장비를 마련하는 데는 총 40만원 전후 정도가 든 듯하다. 저자가 말하는 자전거는 이 수준이 아니다. 그렇다고 뭐라 할 생각은 없다. 자기 주머니 사정에 맞게, 자신의 욕구와 사용패턴에 맞게 합리적으로 소비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저자 역시 자신의 경험과 눈높이를 모든 이에게 기준으로 강요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어쨌든 이 책은 자전거를 운동기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유용한 지식을 전해주는 책이다. 자전거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차근차근 경험했던 것들을 잘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기에 일반 자전거 이용자에게 더 짭짤한 소득을 안겨주는 책이다.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은 이 책에 비문, 즉 문장이 안 되는 문장들이 많다는 것이다. 문체가 다소 잡지문체를 본딴 듯하기는 하지만 저자의 필력은 상당히 좋아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문장들이 제법 많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최선의 방법은 방어 운전을 통한 안전을 스스로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302쪽) '방법은' 이 주어라면 술어는 '~이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최선의 방법은 방어 운전을 통해 안전을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다." 이런 비문이 버젓이 책에 실려있는 것은 저자와 출판사의 공동책임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저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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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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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반 년쯤 전인 듯하다. 기본적으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호기심에서 몇 페이지 뒤적이다가 그냥 두었다가 화장실에 갈 때 들고 들어갔다가 또 그냥 뒀다가 자기 전에 침대에서 읽다가 그랬다. 전혀 집중해서 읽지 못했고, 읽은 기간이 길다보니 앞쪽의 내용에 대한 기억은 벌써 희미하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오늘 끝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서 제대로 된 리뷰는 어차피 쓰지 못하겠지만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몇 자 적어본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의 지적 성장사와 그의 활동무대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학업과정과 지적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이를 통해 얻은 인식과 통찰을 청소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기본내용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참으로 흥미로운 공간으로 보인다. 일체의 학연이나 학위 따위를 무시하고 오로지 책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정열로 모인 사람들의 진지한 독서와 교육의 장소로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공동의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식과 지적인 자극이 오죽 많겠는가. 그들의 활동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얄밉기도 한 곳이다. 얄밉다는 것은 나로서는 그런 공간에서 활동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독서예찬론이다. 독서를 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고 깊어지고 사고가 자유로워지며 그리하여 인생도 주체적으로 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실상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저자의 태도가 워낙 곡진하고 진실하여 독자로 하여금 귀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의문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선 청소년들이 독서를 멀리 하거나 시험점수와 관련된 독서만 한다는 진단도 새로울 것이 없거니와,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저자가 내놓는 것이 제대로 된 독서를 하라는 권고뿐이라는 점이 눈에 거슬린다. 저자는 청소년들이 뭘 몰라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교육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 청소년의 사회적 성장과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청소년들이 개인적으로 이런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사회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회적 조건이 바뀔 때, 독서의 양상도 획기적으로 바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인식은 마치 사회적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성실성의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시장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과연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책을 꼭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집단이 교수사회다. 그러나 교수사회가 삶을 제대로 사는 사람들, 본받을 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깊은 통찰과 뚜렷한 도덕의식을 보여주는 사람들인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저잣거리의 장수보다 못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독서의 양과 올바른 삶이 비례한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물론 저자는 이렇게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실리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독서를 한 사람들이 교수사회에도 많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적어도 교수집단에는 무식한 사람들의 집단보다에서 보다는 더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율적으로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독서와 올바른 삶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니 말이다. 그러나 딱히 비율적으로 그러하다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은 듯하다. 결국 독서와 올바른 삶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독서가 오히려 올바른 삶을 사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는 주장들도 있다. 루소의 <학문예술론>이 그러하고 노자의 <도덕경>이 그러하다. 나로서는 이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기도 어렵다. 이 역시 입증되기 어려운 주장에 그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서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책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삶의 조건과 그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관심과 인식에 의해 훨씬 더 좌우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독서는 어디까지나 올바른 삶에 부차적인 결정요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삶은 삶 자체에 의해 규정된다. 삶에 의한 삶의 이런 규정과정에 독서는 대개 약간의 변주를 가능하게 해줄 뿐이다.우리에게 책의 말들을 "들을 줄 아는 귀와 영혼이 있을 때에만, 적어도 우리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꽃피게 한 사상의 뿌리가 간직되어 있을 때에만" 책은 우리들에게 말한다. 나는 윌 듀란트의 이 생각에 공감한다. 
 

또한 인식과 행동 사이의 간격이라는 문제도 있다. 아무리 풍부하고 현란한 지식과 인식의 세계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행동은 영 딴판인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인식과 행동 사이에는 의지라는 매개체가 있다. 인식이 의지로 이어지는 과정은 결코 자동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 이를 무시한 대표적인 사람이 플라톤이다. 공부만 많이 하면 올바른 삶을 살게 된다는 저자의 생각은 인식과 의지 사이의 이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정에 대한 성찰이 빠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책이란 결국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말을 할 것을 글로 옮겨 적어서 여러 사람들이 시공간의 제약에 제한되지 않고 내 말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글이고, 이 글을 인쇄한 종이묶음의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이 책이다. 물론 말이 글이 되는 과정 역시 복잡하고, 말과 글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같은 내용을 말로 할 수도 있고 글로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말과는 다른 글의 장점이 있어서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독서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과정이다. 내가 궁금한 것, 내게 흥미로운 내용, 혹은 내가 전혀 모르던 것을 다른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 들어보는 것이 독서다. 책이 말과 달리 시공간을 떠나 존재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편리하게 들어볼 수 있는 생각도 책을 통하면 엄청나게 많아진다. 바로 이 점에 독서의 미덕이 있다. 그러나 내가 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쁘거나 실리만 추구하는 것이거나 단순한 오락일 뿐이거나 하다면 책을 통해 내가 나아질 것은 별로 없다. 결국 책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나에 의해 좌우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 책을 돌이켜보면, 저자는 독서에 대한 거의 신비주의적인 열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열광을 느낄 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너무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올바른 삶이라는 주제는 독서라는 틀로는 거의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다.


결국 나에 관한 한, 이 책을 통해 어떤 보편적인 인식을 얻었다기 보다는 한 개인의 독특한 경험을 보는 즐거움을 얻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듯하다. 이를 인정하고 보면, 이 책은 분명 흥미로운 면이 있다. 한 사람이 독서를 통해 어떤 즐거움과 삶의 확장을 얻었는지 보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례가 많은 청소년들에게 전염력을 발휘하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한 예측은 무척 조심스럽지만 말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고미숙의 허생전 읽기는 아주 순진하고 소박하다. 허생은 교훈보다는 의문을 더 남겨주는 인물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의 다른 리뷰에서 적어놓은 바 있으니, 보실 분은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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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5 16:59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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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벨아미>가 새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읽어봤다. 번역이 매끄럽고 좋다. 역자와 출판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벨아미>를 외국어로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그만둔 것이 7, 8년쯤 전이었으니 개인적으로 이번의 독서는 실로 숙원사업을 이룬 것이다. 당시, 이 책의 한국어판을 찾아보았으나 오래 전의 어떤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이후 새로 번역된 것이 없었다. 아마 70년대쯤에 번역된 것으로 짐작되는 세로쓰기의 그 번역본을 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짐작일 뿐이지만) 허술한 번역본을 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독서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험을 이미 여러 번 한 터라 그랬다. 그러나 <벨아미>는 늘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떠오를 때마다 해결하지 못한 숙제처럼 늘 찜찜한 기분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결국 이번의 새 번역 덕택에 이 숙제를 만 하루 만에 해결해버렸다. 그러니 내가 역자와 출판사에 고맙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벨아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는 아름다움과 도덕성, 미와 선의 분리 혹은 분화라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플라톤 이래 오랫동안 미와 선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계몽주의 시대에도 미는 선에 복무하는 기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미 계몽주의 미학 내부에서 양자의 분리가 시작되었고, 이후 칸트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분리되었다. 낭만주의에서는 오히려 미가 선보다 더 궁극적인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선언되기도 했으며, 이후 예술을 위한 예술과 유미주의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도덕을 무시하는 미 자체의 탐닉이 추구되었다.

<벨아미>는 주인공 뒤루아의 외적인 아름다움이 오히려 그를 도덕적인 타락으로 이끄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감각적인 미가 도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내면과 외면의 철저한 분리, 내면과 외면의 결합의 우연성, 이 우연성이 인간을 유혹으로 이끄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모파상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지극히 충실한 묘사와 신랄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그가 묘사한 현실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의 우리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많은 작품이다.

작품의 첫 부분에서 이미 확실히 강조되듯이, 뒤루아의 두드러지는 특성은 외모의 아름다움이다. 첫 페이지부터 이미 그에게는 늠름하다, 미남이다, 우아하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다, 라는 특성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특성은 가난함이다. 처음부터 그는 밥값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신세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배고픔 외에도 성욕에 시달리고 있다. 배고픔과 성욕,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두 가지 근본충동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생의지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배고픔을 통해, 종의 차원에서는 성욕을 통해 발현된다. 역자가 적어놓은 대로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모파상은 여기서 완벽한 쇼펜하우어적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 즉 뒤루아는 이 두 가지 욕망을 충족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그의 외적인 아름다움이다. 이제 독자는 그가 아름다움이라는 자본을 어떻게 운용하여 배고픔과 성욕을 넉넉하게 충족시키게 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의 순서는 이러하다. 우선 뒤루아는 아름다움을 통해 많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며, 이는 곧 성욕의 충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성은 그에게 성욕의 충족의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또 한 명의 돈 후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욕의 충족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다. 여성은 그에게 부와 출세, 권력을 향한 도구로 사용된다. 이 도구로서의 역할이 끝나거나 더 좋은 도구가 나타날 때, 여성은 버려지거나 부차적인 역할로 전락한다. 이런 그는 물론 요즘 흔히 나쁜 남자’(10쪽에서는 실제로 그가 나쁜 사람과 흡사하다는 말이 나온다. 번역본에서는 이 말을 악한으로 번역해놓았다)로 통칭되는 옴므파탈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의 연애행각의 상대가 되는 여자들 역시 착한 여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소설 전체에 걸쳐 왈테르 부인을 제외하면 이 작품에서 착한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뒤루아는 예외적인 개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을 대표하는, 당대의 전형적인 인물이며, 따라서 뒤루아에 대한 분석은 개인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방탕한 사람들’(27)의 시대에 대한 분석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 소설의 강점이 있다. 또한 여기서 여성들이 나쁜 남자의 매력에 빠져들기를 갈망하는 듯한 우리 시대에 대해 이 작품이 던져주는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뒤루아는 결코 처음부터 악한이 아니었다. 그는 딱히 도덕적이지도 않지만 그저 욕망을 좇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알제리에서 살인과 약탈에 가담한 일이 있지만, 이는 그 개인의 악함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당대를 지배했던 인종적인 편견에 합류한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이 아름다움의 효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포레스티에의 집에 처음 초대를 받아간 날,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몹시 놀란다. 잘 차려 입은 자신의 모습이 누군가 다른 사람’(34)인 듯 했기 때문이다. 이 때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외모가 성공의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고 예감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성 앞에서 서툴고, 대화와 사교의 기술도 부족하며, 포레스티에 덕택에 기자로서 하게 된 글쓰기 일에도 극히 무능하다. 그는 의기소침하고 위축되며 겁먹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남성적인 내면과 그런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이 아니다. 이는 특히 루이 랑그르몽과의 결투에 임하는 그의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악몽에 시달리며 겁에 질려 덜덜 떠는 그의 모습은 너절하고 초라하며, 독자는 그의 이런 모습에서 오히려 그에게 공감할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처음부터 전략적으로 사고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여자들이 먼저 그에게 반해서 접근해온다. 이는 창녀로부터 왈테르 부인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상대가 이미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진 것을 알고 난 후에야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다만 마들렌의 경우만이 예외인데, 이 경우에는 마들렌 역시 자연적이고 격정적인 사랑을 거의 알지 못하는 인물임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떤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타인의 신호와 지적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 무기를 사용할 것을 거의 권고 받다시피 한 것이다. 그가 도덕적인 의식이 뚜렷한 인물이었다면 물론 이 무기의 사용을 거부했겠지만, 그는 그저 저 배고픔과 성욕을 채우고 싶은 인물일 뿐이었다. 딱히 선인도 아니었지만, 악한도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이 저절로 지니고 있는 무기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은 것이 그의 도덕적 악행의 시작이었지만, 그는 이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악한의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무기 외에도 지략이라는 무기까지 지닌 인물임이 드러난다. 마들렌에 대한 지극히 전략적이고 적절한 인내까지 발휘할 줄 아는 접근방식이 그러하고, 왈테르 부인에 대한 접근이나 쉬잔에 대한 접근에서도 그는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취하는 지략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런 지략을 발휘하게 된 근본적 이유 역시 이러한 지략이 쉽게 먹혀 들어가고, 도처에서 이러한 지략을 반도덕적 행위를 위해서 활용하는 자들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을 그가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뒤루아로 하여금 반도덕적이며 영민한 행위로 치달을 것을 부추기고, 그는 이런 부추김에 점점 더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도덕적 추락과 사회적 성공이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리하자면, 뒤루아는 특별한 문제적 개인으로서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인물이 아니라, 외적 환경이 요구하는 특성에 적합한 잠재적 능력을 지닌 개인이 이 외적 환경과 조우함으로써 그 환경의 확실한 일원이 되어가는 인물이다. 표면에서의 적극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는 사태를 추동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사태에 의해 추동되는 인물이며, 시대정신에 의해 선택되고 주조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초기 제3공화국의 명실상부한 전형적 인물이다. 아직 사회의 구조화가 진행 중이던 시대이어서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많았던 시대, 이런 기회를 움켜쥐기 위해 혈안이 된 저 방탕한 사람들이 득실대던 시대,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성공을 거두던 시대, 그러므로 약육강식의 사회다윈주의적 질서가 지배하던 시대의 전형인 것이다. 뒤루아는 이런 시대의 산물이며, 히폴리트 텐의 실증주의적 환경결정론의 한 증참이다. 그리고 사회와 접촉할수록 타락해가는 그의 삶의 전개는 독일의 교양소설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모파상은 뒤루아에 대해, 아니 작품 전체에 걸쳐 철저히 자신의 개입을 피한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뒤루아를 중심으로 한 인물시점에서 서술되며, 독자는 작가가 이런 인물들과 시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거의 확인할 수 없다. 보기에 따라서는 뒤루아는 모파상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파상은 파리에서 지극히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한 편지에서는 자신을 벨 아미로 칭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뒤루아와 동일한 기회가 부여된다면, 자신의 선택도 뒤루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 하다. 그가 뒤루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철저히 유보하는 것은 그의 문학적 방법론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인 의식에 기인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뒤루아와 그의 시대에 대해 얼마든지 비판적으로 볼 수 있고, 이 작품은 그런 비판의 기회를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 타인을 도구로 삼고, 욕정으로 인해 배우자에 대한 충실함의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 언론과 권력의 결탁, 사익을 채우기 위한 제국주의, 배타적 정보독점을 통한 치부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런 모든 묘사들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시대가 결코 뒤루아의 시대에 비해 낫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언론과 권력의 결탁은 눈이 있는 자라면 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고, 사익을 공익으로 위장하는 정책이 남발되는 시대, 부동산이나 주식에 대한 고급정보를 활용하는 듯한 특권층의 치부, 권력에 아부하고 정신을 팔아 넘기는 지식인들 이런 것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우리의 현실이다. 나로서는 왜 우리 문학에서는 <벨아미>와 같은 작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너무 많은 작가들이 괴상한 고민에 빠져있거나 일상의 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시대가 문학에 제공하는 소재들은 프랑스의 제3공화국에 비해 결코 빈약하지 않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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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미학과 숭고함의 예술론 - 쉴러의 고전주의 문학 연구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592
김수용 지음 / 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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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용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독문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연구서는 결코 독일의 기존 연구들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의 텍스트와의 철저한 대결과 충실한 해석 의지가 그의 모든 책에 짙게 배어있다. 그리고 그런 사고의 결과들을 결코 현학적이거나 난해하게 표현하지 않고, 사색의 결과에 가장 충실한 언어로 조리있는 순서를 밟아 서술한다. <괴테 파우스트 휴머니즘>(2004)과 <예술의 자율성과 부정의 미학>(1998)이 그랬다.

 

<아름다움의 미학과 숭고함의 예술론>에서도 김수용의 학자적 성실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독일의 최근 연구서들까지 충실하게 읽고 내용에 반영했다. 그리고 그 연구서들에서 서술된 입장들에 대한 저자의 입장도 뚜렷하다.

 

책의 내용은 1부에서 쉴러 총론을 서술한 후, 2부에서 쉴러 미학의 역사적 배경을 현대의 분열적 경험과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3, 4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쉴러 미학의 서술에 접어든다. 3부가 아름다움을, 4부가 숭고를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쉴러 미학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발렌슈타인>을 해석한다.

 

이러한 순서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책은 하나의 뚜렷한 주제를 두고 쉴러를 해석하는 연구서라기보다는 상당히 총론적 접근에 가깝다. 그러나 총론적 서술 속에서도 개별 사항들에 대한 논의가 부실하지 않아서 짧은 분량 안에 성실한 독서와 사색의 결실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저자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 책을 이루는 상당한 분량은 쉴러의 텍스트와 기존 해석들을 정리하는 데 할애되어 있지만, 그 정리가 잘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정리 자체에 배어있는 해석들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

 

단순히 쉴러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전체적으로 일별하고자 하는 독자라도 이 책으로부터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김수용의 책들이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게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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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누아 뒤퇴르트르 지음, 함정임 옮김 / 강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내 핸드폰은 제법 오래 된 편이다. 여러 해 동안 바꾸지 않고 있어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내 것만큼 오래 된 모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나와 비슷한 기계를 꺼내들기도 하지만, 이런 일마저 날이 갈수록 드물어진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내 핸드폰을 새 모델로 바꾸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통화도 잘 되고, 문자도 잘 된다. 물론 3자 버튼이 약간 고장이 나서 힘껏 꾹 눌러주지 않으면 입력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약간만 주의하면 별 탈 없이 쓸 수 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핸드폰을 재빨리 갈아치우는 것일까?

자동차의 경우도 비슷하다. 외국에 나가보면 10년 된 차는 흔해빠졌고, 15년, 심지어 20년 된 차들까지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도로는 반짝거리는 새 차들로 즐비하다. 한국차의 수명이 외국차에 비해 짧다는 것이 과연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의 전부일까?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하는 아이라면 모를까, 문서작업이나 인터넷 정도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7, 8년 된 컴퓨터라도 얼마든지 큰 불편 없이 쓸 수 있다. 그래도 대부분 컴퓨터의 사용기간을 기껏해야 5년쯤으로 잡는 것 같다.

사람들은 돈이 남아도는 것일까. 바꿀 필요도 없는 100만 원짜리 컴퓨터를 90만원에, 바꿀 필요도 없는 40만 원짜리 핸드폰을 15만원에 사면, 바꿀 필요도 없는 1000만 원짜리 새차를 950만원에 사면 이익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로 필요해서 물건을 바꾸는 사람도 있겠지만, 새 상품의 이점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광고의 역할도 톡톡할 것이다. 날이 갈수록 광고는 상품의 실제적 효용을 전달하기보다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김태희폰’, ‘이효리폰’이 거의 상품명이다. 우리는 너무 순진한 소비자들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선거에서도 이미지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내 생각은, 상당히 그렇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순진하다. 이런 순진함으로 인해 그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사고, 그 때문에 쪼들린다. 선거에서 뽑아주어서는 안 될 사람을 뽑아주고 뒤늦게 한탄한다. 알뜰한 소비자, 똑똑한 투표자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나 많다.

이 책은 핸드폰을 산 지 일주일 만에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나로 말하자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몇 년 째 핸드폰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지만, 이런 일이 내게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당연히 그 남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이 남자는 핸드폰을 잃어버린 덕택에 무수한 자동응답 시스템의 음성들을 들어야 하고, 바가지 전화요금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연결된 안내원도 회사의 매뉴얼에 따라 앵무새같은 대답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말단 직원은 일종의 쓰레기 청소부와 같다. 불만에 가득 찬 고객의 항의를 최하 말단의 자리에서 들어주고 기업이 시킨 대로 대답하는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이런 일이 연거푸 일어난다. 현금인출기 앞에서는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돈을 인출하지 못한다. 은행과의 싸움도 역시 사람이 아니라 기계와의 싸움이다. 비행기를 탔다가 돌아오는 시간을 바꾸려고 하면서 다시 자동응답 시스템과 오랫동안 씨름을 한다. 컴퓨터가 난데없이 비밀번호들을 요구하고, 시스템이 다운되어 버린다. 신청하지도 않은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요금청구서가 날아든다. 결국 이 남자는 전화통을 버리고 항공사로, 통신사로 직접 찾아간다. 그러나 이런 손님을 맞는 것은 천신만고 끝에 연결된 전화상담원과 다를 바 없는 직원들이다. 광고에 현혹되어 덜컥 계약을 했다가 문제가 생겨 결국 회사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긴 줄을 서있다. 번호표를 뽑아들고 기약 없이 기다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서비스센터를 나서는 사람들도 많다. 모든 회사들이 다 이럴 것이므로 대안이 없다. 대안이 없는 고객들은 절대적인 약자들이며, 기업의 볼모들이자 노예들이다. 결국 소수의 기업임원들의 터무니없는 수입을 매달 차곡차곡 채워주는 어중이떠중이들에 불과하다.

일종의 디스토피아다. 모든 것이 기업의 매뉴얼에 따라 지배되는 세상, 모든 세상사가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처리되는 세상, 개인과 개인의 대화가 체계적으로 단절되고 지연되는 세상, 추상적인 기계언어가 구체적인 삶의 언어를 대체해버리는 세상, 소수의 기업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을 독점하는 세상, 삶의 거의 모든 영역들이 ‘민영화’되는 세상, 국가도 또 하나의 기업으로 변해버리는 세상, 이 모든 변화를 통해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 엄청난 힘의 불균형이 생기는 세상 - 한마디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끝이 어디인지를 이 소설은 보여준다.

소설의 내용은 아주 쉽고 일상적이며 상식적이다. 문체 또한 그렇다. 그러니 책을 다 읽는 데 겨우 몇 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남는 인상은 꽤나 진하다. 소설에서 이야기되는 대부분의 현실들이 이미 우리의 현실들이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살 때는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지만, 해약하려면 참으로 복잡하고 수고스럽다. 녹음된 음성을 들으며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기계에 서너 번만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다가는 된 통 서리를 맞는다. 비밀번호를 다 똑같이 해놓으면 위험이 크다고 하는데, 그 많은 다른 비밀번호들을 어떻게 외운단 말인가. 이것이 도대체 ‘합리화’인가? 고용인원을 줄이면 주가가 올라간다. 내 일자리가 사라지는 순간, 누군가 떼돈을 번다. 합병 이야기만 나오면 또 주가가 올라간다. 소수 기업이 더욱 막강해지는 순간, 나의 힘은 줄어든다. 그것이 세계화, 선진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참아야 하는가?

제기된 문제의 의미심장함에 비해 소설의 결말은 좀 허무하다.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는 아름다운 여직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남자의 불만은 방향을 잃고 만다.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을 좀 대접해달라는 것뿐이었던가? 이렇게 끝나야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런 정신 나간 세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짜 논리들이 가짜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강력하게,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이 해결책까지 제시해줄 필요는 없다. 이 남자의 맥없는 결말 자체가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경우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결말은 좀 허무하지만, 그래도 이 소설은 우리 ‘소비자’들이 어떤 계략에 말려들어 있는지 한 번 제대로 따져보게 한다는 점에서 읽을 만하다. 독서를 위한 몇 시간의 투자로서는 소득이 톡톡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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