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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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로 유명한 작가 이정명의 4년 만의 신작 '선한 이웃'이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왔다. 출판계에선 대통령 탄핵 등으로 다사다난했던 작년 말 무렵부터 '독재',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 '촛불 혁명 이후'같은 카테고리를 단 책들을 많이 출판했다. 부당한 권력에 고통 받았던 국민들의 성찰과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까닭이었다. 


이 소설도 그런 연장 선상에 놓여 있다. 문학 분야에서 지금의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소설은 <선한 이웃>이 처음인 것 같다. 이정명은 이 세상이 누군가의 연출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극 무대라는 큰 설정 아래, 선하지만 결코 선하지 않은 이중성 혹은 다중성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들을 각 장마다 포진해 놓는다. 아니, 주인공으로 등장 시킨다. 독자는 그 인물들의 행적을 쫓는 동안 끊임 없이 혼돈 속에 빠지고, 결국은 '누가 진정 선한가'에서 출발하여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까지 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독재와 항쟁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 위해 깔아둔 설정에 불과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정명의 소설은 기존의 이런 류 소설과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반면 김기준, 이태주, 김진아, 관리관, 그리고 최민석까지. 각 인물들은 다르면서도 분명히 같은 점이 있다. 무대 위에 세워진 인물들의 실감 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독백이 이 연극이 허름한 무대라도 세워져야만 하는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연극은 서술자 없이 인물의 대사와 행동 만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물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먼저 김기준,


1980년대 한국,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위가 한창인 시기, 운동권 궤멸 임무에 투입된 정보 공작원 김기준은 '최민석'을 잡기 위해 잠복 근무에 나선다. 최민석,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대규모 연합 시위와 집회 등을 이끄는, 운동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기준은 유달리 최민석 검거에 집착했다. 이유를 묻는 관리관에게 기준은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원하는 건 최민석을 잡는 겁니다."
"왜지?"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렇다. 빨갱이를 잡고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일은 정치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민석을 쫓기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최민석을 쫓았다. 그냥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제대로 일하는 방식이었다.(...) 상인들이 시장 바닥에서 목청을 높여 물건을 팔고, 직장인들이 사무실에서 부지런히 펜대를 놀리고, 철공소의 직공이 끊임없이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p145


작가는 이런 기준을 통해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 죄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언뜻 대답하기 쉬워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주어가 분명 '옳은'것이기 때문이다. 옳은 것은 단지 옳다는 이유만으로 선과 악의 개념에 포함될 수 없다. 그것은 맹목적인 돌진과도 같다. 선악은 결과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준은 일차적으로 죄가 없다. 


그럼 진정한 죄는 어디서 물어야 할까? 그에게 최민석 검거를 지시한 관리관? 그 역시 자기 일에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지 않을까. 죄의 근원을 찾을 수록 그것이 사라져버리는 이런 딜레마는 그렇다면 '옳다는 것은 선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기준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최루탄 연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시위대를 보면서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선하다고 할 만했다. 그러나 세상은 선한 것만으로는 부족한 곳이었다. 대책 없는 선함은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었다. 경우에 따라선 기소를 당하거나 감옥살이를 면할 수 없었다. 착하기 때문에 그들은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기준의 잘못이 아니었다. 잘못은 어딘가 망가지거나 삐뚤어진 세상에 있기 때문이었다. 종종 기준은 자신이 잘못된 세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비뚤어졌건 망가졌건 그가 숙주로 삼아 살아가야 할 곳은 그 세상밖에 없었으니까 p18


분명 옳다는 것과 선한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기준은 분명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반인을 거리에 나오게 만든, 자신이 그들을 잡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삐뚤어진 세상에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단지 일에 성실했을 뿐이라는 것을 방패로 그의 잘못을 회피한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기준과 같은 이들을 설명했다.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일원,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끔찍한 살인자의 모습이 아니라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은 그저 나치의 명령에 충실한 군인에 불과했다고 항변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죄를 나치에 부역한 것에서 찾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죄는 그가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 뿐인 인간의 특징인 사유하는 능력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에 있었다. 스스로 결단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혹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하여 결국 만들어진 괴물로 태어나 스스로 괴물이 되길 자처했단 것. 그러므로 기준은 아무리 항변해도 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이태주(최민석)


특별할 것 없는 연극 연출가 이태주. 그는 언뜻 보면 평범한 예술가로 기준과 대척점에 서있는 것 같다.


선과 악에 대한 흔한 오해는 그것이 눈에 보이는 실체로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다. 세상이 선과 악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뉘어 태초부터 영원까지 대결한다는 가정, 최후의 아마겟돈에서 선이 승리하고 악이 소멸되리라는 믿음.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가정과 믿음에 불과하다. 기준은 옳지 않은 행동을 수도 없이 목격해왔고 때로는 직접 나쁜 짓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선악의 개념으로 판단하지는 않았다. 선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악과 반대되는 개념일 뿐이며, 악에 의해 쫓겨난 선 또한 악 없이는 소멸할 수밖에 없을테니까 p227


작가는 태주와 기준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는 것이고, 어느 한 쪽 없이는 한 쪽이 존재할 수 없다고 정의한다. 이렇게 성급하게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 가리지 않으려는 작가의 시도는 태주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운동권의 신화적인 존재, '최민석'은 사실 평범한 연극 연출가였던 태주였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이태주의 삶과 최민석의 삶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최민석'이 관리관이 만든 가공의 인물이었단 점이다. 관리관은 운동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들이 우상시한 최민석의 존재를 이태주로 구현해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태주가 사실은 관리관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더군다나 도덕적인 가면을 쓴 스파이였단 것이 밝혀지면서 '연출가'에서 자의식이 없는 '배우'로 위치가 전도되고, 독자는 또다시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태주 역시 기준처럼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나 태주는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한다는 것이다.       


Shall Rome stand under one man's awe? 그는 awe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경외'로 번역되는 그 단어는 공경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모든 권력이 존경과 공포의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단어이기도 했다. 두려움은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토록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대본 집필 당시, 태주는 그 단어를 로마인들의 칭송을 받는 시저의 정치적 '권위'로 해석했다. (...) 셰익스피어의 원문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옳았다. '로마는 한 사람의 독재 아래 무릎을 꿇을 것인가?' 태주는 어째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빚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검열 당국의 지적에 어쩔 수 없이 '독재'라는 단어를 '권위'로 순화시켰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다섯 번의 거듭된 검열에서 그 단어가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독재라는 단어를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역이 아니라 의도된 자기검열이었고, 선택한 굴종이었다. 그가 자의적으로 삭제한 단어야말로 <줄리어스 시저>의 출발점이었고, 그 연극이 좁고 허름한 무대에라도 올라야 하는 이유였다. p41



위 장면에서 그는 공작 요원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최민석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는 여기서 'awe'를 '독재'로 수정하며 무의식적으로 최민석을 선택한다. 하지만 작가는 태주를 애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와 나비가 되는 것처럼 그리지 않는다. 태주는 계속 갈등할 뿐이다. 기준과 다른 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맹목적이지 않다는 것. 끊임 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졌다는 것.


 칼카스는 트로이에 딸을 남겨두고 그리스로 전향한 트로이인으로 설정되었죠. 칼카스란 존재에 대한 의문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트로이인가, 그리스인인가?(...)칼카스의 정체성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트로이전쟁과 아트레우스가의 운명을 좌우한 예언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고,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라는 그의 예언 또한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그리스로 위장 전향한 트로이의 첩자로 본다면 딸을 죽이라는 예언은 전쟁을 앞둔 아가멤논에게 심리적 타격을 가해 원정을 실패로 이끌 계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향이 진심이었다면 아가멤논의 함대가 출항할 수 있게 한 그의 예언은 트로이를 멸절시킨 끔찍한 배신행위였다.(...)그는 첩자 활동 도중 변절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중 스파이였을까? 그 모든 가정과 의문은 별개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진실의 각기 다른 버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각각의 경우가 모두 참이기도 하고 모두 거짓이기도 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어떤 하나로 결정되는 순간 모든 의문은 사라지며 그 인물은 생기를 잃게 될 것이다. p217


작가는 태주를 <엘렉트라의 변명>에 나오는  '칼카스'와 같은 존재로 그려냈다. 태주가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특정인이 아니라 자신의 다중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태주를 통해 인간이 혼돈 속에 빠지는 것이 의미 있는 일임을 역설한다. 규정되는 순간 생기를 잃게 될 테니까, 어떤 물음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태주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는 기준의 말을 간절히 믿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이 옳다면 거리의 학생들과 넥타이 부대가 폭도들일 것이고 군부 독재를 끝장내려는 시민들도 나쁜 자들일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려면 수십 년이 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그들은 늙거나 죽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이 태어날 테고 그들은 누가 옳고 그른지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설사 그가 옳은 일을 했다 해도 그 행동까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죄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을 테니까.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살인자나 테러리스트 같은 악한이 아니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한 이웃들이다. 인간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p246



태주는 '이태주'란 이름표를 달고 결국 구치소에서 12년을 선고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태주가 어떤 삶을 '선택'했다고 할 수 없다. 앞서 말한 이유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기 직전에서야 진짜 자신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작가는 김기준, 이태주, 그리고 세세히 다루진 않았으나 김진아 세 주인공의 죄를 같은 것으로 본다.  


그가 치르는 죗값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의 죄는 폭탄을 터뜨려 사람을 죽이려 한 죄가 아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살았던 죄, 눈앞의 삶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생각 없이 팔아넘긴 죄였다 p267



기준도, 태주도, 아무것도 몰랐지만 태주의 스파이 노릇을 한 진아도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두 유죄였다. 기준을 부역자로, 태주를 폭탄 테러범으로, 진아를 공연 음란죄로 법정에 세울 순 있어도 그건 진정한 심판이 아니다. 그들을 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시간'뿐.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괴물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영속하며 모든 것을 쓸어갔다. 아무리 강한 쇠도 녹이고 아무리 강한 의지도 무너뜨렸으며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p244

시간은 그녀를 조이고 으깨고 찢어발기는 형틀이었다. 시간의 여러 속성 중에서 그것이 영속한다는 사실이 가장 그녀를 괴롭혔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능력조차 없었다 p277


시간은 공평하고 성실해서 누구나 똑같이 주어지고 적용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태주에게 그 시간은 좀 일찍 찾아왔을 뿐, 기준도 진아도 시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작가는 진아의 생각을 통해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그 벌은 시간을 타고 멈추지 않고 죄인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살아남은 진아는 자신에게 내리는 벌로 무대 위에서 스스로 칼에 찔린다.      

엘렉트라, 네가 죽인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죽였을 뿐이야 p289



이제 기준만이 남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기준은 이제 '최민석'의 삶을 도둑질 해 살아간다. 그는 권력과 돈을 가졌으나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단 점에서 이 소설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김 없이 그 시간은 찾아갈 것이다. 


책을 다 덮은 뒤 우리는 이제 인물들이 했던 독백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달라지는 것은 있겠지만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직접선거제는 항복할 수밖에 없는 권력자들이 던진 모이에 불과하다. 독재에서 벗어난 시민들은 곧 새로운 독재에 예속될 것이다. 자유롭고 윤택하고 유혹적인 자본의 압제가 체포와 고문을 대체하며 가차 없이 작동할 것이다 p259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선이라는 의미로, 제국주의란 단어는 신자유주의와 FTA라는 용어로 위장되어 있었다 p269



위와 같은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진정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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