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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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나폴리 4부작 중 1권에 해당한다. 나폴리 4부작은 주인공 릴라와 그녀의 친구이자 전체 작품의 서술자인 레누의 청소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1권은 그 청소년기의 내용이다. 

이 때 형성되는 관계들은 마치 한 번 꿰면 잘 빠지지 않는 단추처럼 중요하다. 평생을 함께하거나 혹은 인생을 망치기 때문이다. 특히 친구 관계가 그렇다. 덜 마른 시멘트가 시간이 흘러 천천히 굳어가듯, 미숙하고 여린 나이에 사귀는 친구는 개인이 성숙해갈수록 튼튼해진다. 그리고 틀에 부어지는 쇳물처럼 한 인간의 자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소설 속의 어린 소녀 레누에게 릴라가 그랬듯이 말이다.

레누에게 릴라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쟁자인 동시에 동경하는 우상이다. 릴라는 또래들보다 훨씬 똑똑해서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이다. 그러면서도 못된 소년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강단이 있고, 언젠가 소설을 써서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도 있다. 레누는 이런 잘난 아이를 친구로 두었지만 결코 시기 질투하는 법이 없다. 소설 속 레누는 오히려 릴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마치 릴라의 여동생이라도 되는냥 한 단계 아래에 있는 것만 같다.

릴라의 주의를 끌기 위해 관심도 없는 책을 읽고, 릴라의 멋진 편지를 받고 자신은 왜 그렇게 글 쓰지 못하는지 좌절하고, 릴라가 남자친구가 생기자 자신도 남자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계속해서 릴라의 맘에 들고 싶어하고 영원한 친구로 남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면은 독자로 하여금 레누가 자신을 릴라보다 아래에 두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특히 릴라가 결혼식 전, 자신의 알몸을 레누에게 보여주는데 일순간 레누는 부끄러운 감정이 들며 곧 신랑이 릴라의 몸을 더럽힐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워한다. 이런 장면에선 레누가 릴라를 친구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나는 나의 청소년기에도 레누와 같은 감정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릴라와 레누의 이런 관계는 여성 친구들, 특히 정말 친한 사이에선 한때나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친구에게도 오직 나만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이성 친구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사랑의 감정, 이 은밀한 것을 작가는 너무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느끼는 소심한 열등감까지. 

그 감정을 잘 알고 있기에 소설에 푹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아 맞아, 나도 이런 감정을 느꼈었지 하면서. 그러나 나의 이런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얕아지고 정상적인 친구 관계로 옮겨간 반면,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점차 역전이 된다. 늘 레누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릴라가 레누보다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두 소녀 모두 가난했지만, 릴라는 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오빠와 부대껴 살면서 돈에 쫓기게 되었다. 소설을 써서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이 컸던 이유가 그런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구보다 똑똑했던 릴라는 끝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업인 구둣방을 이은 오빠와 가장 비싸고 훌륭한 구두를 만들었지만 이것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때 릴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마을의 부자 마르첼로가 구애하지만 릴라는 결코 받아주지 않는다. 돈에 허덕이는 집안을 생각하면 응당 마르첼로의 마음을 받아야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릴라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두'의 가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릴라는 그녀 자체로 살고 싶었다. 작가는 이런 릴라의 고집스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당시 만연했던 가부장적 사회에 저항하고 여성의 독립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런 고집에도 불구하고 릴라는 무너져만 간다. 마을의 또다른 부자 스테파노가 그 구두의 가치를 알아보고 청혼하자 릴라는 대번에 승낙한다. 하지만 이전에 있었던 그 똑똑함과 강단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난 뒤였다. 결혼을 하면 더이상 공부할 수 없을 거라는 좌절과 평생 누군가에 종속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여걸과 같았던 릴라를 약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실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 순간부터 릴라는 약해지고 있었다. 레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릴라가 그렇게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고 열심히 공부한 것은 진학의 목마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더욱 간절하고 애처로운 것이었다. 

어느 날 레누가 자신의 글을 릴라에게 보여주었을 때, 릴라는 그 글에 대해 순수하게 칭찬하고 난 뒤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다시는 네가 쓴 글을 읽고 싶지 않아.
왜?
나를 아프게 하니까. p.400-401

그리고 결혼식 날, 레누가 릴라가 신은 구두를 칭찬하자 릴라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못난 구두네.
그녀가 말했다.
아니야.
그녀가 시무룩하게 웃었다.
아니긴, 이것 좀 봐. 머리에서 태어난 꿈이 발 밑으로 추락했잖아.
그러다 소스라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레누, 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지?
p418

결혼식 이후 릴라는 자신이 원했던 공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이고, 주체적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릴라는 그런 어두운 미래에 자신을 쳐박을 수밖에 없는 슬픔과 아쉬움을 친구인 레누에게 털어놓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 2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해. 그러면 끝이지.
/아니, 절대로 멈추지마. 필요한 돈은 내가 줄게. 넌 항상 공부해야 해.
나는 조그맣게 웃어 보인 후 릴라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는 학교 공부를 마칠 수밖에 없어.
/넌 아니야.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p.416

이 당부는 어쩔 수 없이 좌절해버린 릴라 그녀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가슴에서 독자에게 전해지는 이 슬픔은 일순간 저항으로 바뀐다. 특히 릴라가 청첩장을 가지고 은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 감정은 커졌다. 

선생님, 제가 기억나세요?
이 사람은 누구지? 나는 이 사람을 모른다.
저예요. 체룰로. 선생님께 청첩장을 가지고 왔어요. 이제 곧 결혼하거든요. 선생님께서 제 결혼식에 와주신다면 정말 기쁠거예요.
체룰로라면 잘 알고 있지만 이 아이는 누군지 모르겠구나 p.410-411

이 선생님은 릴라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했다. 그러면서 과거에 레누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어린 시절 체룰로가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름다움은 피어나지 못했단다. 그 아름다움이 모두 얼굴과 가슴, 허벅지와 궁둥이로 가버렸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름다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곳들로 말이야 p.368"

이런 문전박대와 회한이 담긴 은사의 말에 나는 벌컥 일어나 따져 묻고 싶었다. 은사를 향해, 아니 사회를 향해. 릴라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난과 여성을 집에만 붙박아 두는 사회 때문이지 결코 릴라 때문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런 내 울림은 그 소설 속에 들어갔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욱 특히 여성에게 부조리한 사회였으니까. 릴라 혼자 아등바등 댄다고 해서 그것을 부술수는 없는 것이다. 그 말에 상처받은 릴라를 보면서 나는 최은영의 단편 소설 "쇼코의 미소" 속에 나오는 쇼코가 떠올랐다. 

세계 여행을 하고 싶다던 당차고 밝은 일본 소녀 쇼코가 귀국 한 뒤 할아버지 간병에 묶여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것을 '나'가 보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마음 한 쪽이 부숴져 버린 사람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히 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척 상처를 숨기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을 눈물 겹게 긍정하는 걸 보는 건 더욱 아픈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온 정성을 쏟아 넣은, 분신과도 같은 구두를 신랑인 스테파노가 아닌 그토록 미워하던 마르첼로가 신고 있는 것을 볼 때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왜 릴라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스테파노는 자신이 사갔던 구두를 마르첼로에게 준 것일까? 언젠가 릴라가 말했듯 스테파노는 사실 릴라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런 모욕을 준 것일까? 이 충격적인 장면으로 1권이 끝난다. 독자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이 혼란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서둘러 2권을 펼칠 수밖에 없다. 마치 고무줄을 팽팽하게 끝까지 당겼다가 탁! 하고 놓아버린 듯한 느낌이다.

당시 사회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릴라들, 그리고 그들의 암울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만 같다.
이 소설은 언뜻 레누의 성장소설처럼 보이지만 이렇듯 여러 문제들을 녹여내면서 엄청난 무게감을 지니게 되었다. 거기다 세심한 묘사와 정말 마음을 쿡쿡 찌르는 비유들까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다시 앞장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한 전율이란! 

부디 다른 독자 분들도 이 천진난만한 소녀의 얼굴 속에 감춰진 눈물의 의미를 읽을 수 있기를.

  
+) '채식주의자'의 한강이 받은 맨부커상 후보에 이름이 올랐던 작가라고 한다. 전세계에 일명 "페란테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이 책을 다 읽으면 아마 이해가 될 첫 장의 명문장을 적는다. 

난 너와 같은 무리를 한 번도 미워해 본 적이 없노라. 부정을 일삼는 모든 정령 중에서도 너 같은 익살꾼은 내게 조금도 짐스럽지 않구나. 인간의 활동이란 쉽사리 느슨해지고 언제나 휴식하기를 좋아하니 내 기꺼이 그를 자극하여 악마의 역할을 해낼 동반자를 그에게 붙여주겠노라, 괴테 <파우스트>

+) 심지어 1장의 제목은 "흔적 지우기"다. 이건 아마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릴라, 그리고 레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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