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텔 프린스 ㅣ 바통 1
안보윤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월
평점 :
이 책은 총 여덟 편의 단편을 하나로 묶은 소설집이다. 제목처럼, 실제로 작가들이 호텔의 어느 방을 번갈아 묵으면서 이 이야기들을 썼다고 한다. 고급스런 방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무언가 골똘히 상상하는, 그러다 영감이 떠오르면 휘리릭 연필을 갈기는 작가들의 모습, 참 낭만적이다.
허나 책을 읽노라면,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변변찮은 Hotel에 묵고 있는 기분이다.
같이 온 사람들과 시시한 수다를 떨거나 혼자 책을 읽거나, 무료하게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런 평범한 모습들, 그러나 개성 있는 삶의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겼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단편은 작가 김혜나의 '민달팽이'였다. 그녀는 적나라한 성애 묘사와 불나방 같은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제리'로 단숨에 문단의 주목을 받은 작가였다. 거침 없는 화법과 빼어난 관찰력이 이 단편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스물 둘의 '나'는 유화를 그리는 남자와 섹스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습관적으로 옷을 벗었다. (중략)
나는 단 한 번도 그와의 섹스에서 만족을 하거나 흥분을 해 본 적이 없다.
그와의 관계에 이끌리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p.159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매일 그의 화실을 찾는 '나'는 그런데도 왜, 그와의 만남을 포기할 수 없는 걸까.
엄마는 '아빠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p.162)' 그녀는 지지대없인 자라지 못하는 나팔꽃처럼 남편에 의존하고, 그를 사랑했다. '나'는 그 때 섹스를 잘하는 남자친구와 연애 중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왜 매일 아침마다 밥도 안 먹고 회사에 나가는 지, '나'는 관심이 없었고 '엄마'는 그저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빠와 다른 여자의 섹스를 목격한 그 날,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그를 만나게 된 것이 그 때 쯤이었을까.
그의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늘 기름진 유화 냄새가 진동했다. 언젠가, 아빠가 엄마에게 그림을 배워보라고 했는데...
'나'는 혼자 남은 엄마를 보면서
어느 누구도 절대로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p.167
나는 절대로 한 남자만 사랑하지 않겠다고,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내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p.168
그의 그림에서 나던 기름 냄새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일그러진 감정들이 내 몸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이젤과 팔레트에서 퍼져 나오는 나무 냄새, 목 언저리까지 바르던 스킨 냄새, 하루에 두 갑씩 태우는 담배 냄새, 삶 냄새.
p. 177
매스껍던 속이 울렁이며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고, '나'는 그만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꺽꺽 소리와 함께 안에 든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물인지 기름인지 알 수 없는 것들. 너무나 많은 냄새가 풍겨오는 것들. 사실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들. p.178
'나'는 고장 나 있었다.
<각 단편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들>
1. 나이가 든다는 건 잃어버림의 연속이라는 뜻이다. p.43 '코 없는 남자 이야기' 中
2.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 집이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해달되는 말은 아니다. 가장 낯설고 불편한 곳이 집인 사람들도 있다. 남자도 전에는 그것을 몰랐다. p.40 '코 없는 남자 이야기' 中
3.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슬프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너무 천천히 차올랐기 때문에 둑을 넘을 듯 수위가 높아진 뒤에도 알아차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p. 148 '아일랜드 페스티벌' 中
4. 명품 가방을 든 사람?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사람? 그런 거 필요 없어. 우리가 노리는 건 외로운 사람이야. 외로운 사람한테선 쿰쿰한 입 냄새가 나. 잘못 말린 생선 냄새, 상한 청국장 냄새 같은 거. p.193 '순환의 법칙' 中
5,나락에 떨어진 사람들끼리는 비슷한 냄새를 풍기거든요. 흠뻑 젖은 낙엽이 썩어가는 냄새, 덜 익은 은행이 터지면서 풍기는 비릿하고 구린 냄새요. p.197 '순환의 법칙'中
<이럴 때, 이 단편>
1. 요즘 엄마가 자꾸 귀찮고, 마냥 혼자있고만 싶다면? '우산도 빌려주나요, 황현선'
2.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아내가 두려운 당신에게 '코 없는 남자 이야기, 김경희'
3. 난 판타지가 좋아 '유리주의, 이은선'
4.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난 당신에게 '아일랜드 페스티벌, 정지향'
5. 이름을 말해선 안되는 푸른 기와집 공주에게 '순환의 법칙, 안보윤'
6. 잠깐의 휴식을 즐기세요 '유리주의, 이은선'
7. 인생은 아이러니 '때아닌 꽃, 전석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