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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박생강 지음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마트에 갔다가 빼빼로만 판매하는 매대가 따로 꾸며져 있고, 중·고딩 아이들이 포장된 빼빼로를 한 아름씩 들고
가는 것을 보고 빼빼로 데이가 다가온 것을 알았다. 그런 광경을 보니 괜시리 나도 하나 사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고 어느새 계산대 위에는
빼빼로가 놓여 있었다. 엄마 닮아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들은 양손에 빼빼로를 하나씩 그러쥐고 손과 얼굴에 초컬릿을 잔뜩 묻혀가며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 빼빼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 소설은 시작부터 흥미로웠다.
어느 날 심리상담사 민형기에게 한나리가 찾아와 빼빼로포비아(빼빼로 공포증) 남자친구의 문제를 상담한다. 빼빼로는 비닐과
종이로 포장되어 얌전히 편의점과 마트에 진열되어 있을 뿐인데 다 큰 성인 남자가 빼빼로를 무서워하다니. 그가 무서워하는 것이 고작 빼빼로 이기
때문에 문제가 쉽사리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것은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 김만철이 쓴 소설 속 이야기였다. 빼빼로포비아를 치료하는 내용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등장하는 현실의 인물들. 설상가상으로 그들 중 한 명은 실리카에서 온 실리칸이라는 외계인이다. 이후 시작되는 현실의 이야기는
도저히 결말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다. 나는 평소에 SF, 판타지 소설은 거의 안 읽는 편이지만 김만철의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김만철이 자신의 소설 속에 현실 인물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이다.
나는 워낙 이해력이 느려서 읽는 도중 앞 장 들춰보기를 계속 반복해야했다.
·민형기 - (소설 속)심리 상담사 / (현실)스윗스틱에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음모가 숨어 있다고 망상하는
사람
·이진아 - (소설 속)민형기의 아내 / (현실)심리 상담사
·한나리 - (소설 속)빼빼로포비아와 사귀는 대학생 / (현실)직장인, 김만철이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선배
누나
·스윗스틱 사장 - (소설 속)빼빼로포비아 / (현실)실리카에서 온 실리칸 외계인
·김만철 -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
·최향기 - 김만철과 같이 소설 창작 강의를 듣는 김만철을 좋아하는 후배
·검은 푸들 - 주인에게 버림받고 죽어가다가 실리칸을 만남
·주술사들 - (소설 속)다섯 알약
이해를 위해 짧게 요약해보았는데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것만 봐서 등장인물들 간에 어떤 개연성이 있고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을 것이다.(그래도 꼭 읽어보시길. 정말 재미있음)
문장 속에 재치가 가득하고, 읽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촌철살인의 문장들을 보며 아멜리 노통브를 떠올리기도 했는데
(내맘대로) 박생강이 한 수 위가 아닌가 싶다. 전지현, 김수현이 주인공이었던 별그대에 빠져있었던 나는 특히 90쪽 “그럼,
나보고 당신이 별에서 온 김수현 같은 특별한 존재라고 믿으란 말인가?”라는 문장을 보고 박장대소 했다.
그리고 나를 생각에 빠지게끔 한 많은 문장들이 있었다. 239쪽 “진실이 꼭 진지하게 진실해야 진실은
아니잖아요. 선생님이 제 말을 믿든 그러지 않으시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진짜를 말했다고, 다른 사람도 다 진짜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걸 저도 알거든요.” 김만철은 실리칸의 집에 초대되어 겪은 일을 등장인물 모두에게 말하는데 그들은 아예 믿지 않거나 의심하는
방식으로 제각기 받아들이고 싶은 만큼만 받아들인다. 나도 누군가가 나에게 진실을 말했어도 짧고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닌지 뒤돌아보았다.
206쪽 “인간입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어쩌면 푸들 아닙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두 발로 걷는 것에만 만족합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굴욕적인 사랑에도 만족합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배만 부르다면 과거 따위는 잊습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자신의 힘을 두려워 합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혹시 푸들 아닌가요?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정말 인간 맞습니까?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친구, 인간 이후의 인간이 될 생각이 있나요? 예, 아니요로 대답하십시오.” 책을 읽어야
이해가 될 테지만 이 질문은 주술사를 먹은 검은 푸들이 지구 정복을 꿈꾸며 자신처럼 주술사를 먹은 처지인 김만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푸들의
마지막 질문을 읽으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 가장 진화한 영장류인 인간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푸들이 있다니. 소설 속 이야기지만 우리의
한계를 깨지 않고 안주하다가 책속의 푸들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의 존재를 위협받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인간 이후의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우리가 여기에서 더 진화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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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박생강이라는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되었고 이름이 특이하다 여겼는데 책을 읽은 후 검색해보니 이미 등단한 지
10년차인 박진규 소설가의 필명이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은 아직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지만 이렇게 흥미진진한 내용이 계속되는 이야기를 썼다면
전작들도 큰 기대가 되고 꼭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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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독자 서평단 3기◀
이 책은 출판사의 제공으로 읽고 남긴 리뷰임을 밝힙니다.
62 - 소설의 문장에서 여러분이 담아야 할 것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물에 대한 묘사로 그쳐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건, 그러니까, 삶이에요. 소설을 쓴다는 건, 그러니까 소설의 문장이란, 우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순간들을 문장이라는 틀로 잡아 기록하는 것이지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137 - 그래서 말인데, 오빠 난 이렇게 생각해. 어쩌면 만우절이 하루가 아닐지도 몰라. 세상에 워낙 거짓말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니까 일부러 사람들이 만우절을 만든 걸 수도 있잖아. 어쩌면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솔직하게 선언하는 만우절만이 진실의 날일 수도 있는 거지. 오히려 진짜 거짓말의 날은 빼빼로데이 같은 거야. 그날의 빼빼로가 도대체 무슨 사랑의 상징이야? 그건 그냥 싸구려 초코 막대 과자잖아.
145 - 이 시대의 인간은 어쩌면 빼빼로 피플이네. 인간은 태어나기를 딱딱하고 맛없는 존재로 태어났지. 하지만 거기에 자신의 개성이란 달콤한 초콜릿을 묻히지. 타인을 유혹할 수 있는 존재로 특별해지기 위해. 하지만 그 개성의 비율 역시 언제나 적당한 비율, 손에 개똥 같은 초코가 묻어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 적정선의 비율로 필요하네. 그게 넘어가면 괴짜라거나 변태 취급을 받기 쉽지. 그렇게 이 시대의 인간은 모두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는 양 착각하지만 실은 모두 똑같은 봉지 안에 든, 더 나아가, 똑같은 박스 안에 포장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초코 과자 빼빼로와 비슷하다네.
178 - 나와 만철 오빠가 함께 듣는 소설 수업의 시간 강사가 그랬어요. 비극적 결과를 소설로 쓸 경우 반대편에 위치한 긍정적 결과를 반드시 염두에 두라고요. 소설가의 머릿속엔 저울이 있어야 한 대요. 그리고 그 저울은 인간에게 이렇게 속삭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삶은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미리 포기할 만큼 암울한 건 아니다.
239 - 진실이 꼭 진지하게 진실해야 진실은 아니잖아요. 선생님이 제 말을 믿든 그러지 않으시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진짜를 말했다고, 다른 사람도 다 진짜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걸 저도 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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