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서 저를 불러 아들이 되게 하셨기에 저는 당신을 따라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책 표지에 쓰인 이 말이 참 예뻐서 더 눈길이 갔던 책 "베이징, 내 유년의 빛". 중국의 시인 베이다오(본명: 자오전카이)가 지은 이 수필집은 파스텔 민트 색 표지 만큼이나 감각적이고 다채로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문화 대혁명과 마오쩌둥, 3년 곤란시기 등의 굵직한 명사들로 대변되는 60년대를 살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 과거란, 그 시간을 지나오면 흐릿한 안개 속에 가려져 버리는 것이기에 기억을 더듬는 것이 쉽지가 않다.
어느 것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다가도 어느 것은 밤길을 헤메듯 캄캄하다. 그러나 그 때의 기억들은 몸 속에 하나 하나씩 박혀 있어서 찬찬히 감각을 되짚다 보면 그 때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드문드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그래서 이 책은 작가의 감각에 비추어 "빛"으로, "냄새"로, "맛"과 그 외 무수한 것들로 반짝인다. 나는 그 반짝임들을 나의 감각에 담기 위해 자주 책에 밑줄을 그어야 했다. 내가 처음 담은 문장은 70년대 초, 베이징에 형광등이 사용되던 시기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귀신 이야기는 만국의 공통 오락거리이다. 촛불을 한가운데 놓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숨을 죽이고 들었던 그 재담이 형광등이 사용되면서 차츰 시시해져버리고 말았다. 작가는 그 시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70년대 초부터 형광등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베이징 전체가 갑자기 밝아졌고, 귀신은 더이상 신비롭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걸핏하면 전기가 끊어졌다. 정전이 되면 집집마다 촛불을 켰다. 이는 사라진 유년 생활에 대한 추억이자 애도였다."
중국 작가의 일기장 같은 이 글을, 그래서 몰래 훔쳐보는 기분으로 읽어가다 보면 베이징의 성 안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60-70년대의 까까머리 중국 소년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곧 그 상상은 국경을 넘어 어느새 서울의 골목길 한복판을 내달리고 있는 한국의 조무래기 소년이 되어 버린다.
노래처럼 들리는 언어를 발음하는 민족의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모습을 봤다는 것이 얼핏 이해 가지 않을 수도 있으나 책 속에 있는 60년 대, 작가의 어린 시절은 분명 우리나라의 지금 중장년층의 어린시절과 참 많이 닮았다.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우리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굉장히 배가 고팠던 시기, 흙먼지 날리는 골목길을 떼거리로 다니며 구슬 치기, 달리기, 헤엄치기 등을 하며 실컷 놀다가 밥 때가 되면 집으로 제각기 흩어지거나 혹은 주머니를 털어 입 안 가득 군것질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
헤엄을 치다가 막 발육이 시작되는 여자아이들과 몸이라도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년의 부끄러운 볼과, 무언가에 푹 빠져 배고픔을 잊기도 했던 순수함,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막연한 상상들...
문화 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이라는 시대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작가와, 한국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짊어져야 했던 우리나라의 그 때 모습...
이 책이 번역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아마 중국 작가의 개인적 이야기를 넘어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이 "특별한 경험"때문이 아닐까.
때로 역사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가야 할 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 있으나 작가가 그랬듯, 그것은 한쪽으로 밀어두기로 한다. 타국의 것이 아니냐, 하는 변명과 함께.
어쨌건 이 책을 읽으면서 담담한 문체 속에 별처럼 반짝이는 문장들로 즐거웠다, 거기다 곳곳에 베인 중국의 흥미로운 풍경들까지!
"베이징, 내 유년의 빛" 리뷰 여기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