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주의를 따르는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정치적 택일이 아닙니다. 그거한 민족이 국가를 세운 다음에나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
김범우는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마쳤다. 결코 입 밖에내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치닫고 있는 염 상진을 보자 그 말만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네 말은 아주 그럴 듯해 보여. 그러나 그건 브르주아적 환상이야."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쏘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이데오로긴가 이념인가 하는 것에 놀아나 민족이 서로 갈라 져서는 안된다는 뜻인데, 그게 부르주아적 환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우리에게 해방은 곧 인민혁명이야, 해방은 곧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시작은 인민혁명을 통한 새 나라의 건설부터네, 그런데 자넨 시대역행적으로 케케묵은 민족이나 찾고 있지 않느냔 말야.‘
"그렇게 속단하지 마세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 일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어요. 그런 부류들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민중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민족의 발견‘이라고 했어요. 형은 그게 바로 인민혁명세력의 규합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 민족에는일체의 정치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아니, 더 확실하게 말해 그 민족아래 모든 정치이념들은 단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