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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ㅣ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반 년쯤 전인 듯하다. 기본적으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호기심에서 몇 페이지 뒤적이다가 그냥 두었다가 화장실에 갈 때 들고 들어갔다가 또 그냥 뒀다가 자기 전에 침대에서 읽다가 그랬다. 전혀 집중해서 읽지 못했고, 읽은 기간이 길다보니 앞쪽의 내용에 대한 기억은 벌써 희미하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오늘 끝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서 제대로 된 리뷰는 어차피 쓰지 못하겠지만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몇 자 적어본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의 지적 성장사와 그의 활동무대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학업과정과 지적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이를 통해 얻은 인식과 통찰을 청소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기본내용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참으로 흥미로운 공간으로 보인다. 일체의 학연이나 학위 따위를 무시하고 오로지 책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정열로 모인 사람들의 진지한 독서와 교육의 장소로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공동의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식과 지적인 자극이 오죽 많겠는가. 그들의 활동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얄밉기도 한 곳이다. 얄밉다는 것은 나로서는 그런 공간에서 활동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독서예찬론이다. 독서를 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고 깊어지고 사고가 자유로워지며 그리하여 인생도 주체적으로 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실상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저자의 태도가 워낙 곡진하고 진실하여 독자로 하여금 귀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의문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선 청소년들이 독서를 멀리 하거나 시험점수와 관련된 독서만 한다는 진단도 새로울 것이 없거니와,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저자가 내놓는 것이 제대로 된 독서를 하라는 권고뿐이라는 점이 눈에 거슬린다. 저자는 청소년들이 뭘 몰라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교육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 청소년의 사회적 성장과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청소년들이 개인적으로 이런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사회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회적 조건이 바뀔 때, 독서의 양상도 획기적으로 바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인식은 마치 사회적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성실성의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시장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과연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책을 꼭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집단이 교수사회다. 그러나 교수사회가 삶을 제대로 사는 사람들, 본받을 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깊은 통찰과 뚜렷한 도덕의식을 보여주는 사람들인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저잣거리의 장수보다 못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독서의 양과 올바른 삶이 비례한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물론 저자는 이렇게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실리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독서를 한 사람들이 교수사회에도 많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적어도 교수집단에는 무식한 사람들의 집단보다에서 보다는 더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율적으로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독서와 올바른 삶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니 말이다. 그러나 딱히 비율적으로 그러하다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은 듯하다. 결국 독서와 올바른 삶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독서가 오히려 올바른 삶을 사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는 주장들도 있다. 루소의 <학문예술론>이 그러하고 노자의 <도덕경>이 그러하다. 나로서는 이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기도 어렵다. 이 역시 입증되기 어려운 주장에 그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서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책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삶의 조건과 그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관심과 인식에 의해 훨씬 더 좌우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독서는 어디까지나 올바른 삶에 부차적인 결정요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삶은 삶 자체에 의해 규정된다. 삶에 의한 삶의 이런 규정과정에 독서는 대개 약간의 변주를 가능하게 해줄 뿐이다.우리에게 책의 말들을 "들을 줄 아는 귀와 영혼이 있을 때에만, 적어도 우리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꽃피게 한 사상의 뿌리가 간직되어 있을 때에만" 책은 우리들에게 말한다. 나는 윌 듀란트의 이 생각에 공감한다.
또한 인식과 행동 사이의 간격이라는 문제도 있다. 아무리 풍부하고 현란한 지식과 인식의 세계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행동은 영 딴판인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인식과 행동 사이에는 의지라는 매개체가 있다. 인식이 의지로 이어지는 과정은 결코 자동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 이를 무시한 대표적인 사람이 플라톤이다. 공부만 많이 하면 올바른 삶을 살게 된다는 저자의 생각은 인식과 의지 사이의 이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정에 대한 성찰이 빠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책이란 결국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말을 할 것을 글로 옮겨 적어서 여러 사람들이 시공간의 제약에 제한되지 않고 내 말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글이고, 이 글을 인쇄한 종이묶음의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이 책이다. 물론 말이 글이 되는 과정 역시 복잡하고, 말과 글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같은 내용을 말로 할 수도 있고 글로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말과는 다른 글의 장점이 있어서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독서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과정이다. 내가 궁금한 것, 내게 흥미로운 내용, 혹은 내가 전혀 모르던 것을 다른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 들어보는 것이 독서다. 책이 말과 달리 시공간을 떠나 존재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편리하게 들어볼 수 있는 생각도 책을 통하면 엄청나게 많아진다. 바로 이 점에 독서의 미덕이 있다. 그러나 내가 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쁘거나 실리만 추구하는 것이거나 단순한 오락일 뿐이거나 하다면 책을 통해 내가 나아질 것은 별로 없다. 결국 책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나에 의해 좌우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 책을 돌이켜보면, 저자는 독서에 대한 거의 신비주의적인 열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열광을 느낄 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너무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올바른 삶이라는 주제는 독서라는 틀로는 거의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다.
결국 나에 관한 한, 이 책을 통해 어떤 보편적인 인식을 얻었다기 보다는 한 개인의 독특한 경험을 보는 즐거움을 얻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듯하다. 이를 인정하고 보면, 이 책은 분명 흥미로운 면이 있다. 한 사람이 독서를 통해 어떤 즐거움과 삶의 확장을 얻었는지 보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례가 많은 청소년들에게 전염력을 발휘하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한 예측은 무척 조심스럽지만 말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고미숙의 허생전 읽기는 아주 순진하고 소박하다. 허생은 교훈보다는 의문을 더 남겨주는 인물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의 다른 리뷰에서 적어놓은 바 있으니, 보실 분은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