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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마침내 <벨아미>가 새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읽어봤다. 번역이 매끄럽고 좋다. 역자와 출판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벨아미>를 외국어로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그만둔 것이 7, 8년쯤 전이었으니 개인적으로 이번의 독서는 실로 숙원사업을 이룬 것이다. 당시, 이 책의 한국어판을 찾아보았으나 오래 전의 어떤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이후 새로 번역된 것이 없었다. 아마 70년대쯤에 번역된 것으로 짐작되는 세로쓰기의 그 번역본을 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짐작일 뿐이지만) 허술한 번역본을 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독서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험을 이미 여러 번 한 터라 그랬다. 그러나 <벨아미>는 늘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떠오를 때마다 해결하지 못한 숙제처럼 늘 찜찜한 기분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결국 이번의 새 번역 덕택에 이 숙제를 만 하루 만에 해결해버렸다. 그러니 내가 역자와 출판사에 고맙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벨아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는 아름다움과 도덕성, 미와 선의 분리 혹은 분화라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플라톤 이래 오랫동안 미와 선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계몽주의 시대에도 미는 선에 복무하는 기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미 계몽주의 미학 내부에서 양자의 분리가 시작되었고, 이후 칸트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분리되었다. 낭만주의에서는 오히려 미가 선보다 더 궁극적인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선언되기도 했으며, 이후 예술을 위한 예술과 유미주의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도덕을 무시하는 미 자체의 탐닉이 추구되었다.
<벨아미>는 주인공 뒤루아의 외적인 아름다움이 오히려 그를 도덕적인 타락으로 이끄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감각적인 미가 도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내면과 외면의 철저한 분리, 내면과 외면의 결합의 우연성, 이 우연성이 인간을 유혹으로 이끄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모파상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지극히 충실한 묘사와 신랄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그가 묘사한 현실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의 우리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많은 작품이다.
작품의 첫 부분에서 이미 확실히 강조되듯이, 뒤루아의 두드러지는 특성은 외모의 아름다움이다. 첫 페이지부터 이미 그에게는 늠름하다, 미남이다, 우아하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다, 라는 특성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특성은 가난함이다. 처음부터 그는 밥값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신세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배고픔 외에도 성욕에 시달리고 있다. 배고픔과 성욕,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두 가지 근본충동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생의지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배고픔을 통해, 종의 차원에서는 성욕을 통해 발현된다. 역자가 적어놓은 대로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모파상은 여기서 완벽한 쇼펜하우어적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 즉 뒤루아는 이 두 가지 욕망을 충족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그의 외적인 아름다움이다. 이제 독자는 그가 아름다움이라는 자본을 어떻게 운용하여 배고픔과 성욕을 넉넉하게 충족시키게 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의 순서는 이러하다. 우선 뒤루아는 아름다움을 통해 많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며, 이는 곧 성욕의 충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성은 그에게 성욕의 충족의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또 한 명의 돈 후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욕의 충족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다. 여성은 그에게 부와 출세, 권력을 향한 도구로 사용된다. 이 도구로서의 역할이 끝나거나 더 좋은 도구가 나타날 때, 여성은 버려지거나 부차적인 역할로 전락한다. 이런 그는 물론 요즘 흔히 ‘나쁜 남자’(10쪽에서는 실제로 그가 ‘나쁜 사람’과 흡사하다는 말이 나온다. 번역본에서는 이 말을 ‘악한’으로 번역해놓았다)로 통칭되는 옴므파탈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의 연애행각의 상대가 되는 여자들 역시 ‘착한 여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소설 전체에 걸쳐 왈테르 부인을 제외하면 이 작품에서 착한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뒤루아는 예외적인 개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을 대표하는, 당대의 전형적인 인물이며, 따라서 뒤루아에 대한 분석은 개인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방탕한 사람들’(27쪽)의 시대에 대한 분석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 소설의 강점이 있다. 또한 여기서 여성들이 ‘나쁜 남자’의 매력에 빠져들기를 갈망하는 듯한 우리 시대에 대해 이 작품이 던져주는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뒤루아는 결코 처음부터 악한이 아니었다. 그는 딱히 도덕적이지도 않지만 그저 욕망을 좇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알제리에서 살인과 약탈에 가담한 일이 있지만, 이는 그 개인의 악함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당대를 지배했던 인종적인 편견에 합류한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이 아름다움의 효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포레스티에의 집에 처음 초대를 받아간 날,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몹시 놀란다. 잘 차려 입은 자신의 모습이 ‘누군가 다른 사람’(34쪽)인 듯 했기 때문이다. 이 때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외모가 성공의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고 예감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성 앞에서 서툴고, 대화와 사교의 기술도 부족하며, 포레스티에 덕택에 기자로서 하게 된 글쓰기 일에도 극히 무능하다. 그는 의기소침하고 위축되며 겁먹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남성적인 내면과 그런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이 아니다. 이는 특히 루이 랑그르몽과의 결투에 임하는 그의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악몽에 시달리며 겁에 질려 덜덜 떠는 그의 모습은 너절하고 초라하며, 독자는 그의 이런 모습에서 오히려 그에게 공감할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처음부터 전략적으로 사고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여자들이 먼저 그에게 반해서 접근해온다. 이는 창녀로부터 왈테르 부인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상대가 이미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진 것을 알고 난 후에야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다만 마들렌의 경우만이 예외인데, 이 경우에는 마들렌 역시 자연적이고 격정적인 사랑을 거의 알지 못하는 인물임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떤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타인의 신호와 지적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 무기를 사용할 것을 거의 권고 받다시피 한 것이다. 그가 도덕적인 의식이 뚜렷한 인물이었다면 물론 이 무기의 사용을 거부했겠지만, 그는 그저 저 ‘배고픔과 성욕’을 채우고 싶은 인물일 뿐이었다. 딱히 선인도 아니었지만, 악한도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이 저절로 지니고 있는 무기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은 것이 그의 도덕적 악행의 시작이었지만, 그는 이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악한의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무기 외에도 지략이라는 무기까지 지닌 인물임이 드러난다. 마들렌에 대한 지극히 전략적이고 적절한 인내까지 발휘할 줄 아는 접근방식이 그러하고, 왈테르 부인에 대한 접근이나 쉬잔에 대한 접근에서도 그는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취하는 지략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런 지략을 발휘하게 된 근본적 이유 역시 이러한 지략이 쉽게 먹혀 들어가고, 도처에서 이러한 지략을 반도덕적 행위를 위해서 활용하는 자들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을 그가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뒤루아로 하여금 반도덕적이며 영민한 행위로 치달을 것을 부추기고, 그는 이런 부추김에 점점 더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도덕적 추락과 사회적 성공이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리하자면, 뒤루아는 특별한 문제적 개인으로서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인물이 아니라, 외적 환경이 요구하는 특성에 적합한 잠재적 능력을 지닌 개인이 이 외적 환경과 조우함으로써 그 환경의 확실한 일원이 되어가는 인물이다. 표면에서의 적극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는 사태를 추동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사태에 의해 추동되는 인물이며, 시대정신에 의해 선택되고 주조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초기 제3공화국의 명실상부한 전형적 인물이다. 아직 사회의 구조화가 진행 중이던 시대이어서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많았던 시대, 이런 기회를 움켜쥐기 위해 혈안이 된 저 ‘방탕한 사람들’이 득실대던 시대,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성공을 거두던 시대, 그러므로 약육강식의 사회다윈주의적 질서가 지배하던 시대의 전형인 것이다. 뒤루아는 이런 시대의 산물이며, 히폴리트 텐의 실증주의적 환경결정론의 한 증참이다. 그리고 사회와 접촉할수록 타락해가는 그의 삶의 전개는 독일의 ‘교양소설’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모파상은 뒤루아에 대해, 아니 작품 전체에 걸쳐 철저히 자신의 개입을 피한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뒤루아를 중심으로 한 인물시점에서 서술되며, 독자는 작가가 이런 인물들과 시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거의 확인할 수 없다. 보기에 따라서는 뒤루아는 모파상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파상은 파리에서 지극히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한 편지에서는 자신을 ‘벨 아미’로 칭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뒤루아와 동일한 기회가 부여된다면, 자신의 선택도 뒤루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 하다. 그가 뒤루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철저히 유보하는 것은 그의 문학적 방법론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인 의식에 기인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뒤루아와 그의 시대에 대해 얼마든지 비판적으로 볼 수 있고, 이 작품은 그런 비판의 기회를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 타인을 도구로 삼고, 욕정으로 인해 배우자에 대한 충실함의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 언론과 권력의 결탁, 사익을 채우기 위한 제국주의, 배타적 정보독점을 통한 치부 –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런 모든 묘사들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시대가 결코 뒤루아의 시대에 비해 낫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언론과 권력의 결탁은 눈이 있는 자라면 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고, 사익을 공익으로 위장하는 정책이 남발되는 시대, 부동산이나 주식에 대한 ‘고급정보’를 활용하는 듯한 특권층의 치부, 권력에 아부하고 정신을 팔아 넘기는 지식인들 – 이런 것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우리의 현실이다. 나로서는 왜 우리 문학에서는 <벨아미>와 같은 작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너무 많은 작가들이 괴상한 고민에 빠져있거나 일상의 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시대가 문학에 제공하는 소재들은 프랑스의 제3공화국에 비해 결코 빈약하지 않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