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바랄 때, 그 대상은 그 자체로 온전한 한 가지가 된다.
관계에서 진정 선을 바랐다면, 대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선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비록 실망하고 좌절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다가왔던 온갖 유혹과 또 다른 사랑의 기회들을 스스로 과감히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상처에 노출했다. 동시에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랑을 유일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만들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이런 삶은 일종의 ‘심미적 절망‘ 상태로 이어진다. 키르케고르는 더 많은 흥미와 쾌락을 경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심미적 삶의 형식은 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때 삶이란 그저 즐거운경험만 찾아다니는 긴 여정으로 전락하고, 단 한 가지가아니라 모든 것을 시도하기에 특별한 틀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아무런 틀이 없는 삶은 결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아니다. 우리가 의미 있게 여기는 가치들인 사랑, 우정, 성취감 등에는 모두 일정한 틀이있고, 우리는 그 틀 속에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런 틀도 갖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앞의 욕망만 좇게 된다면, 결국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해서 생기는 실망보다 욕망의 결핍이더 나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옳은 것을 이루려 욕망하는 일이 더더욱 중요해진다.
이득이 되든 안 되든 관계없이, 선을 추구하는일에는 그 자체로 해방적인 측면도 있다. 욕망을 최대한실현하겠다는 야망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 욕망의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틀 없는 삶 속에서 욕망에 휘둘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사는 대신,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단 한 가지에 마음을 쓸줄 알아야 한다.
백합과 새는 말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침묵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 기술을 배워야만 한다. 왜 그래야 할까? 침묵을 배울 때비로소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리쾨르에 따르면 자기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삶을 하나의 전체로서 성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삶을 하나의 서사로 보는 것이다.
일기나 다이어리를 쓰거나 사진 앨범을 채우는 것도 삶의 퍼즐 조각을 맞추며 이야기를 구성하는 행위다. 현대 심리학은 이를 ‘서사적 정체성‘ 이라고부르는데, 이는 그보다 더 오래된 개념인 ‘품성‘의 현대적 이름이다.
어쩌면 우리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우리가 지니고 있던 오래된 덕을집단적인 차원에서 재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바로 절제의 기술 말이다.
과거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효율성과 신뢰성을 중시하며 상품 생산을 중심으로 굴러갔다면, 현대의 소비자본주의는 인간의 욕구와 욕망 자체를 생산해낸다.
철학자 제롬 시걸은 단순하게 살기 운동이 지나치게개인적인 자기계발 이념으로 퇴보하고 말았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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