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해원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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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지막 결말이 너무 슬퍼서 아이고 ㅠㅠ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책이 너무 재밌어서 제가 직접 가상캐스팅을 해봤는데 알라딘 블로그는 이미지가 복사가 안되어서 대신 제 포스트 링크 남기고 갑니다!! http://naver.me/GAjr1G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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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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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로 유명한 작가 이정명의 4년 만의 신작 '선한 이웃'이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왔다. 출판계에선 대통령 탄핵 등으로 다사다난했던 작년 말 무렵부터 '독재',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 '촛불 혁명 이후'같은 카테고리를 단 책들을 많이 출판했다. 부당한 권력에 고통 받았던 국민들의 성찰과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까닭이었다. 


이 소설도 그런 연장 선상에 놓여 있다. 문학 분야에서 지금의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소설은 <선한 이웃>이 처음인 것 같다. 이정명은 이 세상이 누군가의 연출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극 무대라는 큰 설정 아래, 선하지만 결코 선하지 않은 이중성 혹은 다중성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들을 각 장마다 포진해 놓는다. 아니, 주인공으로 등장 시킨다. 독자는 그 인물들의 행적을 쫓는 동안 끊임 없이 혼돈 속에 빠지고, 결국은 '누가 진정 선한가'에서 출발하여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까지 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독재와 항쟁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 위해 깔아둔 설정에 불과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정명의 소설은 기존의 이런 류 소설과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반면 김기준, 이태주, 김진아, 관리관, 그리고 최민석까지. 각 인물들은 다르면서도 분명히 같은 점이 있다. 무대 위에 세워진 인물들의 실감 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독백이 이 연극이 허름한 무대라도 세워져야만 하는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연극은 서술자 없이 인물의 대사와 행동 만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물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먼저 김기준,


1980년대 한국,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위가 한창인 시기, 운동권 궤멸 임무에 투입된 정보 공작원 김기준은 '최민석'을 잡기 위해 잠복 근무에 나선다. 최민석,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대규모 연합 시위와 집회 등을 이끄는, 운동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기준은 유달리 최민석 검거에 집착했다. 이유를 묻는 관리관에게 기준은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원하는 건 최민석을 잡는 겁니다."
"왜지?"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렇다. 빨갱이를 잡고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일은 정치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민석을 쫓기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최민석을 쫓았다. 그냥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제대로 일하는 방식이었다.(...) 상인들이 시장 바닥에서 목청을 높여 물건을 팔고, 직장인들이 사무실에서 부지런히 펜대를 놀리고, 철공소의 직공이 끊임없이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p145


작가는 이런 기준을 통해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 죄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언뜻 대답하기 쉬워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주어가 분명 '옳은'것이기 때문이다. 옳은 것은 단지 옳다는 이유만으로 선과 악의 개념에 포함될 수 없다. 그것은 맹목적인 돌진과도 같다. 선악은 결과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준은 일차적으로 죄가 없다. 


그럼 진정한 죄는 어디서 물어야 할까? 그에게 최민석 검거를 지시한 관리관? 그 역시 자기 일에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지 않을까. 죄의 근원을 찾을 수록 그것이 사라져버리는 이런 딜레마는 그렇다면 '옳다는 것은 선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기준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최루탄 연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시위대를 보면서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선하다고 할 만했다. 그러나 세상은 선한 것만으로는 부족한 곳이었다. 대책 없는 선함은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었다. 경우에 따라선 기소를 당하거나 감옥살이를 면할 수 없었다. 착하기 때문에 그들은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기준의 잘못이 아니었다. 잘못은 어딘가 망가지거나 삐뚤어진 세상에 있기 때문이었다. 종종 기준은 자신이 잘못된 세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비뚤어졌건 망가졌건 그가 숙주로 삼아 살아가야 할 곳은 그 세상밖에 없었으니까 p18


분명 옳다는 것과 선한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기준은 분명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반인을 거리에 나오게 만든, 자신이 그들을 잡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삐뚤어진 세상에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단지 일에 성실했을 뿐이라는 것을 방패로 그의 잘못을 회피한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기준과 같은 이들을 설명했다.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일원,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끔찍한 살인자의 모습이 아니라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은 그저 나치의 명령에 충실한 군인에 불과했다고 항변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죄를 나치에 부역한 것에서 찾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죄는 그가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 뿐인 인간의 특징인 사유하는 능력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에 있었다. 스스로 결단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혹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하여 결국 만들어진 괴물로 태어나 스스로 괴물이 되길 자처했단 것. 그러므로 기준은 아무리 항변해도 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이태주(최민석)


특별할 것 없는 연극 연출가 이태주. 그는 언뜻 보면 평범한 예술가로 기준과 대척점에 서있는 것 같다.


선과 악에 대한 흔한 오해는 그것이 눈에 보이는 실체로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다. 세상이 선과 악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뉘어 태초부터 영원까지 대결한다는 가정, 최후의 아마겟돈에서 선이 승리하고 악이 소멸되리라는 믿음.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가정과 믿음에 불과하다. 기준은 옳지 않은 행동을 수도 없이 목격해왔고 때로는 직접 나쁜 짓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선악의 개념으로 판단하지는 않았다. 선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악과 반대되는 개념일 뿐이며, 악에 의해 쫓겨난 선 또한 악 없이는 소멸할 수밖에 없을테니까 p227


작가는 태주와 기준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는 것이고, 어느 한 쪽 없이는 한 쪽이 존재할 수 없다고 정의한다. 이렇게 성급하게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 가리지 않으려는 작가의 시도는 태주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운동권의 신화적인 존재, '최민석'은 사실 평범한 연극 연출가였던 태주였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이태주의 삶과 최민석의 삶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최민석'이 관리관이 만든 가공의 인물이었단 점이다. 관리관은 운동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들이 우상시한 최민석의 존재를 이태주로 구현해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태주가 사실은 관리관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더군다나 도덕적인 가면을 쓴 스파이였단 것이 밝혀지면서 '연출가'에서 자의식이 없는 '배우'로 위치가 전도되고, 독자는 또다시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태주 역시 기준처럼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나 태주는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한다는 것이다.       


Shall Rome stand under one man's awe? 그는 awe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경외'로 번역되는 그 단어는 공경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모든 권력이 존경과 공포의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단어이기도 했다. 두려움은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토록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대본 집필 당시, 태주는 그 단어를 로마인들의 칭송을 받는 시저의 정치적 '권위'로 해석했다. (...) 셰익스피어의 원문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옳았다. '로마는 한 사람의 독재 아래 무릎을 꿇을 것인가?' 태주는 어째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빚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검열 당국의 지적에 어쩔 수 없이 '독재'라는 단어를 '권위'로 순화시켰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다섯 번의 거듭된 검열에서 그 단어가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독재라는 단어를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역이 아니라 의도된 자기검열이었고, 선택한 굴종이었다. 그가 자의적으로 삭제한 단어야말로 <줄리어스 시저>의 출발점이었고, 그 연극이 좁고 허름한 무대에라도 올라야 하는 이유였다. p41



위 장면에서 그는 공작 요원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최민석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는 여기서 'awe'를 '독재'로 수정하며 무의식적으로 최민석을 선택한다. 하지만 작가는 태주를 애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와 나비가 되는 것처럼 그리지 않는다. 태주는 계속 갈등할 뿐이다. 기준과 다른 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맹목적이지 않다는 것. 끊임 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졌다는 것.


 칼카스는 트로이에 딸을 남겨두고 그리스로 전향한 트로이인으로 설정되었죠. 칼카스란 존재에 대한 의문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트로이인가, 그리스인인가?(...)칼카스의 정체성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트로이전쟁과 아트레우스가의 운명을 좌우한 예언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고,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라는 그의 예언 또한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그리스로 위장 전향한 트로이의 첩자로 본다면 딸을 죽이라는 예언은 전쟁을 앞둔 아가멤논에게 심리적 타격을 가해 원정을 실패로 이끌 계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향이 진심이었다면 아가멤논의 함대가 출항할 수 있게 한 그의 예언은 트로이를 멸절시킨 끔찍한 배신행위였다.(...)그는 첩자 활동 도중 변절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중 스파이였을까? 그 모든 가정과 의문은 별개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진실의 각기 다른 버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각각의 경우가 모두 참이기도 하고 모두 거짓이기도 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어떤 하나로 결정되는 순간 모든 의문은 사라지며 그 인물은 생기를 잃게 될 것이다. p217


작가는 태주를 <엘렉트라의 변명>에 나오는  '칼카스'와 같은 존재로 그려냈다. 태주가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특정인이 아니라 자신의 다중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태주를 통해 인간이 혼돈 속에 빠지는 것이 의미 있는 일임을 역설한다. 규정되는 순간 생기를 잃게 될 테니까, 어떤 물음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태주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는 기준의 말을 간절히 믿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이 옳다면 거리의 학생들과 넥타이 부대가 폭도들일 것이고 군부 독재를 끝장내려는 시민들도 나쁜 자들일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려면 수십 년이 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그들은 늙거나 죽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이 태어날 테고 그들은 누가 옳고 그른지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설사 그가 옳은 일을 했다 해도 그 행동까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죄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을 테니까.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살인자나 테러리스트 같은 악한이 아니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한 이웃들이다. 인간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p246



태주는 '이태주'란 이름표를 달고 결국 구치소에서 12년을 선고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태주가 어떤 삶을 '선택'했다고 할 수 없다. 앞서 말한 이유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기 직전에서야 진짜 자신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작가는 김기준, 이태주, 그리고 세세히 다루진 않았으나 김진아 세 주인공의 죄를 같은 것으로 본다.  


그가 치르는 죗값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의 죄는 폭탄을 터뜨려 사람을 죽이려 한 죄가 아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살았던 죄, 눈앞의 삶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생각 없이 팔아넘긴 죄였다 p267



기준도, 태주도, 아무것도 몰랐지만 태주의 스파이 노릇을 한 진아도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두 유죄였다. 기준을 부역자로, 태주를 폭탄 테러범으로, 진아를 공연 음란죄로 법정에 세울 순 있어도 그건 진정한 심판이 아니다. 그들을 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시간'뿐.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괴물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영속하며 모든 것을 쓸어갔다. 아무리 강한 쇠도 녹이고 아무리 강한 의지도 무너뜨렸으며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p244

시간은 그녀를 조이고 으깨고 찢어발기는 형틀이었다. 시간의 여러 속성 중에서 그것이 영속한다는 사실이 가장 그녀를 괴롭혔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능력조차 없었다 p277


시간은 공평하고 성실해서 누구나 똑같이 주어지고 적용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태주에게 그 시간은 좀 일찍 찾아왔을 뿐, 기준도 진아도 시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작가는 진아의 생각을 통해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그 벌은 시간을 타고 멈추지 않고 죄인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살아남은 진아는 자신에게 내리는 벌로 무대 위에서 스스로 칼에 찔린다.      

엘렉트라, 네가 죽인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죽였을 뿐이야 p289



이제 기준만이 남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기준은 이제 '최민석'의 삶을 도둑질 해 살아간다. 그는 권력과 돈을 가졌으나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단 점에서 이 소설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김 없이 그 시간은 찾아갈 것이다. 


책을 다 덮은 뒤 우리는 이제 인물들이 했던 독백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달라지는 것은 있겠지만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직접선거제는 항복할 수밖에 없는 권력자들이 던진 모이에 불과하다. 독재에서 벗어난 시민들은 곧 새로운 독재에 예속될 것이다. 자유롭고 윤택하고 유혹적인 자본의 압제가 체포와 고문을 대체하며 가차 없이 작동할 것이다 p259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선이라는 의미로, 제국주의란 단어는 신자유주의와 FTA라는 용어로 위장되어 있었다 p269



위와 같은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진정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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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책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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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작가의 소설 '무한의 책'이 출판사 '현대문학' 에서 나왔다. 주로 외국 도서를 내던 '현대문학'에서 '처음으로' 낸 한국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잠시 출판사의 이유가 궁금했다. 왜 하필 이 책이 처음인 것일까? '처음'이란 건 분명 특별한 일인데 그만큼 자신감이 있단 것일까? 얼마나 재밌길래! 처음이란 건 늘 설레는 일이다. 기대를 한껏 안고 첫 장을 넘겼다.

이 소설은 음 한마디로 정의하기 참 어려운 책이다. 딱 잘라 말하기 쉬운 책이 어딨겠냐만은 특히 이 책은 일단 장르적으로 SF, 스릴러, 미스터리, 현대사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기 때문에 좀처럼 종잡을 수 없다. 일단 첫 부분은 굉장히 신선하다.

스마트폰에 불시에 깔리게 된 '계시 앱'으로 신들의 계시가 나타난다는 것. 앞으로 일주일 후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 그런데 이 종말의 지구를 구할 유일한 구원자가 성인이나 과학자 같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마약재활병원에서 생활했던 볼 품 없는 한국인 노동자 '스티브'라는 것!

특히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오는 신의 모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 티라노 사우르스, 익룡 같은 파충류라는 것은 보통의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확 깨준다. 

거기다 평행우주와 타임루프라니!

이렇게 깜짝 놀랄 만한 소재들이 곳곳에 포진 되어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으니 정신이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집중하게 된다. 긴장하지 않으면 어디로 튈 지 모른다고!

작가들이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들인 건 알았지만 이 작가, 참 대단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좋은 책이 꼭 한 줄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정말 재밌는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같은 거랄까?

일단 한 번 읽어보시라니깝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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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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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먼저 이번 편에 대한 솔직한 감상평을 늘어놓고 싶다. 나폴리 4부작 중 3부에 해당하는 이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한 편만 읽어도 아마 많은 독자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것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1부)",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2부)"는 어쩌면 이번 편에서 독자의 감정을 폭팔 시키려고 깔아 놓은 화약 가루 같다. 

1, 2부에서 릴라가 스테파노한테 그 수모를 당해도! 릴라 집 식구들이 돈,돈,돈 거리며 릴라를 못살게 굴어도! 릴라가 니노와 바람을 피워도! 그 뒤에 수많은 빡침 분노 포인트들이 있어도 다 참았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는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레누의 친구였다면 당장 달려가서 니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 하지만 여기에는 이렇게 후드려챱챱 팰 사람이 너무 많다. 아오, 진짜 너무 재밌는데 빡치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멈출 수 없는 건 작가 엘레나 페란코가 글을 정말 맛깔 나게 쓰기 때문이고! 거기에 담긴 페미니즘이라는 화두가 정말 절묘하게 촌철살인의 문장들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이제 나폴리 4부작의 마지막 4권만이 나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중독성이 장난 아니다. 

이제 차분한 감상평.

3부의 제목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이다. 2부에서 릴라는 스테파노와 헤어진 뒤 젠나로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을 거둬준 엔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거친 햄 공장에 들어가 고된 일을 하게 된다. 부유하고 풍족한 카라치 부인으로 살 때보다 훨씬 악 조건에 처한 그녀지만 가혹한 노동량과 동료들과의 불화 속에서도 릴라는 그녀 본 모습대로 악바리처럼 꿋꿋이 버틴다. 

반면 레누는 미래가 창창한 신인 작가가 되어 부자 남자친구와의 결혼까지 앞두고 있다. 탄탄대로를 걷는 것 같은 그녀는 이제 고향인 나폴리에서 벗어나 피렌체로 떠난다. 그럼 떠나간 자는 레누고, 머무른 자는 릴라인가? 겨우 이런 걸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이 둘의 방향성을 알려면 이 나폴리 4부작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남자'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특히 지식인이거나 부자인 남자들을. 사랑의 나라인 이태리(?)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 소설에선 끊임 없이 남성과 여성의 연애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거의 두 가지이다. 질리올라, 엘리사, 아다 등 대부분의 여성들은 스테파노나 솔라라 집안처럼 부유한 남성들에게 '간택'받기 위해 애쓰고, 릴라와 레누는 지식인인 '니노'에게 빠진다. 

전자의 여성들에게 '간택'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이 정말 그런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고, 남자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외모에만 반해서 그들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뽑힌 여성들은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몰라하고 평생 그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지금과 달리 여권(女權)이 형편 없었던 60-70년대 이탈리아 여성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런 장면은 한국의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는데, 그것은 그 장면이 우리의 과거와 굉장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는 여전히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 반문하게 한다. 

반면 릴라와 레누는 지식이 있거나 교양이 있어 보이는 남성에게 호감을 드러낸다. 아마 이 둘의 심리적 근간에는 그런 것들만이 자신들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레누는 거의 릴라와 비슷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릴라는 자신의 천재성과 뛰어난 재능을 알아봐 줄 동료이자 애인이 필요했고, 그런 남자라면 자신을 구속하지 않고 자신이 맘껏 날개를 펼치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에는 전자, 후자의 남성들 모두 여성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고 만다. 그들은 사랑을 이룬 뒤 여성을 배신 하거나, 비겁한 모습들을 낱낱이 보여준다. 
릴라는 카라치 부인으로서, 체룰로 집안의 일원으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니노에게 헌신했지만 니노는 그의 아름다움과 성(姓)만을 탐닉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결국 릴라는 니노를 떠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니노를 릴라가 '떠난다'는 것이다. 

수동적이고 남성 의존적이었던 여성들이 남성에게 '버려진 뒤' 눈물을 질질 짜거나 인생을 비관하는 것과 달리 릴라는 적극적으로 남성에게서 탈피함으로써 그녀의 자아와 독립성을 동시에 지켜낸다. 비록 그것이 거친 햄 공장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가시밭길일지라도 그녀의 행동이 스스로의 선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가장 떳떳하고 당당한 위상을 차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릴라가 그렇게 자신만의 길을 가는 동안 레누 역시 부유하고 교양 있으며, 진보적이기까지 한 피에트로와 결혼을 하게 된다. 레누는 아마 그가 '진보적'이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을 것이다. 피에트로라면 당시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성들과 달리 그녀를 구속하지 않고 같이 공부하는 동료로서, 남편으로서 도와줄 것만 같았을 것이다. 작가로서 자신의 날개를 펼치던 때였으니 그런 사람이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있던 피에트로 역시 결혼을 하자 누구보다 보수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게 된다. 혼란에 휩싸인 레누를 더욱 충동하는 것은 60-70년대 당시 이탈리아에 불었던 페미니즘 운동이다.


집회에 참석한 레누에게 연설자인 마리아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의 모습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아버지에게 아이를 만들어주어서는 안 돼요. 그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죠. 아이들의 인생은 아이들의 것이죠. 이제는 남성이 아닌 여성의 관점으로 연구할 때가 왔어요. 모든 규범 뒤에는 남근 중심 사상이 깔려 있어요. 거시기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쇠막대기와 경찰과 감옥과 군대와 강제 수용소가 등장하는 거죠. 그런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혼란을 지속시키면 그때는 대학살이 일어나는 거예요.' p392


레누는 당시의 이 같은 사회 분위기에 마음을 뺏긴다. 그리고 점차 남성에게 기댔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 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p504


그러나 레누는 이 같은 성찰에도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을 망설인다. 자신의 첫사랑인 니노가 나타나자마자 다시 남성에게 잘 보여 간택받고 싶은 여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유행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고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좋은 취향을 가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외모를 가꾸는 데 재미를 붙였지만 가끔은 몸단장(그렇다. 나는 그런 표현을 썼다)하는 행위 자체가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남성을 위해 치장해야 할 때면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시간에 변장에 가까운 치장을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여야 한다니. ...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잘 차려진 식탁이나 군침 도는 요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p525

이런 레누의 혼란과 달리 릴라는 독립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다. 특히 여자가 되고 싶다는 알폰소에게 레누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좋아. 그럼 우리 친구가 되자. 하지만 나처럼 진짜 여자가 되겠다는 생각일랑은 버려. 너는 기껏해야 너희 사내들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여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니까. 아무리 나를 따라하고 내 모습과 완벽하게 똑같은 초상화를 그린다 해도 내 망할 자아는 내 것이고 네 망할 자아는 네 것이니 말이야.' 라고 말이야.'...' 내가 신부복을 입고 찍었던 사진을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어. 언젠가 내 몸마저 도식화되어버릴 날이 올 거야. 구멍 뚫린 컴퓨터용 카드가 되어서 나를 다시는 찾지 못할 날이 올 거야." 그게 다였다. 말을 마친 릴라는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릴라는 더 이상 나에게만 속마음이나 중요한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 릴라의 인생은 릴라의 것일 뿐이었다. 릴라는 누구와도 자기 삶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p.493

내 망할 자아는 내 것이고, 네 망할 자아는 네 것이야! 초등 교육이 전부였고, 따로 페미니즘 운동을 접해보지도 않은, 오히려 하루 반나절을 햄 공장에서 착취 당할 뿐인 릴라의 위 같은 대사는 부유한 집안의 여성들이 종이에 곱게 써진 글씨를 읽으며 여성 해방을 외치는 것보다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릴라는 나아가 자신이 컴퓨터의 0과 1처럼 도식화되어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이건 비관적인 미래가 아니라 온전히 '개인'으로서 살겠다는 릴라의 자기 예언처럼 들린다. 

입만 산 지식인들과 달리 릴라는 정말 진보적인, 자유로운 사람인 것이다. 이 입만 산 지식인에 대표 주자가 '니노'이다. 니노란 놈은 2부에서도 그렇게 똑똑하고 교양 있는 척 위선을 떨다가 릴라의 신세를 망치더니 이번엔 레누의 신세까지 망치려 든다.  

 니노: 엘레나에게 시간을 더 마련해줘야 해. 
스테파노: 지금도 하루 온종일 마음껏 시간을 쓰고 있는걸.
니노: 농담이 아니야. 엘레나를 배려하지 않는 것은 인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죄악이야. 
스테파노: 죄악이라니?
니노: 지성을 허비하는 죄악이지. 육아와 가사에 온 힘을 쏟도록 강요함으로써 여성의 지성을 억압하는 사회는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야.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할 뿐이지. p518. 

니노는 레누의 남편인 스테파노와 대화하면서 엘레나와 여성 인권을 격렬히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껍데기에 또 홀딱 넘어가버린 레누는 급기야 니노와 불륜을 저지르고, 스테파노를 떠나 그에게로 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레누의 적극적인 모습에 니노는 깨갱 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비겁함을 보인다.  

레누: 그럼 우리는 여기서 그만두자
니노: 기다려
레누: 지금까지 충분히 기다려 왔어. 더 빨리 결정을 내렸어야 했어,
니노: 어떻게 할 셈이야?
레누: 결혼 생활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갈 길을 가야지.
니노: 정말?
레누: 그래.
니노: 그럼 나랑 몽펠리에에 갈 거야?
레누: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고 했어. 네 길이 아니라. 너랑은 끝이야. p577

니노를 비난하고 자신의 갈 길을 가겠다는 레누의 마지막 대사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레누! 잘했어! 니노의 환상에 넘어가지 말고 제발 이제 릴라처럼 너의 길을 가렴! 갈팡질팡 유약했던 레누가 릴라의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한 층 성숙해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놈의 니노는 이번엔 무슨 속셈인지 비겁하게 물러섰던 전과 달리 정말 가정을 버리고 레누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함께 몽펠리아로 가자고 레누를 충동질한다. 그새 니노가 릴라에게 어떻게 했는지 잊은 미련한 레누는 굳은 결심으로 니노와 함께 비행기에 오르고, 새롭게 펼쳐질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으로 3부가 끝난다. 


가끔은 이런 레누가 답답해보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실 현실에서 릴라처럼 행동하는 여성들보다 갈팡질팡하고 계속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레누같은 여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제 '남성'에게서 떠나간 자는 릴라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레누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 예상과 달리 니노는 이번엔 정말 레누의 날개를 펼치도록 도와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은 올 11월 출간될 4부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꼼짝 없이 기다릴 수밖에!          

       

이외, 밑줄 친 대사들

'나는 선량한 사람들의 유복한 삶이 어떤 건지 알고 있지만 너는 진짜 가난이 어떤 건지 상상조차 못할걸?' p162

'그래. 나를 겁주려는 사람한테는 겁을 주어야 해. 다른 방법은 없어.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는 수밖에. 내 것을 빼앗기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빼앗아야지. 당한 만큼 고스란히 되갚아주어야 해'p200

'너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니? 나를 좀 바라봐줘. 네 생각에 나는 존재하는 걸까?'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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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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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나폴리 4부작 중 1권에 해당한다. 나폴리 4부작은 주인공 릴라와 그녀의 친구이자 전체 작품의 서술자인 레누의 청소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1권은 그 청소년기의 내용이다. 

이 때 형성되는 관계들은 마치 한 번 꿰면 잘 빠지지 않는 단추처럼 중요하다. 평생을 함께하거나 혹은 인생을 망치기 때문이다. 특히 친구 관계가 그렇다. 덜 마른 시멘트가 시간이 흘러 천천히 굳어가듯, 미숙하고 여린 나이에 사귀는 친구는 개인이 성숙해갈수록 튼튼해진다. 그리고 틀에 부어지는 쇳물처럼 한 인간의 자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소설 속의 어린 소녀 레누에게 릴라가 그랬듯이 말이다.

레누에게 릴라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쟁자인 동시에 동경하는 우상이다. 릴라는 또래들보다 훨씬 똑똑해서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이다. 그러면서도 못된 소년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강단이 있고, 언젠가 소설을 써서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도 있다. 레누는 이런 잘난 아이를 친구로 두었지만 결코 시기 질투하는 법이 없다. 소설 속 레누는 오히려 릴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마치 릴라의 여동생이라도 되는냥 한 단계 아래에 있는 것만 같다.

릴라의 주의를 끌기 위해 관심도 없는 책을 읽고, 릴라의 멋진 편지를 받고 자신은 왜 그렇게 글 쓰지 못하는지 좌절하고, 릴라가 남자친구가 생기자 자신도 남자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계속해서 릴라의 맘에 들고 싶어하고 영원한 친구로 남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면은 독자로 하여금 레누가 자신을 릴라보다 아래에 두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특히 릴라가 결혼식 전, 자신의 알몸을 레누에게 보여주는데 일순간 레누는 부끄러운 감정이 들며 곧 신랑이 릴라의 몸을 더럽힐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워한다. 이런 장면에선 레누가 릴라를 친구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나는 나의 청소년기에도 레누와 같은 감정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릴라와 레누의 이런 관계는 여성 친구들, 특히 정말 친한 사이에선 한때나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친구에게도 오직 나만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이성 친구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사랑의 감정, 이 은밀한 것을 작가는 너무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느끼는 소심한 열등감까지. 

그 감정을 잘 알고 있기에 소설에 푹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아 맞아, 나도 이런 감정을 느꼈었지 하면서. 그러나 나의 이런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얕아지고 정상적인 친구 관계로 옮겨간 반면,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점차 역전이 된다. 늘 레누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릴라가 레누보다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두 소녀 모두 가난했지만, 릴라는 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오빠와 부대껴 살면서 돈에 쫓기게 되었다. 소설을 써서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이 컸던 이유가 그런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구보다 똑똑했던 릴라는 끝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업인 구둣방을 이은 오빠와 가장 비싸고 훌륭한 구두를 만들었지만 이것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때 릴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마을의 부자 마르첼로가 구애하지만 릴라는 결코 받아주지 않는다. 돈에 허덕이는 집안을 생각하면 응당 마르첼로의 마음을 받아야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릴라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두'의 가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릴라는 그녀 자체로 살고 싶었다. 작가는 이런 릴라의 고집스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당시 만연했던 가부장적 사회에 저항하고 여성의 독립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런 고집에도 불구하고 릴라는 무너져만 간다. 마을의 또다른 부자 스테파노가 그 구두의 가치를 알아보고 청혼하자 릴라는 대번에 승낙한다. 하지만 이전에 있었던 그 똑똑함과 강단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난 뒤였다. 결혼을 하면 더이상 공부할 수 없을 거라는 좌절과 평생 누군가에 종속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여걸과 같았던 릴라를 약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실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 순간부터 릴라는 약해지고 있었다. 레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릴라가 그렇게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고 열심히 공부한 것은 진학의 목마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더욱 간절하고 애처로운 것이었다. 

어느 날 레누가 자신의 글을 릴라에게 보여주었을 때, 릴라는 그 글에 대해 순수하게 칭찬하고 난 뒤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다시는 네가 쓴 글을 읽고 싶지 않아.
왜?
나를 아프게 하니까. p.400-401

그리고 결혼식 날, 레누가 릴라가 신은 구두를 칭찬하자 릴라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못난 구두네.
그녀가 말했다.
아니야.
그녀가 시무룩하게 웃었다.
아니긴, 이것 좀 봐. 머리에서 태어난 꿈이 발 밑으로 추락했잖아.
그러다 소스라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레누, 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지?
p418

결혼식 이후 릴라는 자신이 원했던 공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이고, 주체적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릴라는 그런 어두운 미래에 자신을 쳐박을 수밖에 없는 슬픔과 아쉬움을 친구인 레누에게 털어놓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 2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해. 그러면 끝이지.
/아니, 절대로 멈추지마. 필요한 돈은 내가 줄게. 넌 항상 공부해야 해.
나는 조그맣게 웃어 보인 후 릴라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는 학교 공부를 마칠 수밖에 없어.
/넌 아니야.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p.416

이 당부는 어쩔 수 없이 좌절해버린 릴라 그녀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가슴에서 독자에게 전해지는 이 슬픔은 일순간 저항으로 바뀐다. 특히 릴라가 청첩장을 가지고 은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 감정은 커졌다. 

선생님, 제가 기억나세요?
이 사람은 누구지? 나는 이 사람을 모른다.
저예요. 체룰로. 선생님께 청첩장을 가지고 왔어요. 이제 곧 결혼하거든요. 선생님께서 제 결혼식에 와주신다면 정말 기쁠거예요.
체룰로라면 잘 알고 있지만 이 아이는 누군지 모르겠구나 p.410-411

이 선생님은 릴라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했다. 그러면서 과거에 레누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어린 시절 체룰로가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름다움은 피어나지 못했단다. 그 아름다움이 모두 얼굴과 가슴, 허벅지와 궁둥이로 가버렸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름다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곳들로 말이야 p.368"

이런 문전박대와 회한이 담긴 은사의 말에 나는 벌컥 일어나 따져 묻고 싶었다. 은사를 향해, 아니 사회를 향해. 릴라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난과 여성을 집에만 붙박아 두는 사회 때문이지 결코 릴라 때문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런 내 울림은 그 소설 속에 들어갔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욱 특히 여성에게 부조리한 사회였으니까. 릴라 혼자 아등바등 댄다고 해서 그것을 부술수는 없는 것이다. 그 말에 상처받은 릴라를 보면서 나는 최은영의 단편 소설 "쇼코의 미소" 속에 나오는 쇼코가 떠올랐다. 

세계 여행을 하고 싶다던 당차고 밝은 일본 소녀 쇼코가 귀국 한 뒤 할아버지 간병에 묶여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것을 '나'가 보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마음 한 쪽이 부숴져 버린 사람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히 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척 상처를 숨기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을 눈물 겹게 긍정하는 걸 보는 건 더욱 아픈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온 정성을 쏟아 넣은, 분신과도 같은 구두를 신랑인 스테파노가 아닌 그토록 미워하던 마르첼로가 신고 있는 것을 볼 때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왜 릴라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스테파노는 자신이 사갔던 구두를 마르첼로에게 준 것일까? 언젠가 릴라가 말했듯 스테파노는 사실 릴라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런 모욕을 준 것일까? 이 충격적인 장면으로 1권이 끝난다. 독자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이 혼란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서둘러 2권을 펼칠 수밖에 없다. 마치 고무줄을 팽팽하게 끝까지 당겼다가 탁! 하고 놓아버린 듯한 느낌이다.

당시 사회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릴라들, 그리고 그들의 암울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만 같다.
이 소설은 언뜻 레누의 성장소설처럼 보이지만 이렇듯 여러 문제들을 녹여내면서 엄청난 무게감을 지니게 되었다. 거기다 세심한 묘사와 정말 마음을 쿡쿡 찌르는 비유들까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다시 앞장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한 전율이란! 

부디 다른 독자 분들도 이 천진난만한 소녀의 얼굴 속에 감춰진 눈물의 의미를 읽을 수 있기를.

  
+) '채식주의자'의 한강이 받은 맨부커상 후보에 이름이 올랐던 작가라고 한다. 전세계에 일명 "페란테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이 책을 다 읽으면 아마 이해가 될 첫 장의 명문장을 적는다. 

난 너와 같은 무리를 한 번도 미워해 본 적이 없노라. 부정을 일삼는 모든 정령 중에서도 너 같은 익살꾼은 내게 조금도 짐스럽지 않구나. 인간의 활동이란 쉽사리 느슨해지고 언제나 휴식하기를 좋아하니 내 기꺼이 그를 자극하여 악마의 역할을 해낼 동반자를 그에게 붙여주겠노라, 괴테 <파우스트>

+) 심지어 1장의 제목은 "흔적 지우기"다. 이건 아마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릴라, 그리고 레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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