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62537.html







오늘 <한겨레>는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오역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는 최재봉 기자의 기사를 실었다.

우선은 반길 일이다. 번역에 대한 토론은 많을 수록 좋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 왠지 나는 심정이 불편하기도 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이런 불편한 심정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기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고, 어느 정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대작 <안나 카레니나>의 단 한 개의 짧은 문장이다. 

나의 평소 생각은 대략 100페이지에 하나 정도의 오역이 생기는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눈 밝은 독자가 그런 오류를 발견한다면 지적하여 고칠 수는 있겠지만, 역자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자도 인간이고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실수를 한다. 그런 실수는 거의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작심을 하고 달려들어 찾자고 하면 100페이지에 오역 하나 없는 번역본이란 아마도 단 한 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도의 빈도를 훨씬 넘어서는 잦은 오역이 발견되는 경우에만 역자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 따르면 한 누리꾼이 역자에게 이 문장이 오역이 맞다면서 사과를 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아예 세상의 모든 역자들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라고 역자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오역이 발견되고, 실제로 나는 영역본들에서 더러 오역을 발견하기도 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역자들은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요구가 정당한가? 역자의 번역을 둘러싼 사정을 안다면 과연 이런 식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며칠 전에 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가난과 병으로 죽었다. 그만큼은 아닐 지 몰라도 한국에서 번역자의 위치도 아주 낫다고 볼 수 없다. 번역은 한마디로 돈이 안 된다. 학적 성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그러면 왜 번역을 할까? 그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이라도 필요할 수도 있고, 그래서 시간상 따지고 보면 편의점 알바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 보수를 위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게다가 전문적이거나 높은 수준의 독자를 요구하는 책의 경우 팔리지가 않아 2쇄도 못 찍은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경우 처음에 받은 소액의 인세가 전부다.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 번역을 해서 내놓았는데 독자들이 단 한 문장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면서 공개적으로 사과하기를 요구한다면, 정말 누가 번역을 할 맛이 나겠는가.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대작의 번역에서 문제삼을 것이 그 한 문장 뿐이라면 오히려 칭찬을 받아 마땅한데도 말이다.

두꺼운 번역본에서 오역 한 문장을 찾아내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걸 찾아냈다고 기고만장하여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꼴이 볼성사납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서 유명해져서 <한겨레>에 번역 칼럼을 쓰고 있는 이현우의 태도도 마뜩잖다.

번역 평론을 하려면 진지하게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거나 해야 할 것이다. 딱 한 문장에 대한 비교로 신문칼럼을 쓰다니 대단히 불성실한 것이 아닌가. 이런 칼럼은 너무나 쓰기 쉽다. 한 번역본을 읽다가 이상한 문장이 있으면 원문과 영역본, 다른 번역본과 대조해보면 작업 끝이다. 그걸로 번역본에 대한 평가를 했다고 할 수 있는가? 턱도 없는 일이다.

이현우는 적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지 않은 번역본에 대해서는 신문에 글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의 칼럼과 논란 기사를 보면서 이제 사람들은 민음사판 <안나 카레니나>는 사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현우의 주장도 그런 것인가? 그런 주장을 할 만큼 번역본을 자세히 검토해보았는가?

적어도 <교수신문>에서 번역본을 평가한 필자들은 이런 태도가 아니었다.

역자 연진희씨에게 사과를 요구한 그 누리꾼은 "번역은 의견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역인가 아닌가가 있을 뿐"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근래에 왜 수사학이 새롭게 주목을 받아왔는지, 해체론은 또 무엇이었는지, 왜 작가의 본국에서도 문장의 뜻을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이 충돌하기도 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보지도 못한 모양이다.

나로서는 <안나 카레니나> 번역본의 한 문장이 오역인가 아닌가에 대해 별로 열을 올릴 생각이 없다. 이런 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굳이 칼럼과 기사로 알려져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적어도 제대로 된 번역비평은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관심 있는 분은 여기에 내가 올려놓은 <더 리더>에 대한 나의 리뷰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나는 한 문장의 오류를 발견하고 그런 글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 숱한 오역들에도 불구하고 왜 역자에게 굳이 '사과'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는지 잠깐만이라도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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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님의 "딜레탕티슴에 대하여"

정말 의아한 일이네요. 독일어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아니고, 부르크하르트의 논지도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데 말입니다. 인용하신 부분을 제가 가진 독어판에서 번역해보겠습니다. "딜레탕티즘이라는 말은 예술분야로부터 악명을 얻게 되었다. 물론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예술분야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대가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뿐이고, 삶을 통째로 작품에 쏟아 부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이제 학문분야에서 우리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다시 말해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조망을 할 줄 아는 능력과 이러한 조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영역이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영역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을 늘려가고, 풍부한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문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무식한 자로, 때로는 아주 조야한 인간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딜레탕티즘 자체를 옹호하는 말은 아닙니다. 딜레탕티즘의 불가피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딜레탕트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으므로, 살아가면서 여러 분야에 실로 깊이 파고드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부르크하르트는 딜레탕트를 단죄하는 것도, 딜레탕트와 전문가의 경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요. 인간의 지식과 사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깊이 파고들되,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가 수준은 못되더라도 폭넓은 지식과 식견을 쌓아가야 한다는,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평범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는 이런 딜레탕트 수준의 식견으로는 책을 쓴다거나 전문가행세를 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일정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번역이 저렇게 되었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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