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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ㅣ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평점 :
일단 먼저 이번 편에 대한 솔직한 감상평을 늘어놓고 싶다. 나폴리 4부작 중 3부에 해당하는 이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한 편만 읽어도 아마 많은 독자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것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1부)",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2부)"는 어쩌면 이번 편에서 독자의 감정을 폭팔 시키려고 깔아 놓은 화약 가루 같다.
1, 2부에서 릴라가 스테파노한테 그 수모를 당해도! 릴라 집 식구들이 돈,돈,돈 거리며 릴라를 못살게 굴어도! 릴라가 니노와 바람을 피워도! 그 뒤에 수많은 빡침 분노 포인트들이 있어도 다 참았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는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레누의 친구였다면 당장 달려가서 니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 하지만 여기에는 이렇게 후드려챱챱 팰 사람이 너무 많다. 아오, 진짜 너무 재밌는데 빡치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멈출 수 없는 건 작가 엘레나 페란코가 글을 정말 맛깔 나게 쓰기 때문이고! 거기에 담긴 페미니즘이라는 화두가 정말 절묘하게 촌철살인의 문장들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이제 나폴리 4부작의 마지막 4권만이 나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중독성이 장난 아니다.
이제 차분한 감상평.
3부의 제목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이다. 2부에서 릴라는 스테파노와 헤어진 뒤 젠나로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을 거둬준 엔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거친 햄 공장에 들어가 고된 일을 하게 된다. 부유하고 풍족한 카라치 부인으로 살 때보다 훨씬 악 조건에 처한 그녀지만 가혹한 노동량과 동료들과의 불화 속에서도 릴라는 그녀 본 모습대로 악바리처럼 꿋꿋이 버틴다.
반면 레누는 미래가 창창한 신인 작가가 되어 부자 남자친구와의 결혼까지 앞두고 있다. 탄탄대로를 걷는 것 같은 그녀는 이제 고향인 나폴리에서 벗어나 피렌체로 떠난다. 그럼 떠나간 자는 레누고, 머무른 자는 릴라인가? 겨우 이런 걸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이 둘의 방향성을 알려면 이 나폴리 4부작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남자'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특히 지식인이거나 부자인 남자들을. 사랑의 나라인 이태리(?)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 소설에선 끊임 없이 남성과 여성의 연애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거의 두 가지이다. 질리올라, 엘리사, 아다 등 대부분의 여성들은 스테파노나 솔라라 집안처럼 부유한 남성들에게 '간택'받기 위해 애쓰고, 릴라와 레누는 지식인인 '니노'에게 빠진다.
전자의 여성들에게 '간택'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이 정말 그런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고, 남자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외모에만 반해서 그들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뽑힌 여성들은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몰라하고 평생 그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지금과 달리 여권(女權)이 형편 없었던 60-70년대 이탈리아 여성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런 장면은 한국의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는데, 그것은 그 장면이 우리의 과거와 굉장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는 여전히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 반문하게 한다.
반면 릴라와 레누는 지식이 있거나 교양이 있어 보이는 남성에게 호감을 드러낸다. 아마 이 둘의 심리적 근간에는 그런 것들만이 자신들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레누는 거의 릴라와 비슷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릴라는 자신의 천재성과 뛰어난 재능을 알아봐 줄 동료이자 애인이 필요했고, 그런 남자라면 자신을 구속하지 않고 자신이 맘껏 날개를 펼치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에는 전자, 후자의 남성들 모두 여성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고 만다. 그들은 사랑을 이룬 뒤 여성을 배신 하거나, 비겁한 모습들을 낱낱이 보여준다.
릴라는 카라치 부인으로서, 체룰로 집안의 일원으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니노에게 헌신했지만 니노는 그의 아름다움과 성(姓)만을 탐닉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결국 릴라는 니노를 떠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니노를 릴라가 '떠난다'는 것이다.
수동적이고 남성 의존적이었던 여성들이 남성에게 '버려진 뒤' 눈물을 질질 짜거나 인생을 비관하는 것과 달리 릴라는 적극적으로 남성에게서 탈피함으로써 그녀의 자아와 독립성을 동시에 지켜낸다. 비록 그것이 거친 햄 공장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가시밭길일지라도 그녀의 행동이 스스로의 선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가장 떳떳하고 당당한 위상을 차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릴라가 그렇게 자신만의 길을 가는 동안 레누 역시 부유하고 교양 있으며, 진보적이기까지 한 피에트로와 결혼을 하게 된다. 레누는 아마 그가 '진보적'이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을 것이다. 피에트로라면 당시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성들과 달리 그녀를 구속하지 않고 같이 공부하는 동료로서, 남편으로서 도와줄 것만 같았을 것이다. 작가로서 자신의 날개를 펼치던 때였으니 그런 사람이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있던 피에트로 역시 결혼을 하자 누구보다 보수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게 된다. 혼란에 휩싸인 레누를 더욱 충동하는 것은 60-70년대 당시 이탈리아에 불었던 페미니즘 운동이다.
집회에 참석한 레누에게 연설자인 마리아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의 모습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아버지에게 아이를 만들어주어서는 안 돼요. 그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죠. 아이들의 인생은 아이들의 것이죠. 이제는 남성이 아닌 여성의 관점으로 연구할 때가 왔어요. 모든 규범 뒤에는 남근 중심 사상이 깔려 있어요. 거시기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쇠막대기와 경찰과 감옥과 군대와 강제 수용소가 등장하는 거죠. 그런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혼란을 지속시키면 그때는 대학살이 일어나는 거예요.' p392
레누는 당시의 이 같은 사회 분위기에 마음을 뺏긴다. 그리고 점차 남성에게 기댔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 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p504
그러나 레누는 이 같은 성찰에도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을 망설인다. 자신의 첫사랑인 니노가 나타나자마자 다시 남성에게 잘 보여 간택받고 싶은 여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유행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고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좋은 취향을 가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외모를 가꾸는 데 재미를 붙였지만 가끔은 몸단장(그렇다. 나는 그런 표현을 썼다)하는 행위 자체가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남성을 위해 치장해야 할 때면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시간에 변장에 가까운 치장을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여야 한다니. ...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잘 차려진 식탁이나 군침 도는 요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p525
이런 레누의 혼란과 달리 릴라는 독립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다. 특히 여자가 되고 싶다는 알폰소에게 레누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좋아. 그럼 우리 친구가 되자. 하지만 나처럼 진짜 여자가 되겠다는 생각일랑은 버려. 너는 기껏해야 너희 사내들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여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니까. 아무리 나를 따라하고 내 모습과 완벽하게 똑같은 초상화를 그린다 해도 내 망할 자아는 내 것이고 네 망할 자아는 네 것이니 말이야.' 라고 말이야.'...' 내가 신부복을 입고 찍었던 사진을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어. 언젠가 내 몸마저 도식화되어버릴 날이 올 거야. 구멍 뚫린 컴퓨터용 카드가 되어서 나를 다시는 찾지 못할 날이 올 거야." 그게 다였다. 말을 마친 릴라는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릴라는 더 이상 나에게만 속마음이나 중요한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 릴라의 인생은 릴라의 것일 뿐이었다. 릴라는 누구와도 자기 삶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p.493
내 망할 자아는 내 것이고, 네 망할 자아는 네 것이야! 초등 교육이 전부였고, 따로 페미니즘 운동을 접해보지도 않은, 오히려 하루 반나절을 햄 공장에서 착취 당할 뿐인 릴라의 위 같은 대사는 부유한 집안의 여성들이 종이에 곱게 써진 글씨를 읽으며 여성 해방을 외치는 것보다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릴라는 나아가 자신이 컴퓨터의 0과 1처럼 도식화되어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이건 비관적인 미래가 아니라 온전히 '개인'으로서 살겠다는 릴라의 자기 예언처럼 들린다.
입만 산 지식인들과 달리 릴라는 정말 진보적인, 자유로운 사람인 것이다. 이 입만 산 지식인에 대표 주자가 '니노'이다. 니노란 놈은 2부에서도 그렇게 똑똑하고 교양 있는 척 위선을 떨다가 릴라의 신세를 망치더니 이번엔 레누의 신세까지 망치려 든다.
니노: 엘레나에게 시간을 더 마련해줘야 해.
스테파노: 지금도 하루 온종일 마음껏 시간을 쓰고 있는걸.
니노: 농담이 아니야. 엘레나를 배려하지 않는 것은 인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죄악이야.
스테파노: 죄악이라니?
니노: 지성을 허비하는 죄악이지. 육아와 가사에 온 힘을 쏟도록 강요함으로써 여성의 지성을 억압하는 사회는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야.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할 뿐이지. p518.
니노는 레누의 남편인 스테파노와 대화하면서 엘레나와 여성 인권을 격렬히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껍데기에 또 홀딱 넘어가버린 레누는 급기야 니노와 불륜을 저지르고, 스테파노를 떠나 그에게로 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레누의 적극적인 모습에 니노는 깨갱 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비겁함을 보인다.
레누: 그럼 우리는 여기서 그만두자
니노: 기다려
레누: 지금까지 충분히 기다려 왔어. 더 빨리 결정을 내렸어야 했어,
니노: 어떻게 할 셈이야?
레누: 결혼 생활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갈 길을 가야지.
니노: 정말?
레누: 그래.
니노: 그럼 나랑 몽펠리에에 갈 거야?
레누: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고 했어. 네 길이 아니라. 너랑은 끝이야. p577
니노를 비난하고 자신의 갈 길을 가겠다는 레누의 마지막 대사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레누! 잘했어! 니노의 환상에 넘어가지 말고 제발 이제 릴라처럼 너의 길을 가렴! 갈팡질팡 유약했던 레누가 릴라의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한 층 성숙해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놈의 니노는 이번엔 무슨 속셈인지 비겁하게 물러섰던 전과 달리 정말 가정을 버리고 레누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함께 몽펠리아로 가자고 레누를 충동질한다. 그새 니노가 릴라에게 어떻게 했는지 잊은 미련한 레누는 굳은 결심으로 니노와 함께 비행기에 오르고, 새롭게 펼쳐질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으로 3부가 끝난다.
가끔은 이런 레누가 답답해보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실 현실에서 릴라처럼 행동하는 여성들보다 갈팡질팡하고 계속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레누같은 여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제 '남성'에게서 떠나간 자는 릴라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레누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 예상과 달리 니노는 이번엔 정말 레누의 날개를 펼치도록 도와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은 올 11월 출간될 4부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꼼짝 없이 기다릴 수밖에!
이외, 밑줄 친 대사들
'나는 선량한 사람들의 유복한 삶이 어떤 건지 알고 있지만 너는 진짜 가난이 어떤 건지 상상조차 못할걸?' p162
'그래. 나를 겁주려는 사람한테는 겁을 주어야 해. 다른 방법은 없어.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는 수밖에. 내 것을 빼앗기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빼앗아야지. 당한 만큼 고스란히 되갚아주어야 해'p200
'너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니? 나를 좀 바라봐줘. 네 생각에 나는 존재하는 걸까?'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