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나폴리 4부작 중 1권에 해당한다. 나폴리 4부작은 주인공 릴라와 그녀의 친구이자 전체 작품의 서술자인 레누의 청소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1권은 그 청소년기의 내용이다.
이 때 형성되는 관계들은 마치 한 번 꿰면 잘 빠지지 않는 단추처럼 중요하다. 평생을 함께하거나 혹은 인생을 망치기 때문이다. 특히 친구 관계가 그렇다. 덜 마른 시멘트가 시간이 흘러 천천히 굳어가듯, 미숙하고 여린 나이에 사귀는 친구는 개인이 성숙해갈수록 튼튼해진다. 그리고 틀에 부어지는 쇳물처럼 한 인간의 자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소설 속의 어린 소녀 레누에게 릴라가 그랬듯이 말이다.
레누에게 릴라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쟁자인 동시에 동경하는 우상이다. 릴라는 또래들보다 훨씬 똑똑해서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이다. 그러면서도 못된 소년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강단이 있고, 언젠가 소설을 써서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도 있다. 레누는 이런 잘난 아이를 친구로 두었지만 결코 시기 질투하는 법이 없다. 소설 속 레누는 오히려 릴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마치 릴라의 여동생이라도 되는냥 한 단계 아래에 있는 것만 같다.
릴라의 주의를 끌기 위해 관심도 없는 책을 읽고, 릴라의 멋진 편지를 받고 자신은 왜 그렇게 글 쓰지 못하는지 좌절하고, 릴라가 남자친구가 생기자 자신도 남자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계속해서 릴라의 맘에 들고 싶어하고 영원한 친구로 남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면은 독자로 하여금 레누가 자신을 릴라보다 아래에 두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특히 릴라가 결혼식 전, 자신의 알몸을 레누에게 보여주는데 일순간 레누는 부끄러운 감정이 들며 곧 신랑이 릴라의 몸을 더럽힐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워한다. 이런 장면에선 레누가 릴라를 친구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나는 나의 청소년기에도 레누와 같은 감정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릴라와 레누의 이런 관계는 여성 친구들, 특히 정말 친한 사이에선 한때나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친구에게도 오직 나만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이성 친구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사랑의 감정, 이 은밀한 것을 작가는 너무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느끼는 소심한 열등감까지.
그 감정을 잘 알고 있기에 소설에 푹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아 맞아, 나도 이런 감정을 느꼈었지 하면서. 그러나 나의 이런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얕아지고 정상적인 친구 관계로 옮겨간 반면,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점차 역전이 된다. 늘 레누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릴라가 레누보다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두 소녀 모두 가난했지만, 릴라는 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오빠와 부대껴 살면서 돈에 쫓기게 되었다. 소설을 써서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이 컸던 이유가 그런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구보다 똑똑했던 릴라는 끝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업인 구둣방을 이은 오빠와 가장 비싸고 훌륭한 구두를 만들었지만 이것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때 릴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마을의 부자 마르첼로가 구애하지만 릴라는 결코 받아주지 않는다. 돈에 허덕이는 집안을 생각하면 응당 마르첼로의 마음을 받아야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릴라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두'의 가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릴라는 그녀 자체로 살고 싶었다. 작가는 이런 릴라의 고집스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당시 만연했던 가부장적 사회에 저항하고 여성의 독립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런 고집에도 불구하고 릴라는 무너져만 간다. 마을의 또다른 부자 스테파노가 그 구두의 가치를 알아보고 청혼하자 릴라는 대번에 승낙한다. 하지만 이전에 있었던 그 똑똑함과 강단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난 뒤였다. 결혼을 하면 더이상 공부할 수 없을 거라는 좌절과 평생 누군가에 종속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여걸과 같았던 릴라를 약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실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 순간부터 릴라는 약해지고 있었다. 레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릴라가 그렇게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고 열심히 공부한 것은 진학의 목마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더욱 간절하고 애처로운 것이었다.
어느 날 레누가 자신의 글을 릴라에게 보여주었을 때, 릴라는 그 글에 대해 순수하게 칭찬하고 난 뒤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