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글쓰기 - 혐오와 소외의 시대에 자신의 언어를 찾는 일에 관하여
이고은 지음 / 생각의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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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글쓰기가 '억압받는 여성의 삶 속에서 비교적 물리적으로 자유로이 행할 수 있는 노동'이라고 했다. 난 '억압받는 여성'을 '생활 반경이 좁고 활동에 제약이 많은 여성' 정도로 폭 넓게 해석하고 싶다. 내 주변에도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기 시작한 엄마들이 무척 많다. '아이 낳고 글 쓰는게 코스였어?'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여자들은 왜 글을 쓸까?"

 

 


​글이 어떤지, 내용이 어떤지 보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건 어떻게든 사회와 이어진 줄이 끊어지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도 분명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란 점이다. 현실은 여전히 고달프고, 글을 쓴다고 답이 느낌표처럼 번쩍 튀어나오는 건 아니지만 일그러진 마음을 개간하는데 글쓰기만큼 좋은 건 없다.


글을 써 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망설이는 그녀들에게 "무엇을 써야겠다." 작정하고 쓰기보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나가다보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지지하는지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으니 무엇이든 써 보라 이야기해 주고 싶다.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었고, 무엇이 문제인지 확신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답에 근접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모른 채 막연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의 존재가 훨씬 분명해지는 듯했다.

첫째 아이를 낳고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내가 과연 한 생명을 책임질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이었다. 막 싹을 틔워 거대한 울음소리로 생명력을 자랑하는 존재 앞에 내 존재 가치는 보잘것없이 느껴졌고 육아 지식이 전무한 나는 무지 앞에 한없이 작아졌다. 내가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발라준 게 아이에게 해가 되진 않을까 내내 노심초사했고 모든게 스트레스였다. 둘째를 낳고 그 땐 양반이었음을 뼈에 새겼다.

내 신경쇠약과는 반비례하게 두 아이는 무럭무럭 밝게 잘 자라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아이 일이 버겁다. 예민해질 때마다, 고비를 넘길 때마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때마다 글을 쓰는 버릇이 생겼다. 사족이든, 병원 검사 결과든, 경찰의 조언이든 글을 쓰며 견뎠고 견뎌가고 있고 견뎌낼 것이다.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외적 원인에 휘말리고 동요할 때, 글을 쓰고 있으면 물살이 잔잔해졌고 사고가 말랑해졌다. ... 어렴풋이 알아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

 

 

 

내 글의 대부분은 "비공개"이다. 사적인 글인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이유는 객관적인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의 글쓰기》에서 '자기 이야기를 쓰려면 자신을 잘 알고 객관화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넘어 거시적이고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함의를 지니고 있어야 "공개"글이 될 수 있다.

저자는 글을 쓸 때 가장 먼저 제목(가제)을 정한다. 그리고 핵심 단어 몇개를 추리고, 도식화해서 줄기를 뻗어나가며 세밀하게 이야기 구조를 짜 나간다. 뼈대가 완성되었으면 이제 한 문장, 문장과 문장을 읽어가며 리듬감있게 잘 읽히는지 확인해가며 다듬는다. 단문이 가진 이점과 단점, 이음동의어의 활용 등 세세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설명한다. 난 제목을 제일 마지막에 다는데 이게 가장 어렵다. '제목없음'이 편한거보면 "공개글"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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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비평문집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어문학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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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기로 땅을 갈거나, '딱딱한 땅'을 가는 농부가 하나의 예이다. 길에 난 포도 넝쿨을 자르거나, 혹은 야생을 울타리를 낮게 치는 정원사는, "정원을 다듬는" 야만적인 요소를 정복하는 또 다른 예이다."


농부가 작가라면 비평가는 정원사에 가깝다.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둘 때까지 온전히 자기 손으로 일구는 농부의 모습은 작가가 작품을 탄생시키는 과정과 닮았다. 비평가는 자신의 재주를 곁들여 작품을 더 돋보이게 다듬어낸다. 이 때, 작품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결과물은 아주 다를 수 있다. 농부이자 정원사였던 그의 글은 어떨까.

 


"만일 예술가가 대중의 호의를 꾀한다면, 그는 속물 숭배의 궁극적 자기기만을 피할 수 없으며, 만일 그거 대중의 운동에 합세한다면, 그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그런고로, <아일랜드 문예 극장>운 장난꾸러기들에게 항복함으로쏘 전진의 행렬로부토 스스로 밧줄을 끊은 채 표류해 왔다. 그가 주변의 미천한 영향들 - 멍청한 열성과 예리한 빗댐, 허영과 저급한 야심의 모든 아첨하는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때까지, 어떤 사람도 전혀 예술가가 아니다."

그를 보며 마르크스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이 옳다고만은 할 순 없겠다 생각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비평문집』 속 그는 존재보다 의식이 우선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제임스 조이스의 비평문집』은 그의 글에 대한 의지, 사랑, 신념이 무엇인지 담겨 있다.

 


황현산 선생님의 《잘 표현된 불행》을 함께 읽고 있다. 비슷할 줄 알았는데 아주 다르다. 황현산 선생님의 《잘 표현된 불행》은 시 위주라 공부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다소 문장이 딱딱하고 단어가 어려워 한줄 한줄 집중해서 여러번 읽어야 이해가 된다. 반면 이 책은 문장이 좀 더 쉽고 매끄러워 덜 어렵다. 문학을 파헤치는 그의 손 끝에 문학을 존중하는 마음이 묻어 있어 읽는 이의 마음가짐을 다잡게 한다.

"셰익스피어나 베를레느의 노래는, 그것이 너무나도 자유롭고 생생히 살아있는 듯하며, 뜰에 내리는 빗줄기나 저녁의 불빛만큼이나 어떤 의식적 목적과 거리가 멀거니와 어떠한 정서의 음률있는 표현으로 발견되며, 그 정서는 이러한 방식 외에는 적어도 그렇게 적절한 전달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술을 이루는 기질에 접근하는 것은 경이로운 행위요, 많은 관습은 우선 배제되어야만 하기에, 왜냐하면, 확실히 가장 내적인 영역은 불경함에 밀려든 사람에게 결코, 불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평하면 가장먼저 '딱딱하고 날카로운 글'이 떠오르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글은 달랐다. 아쉬운 점을 지적하긴 하지만 날 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너그럽지도 않다. 균형잡힌 글을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퇴고를 거쳐 이 글을 내놓았을까.『제임스 조이스의 비평문집』은 개인의 삶이 자서전, 회고록처럼 담겨있어 서평 그리고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아직 그의 작품을 읽어볼까 엄두도 내보지 못한 나로써, 언젠간 읽을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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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행방 새소설 3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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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삶이 다른 것처럼 죽음 또한 모두 다르다. 심장, 뇌, 폐가 기능을 상실해 육체가 생명을 잃는 물리적인 문제는 잠시 잊자.

 

 

 

 

"주혁은 영화에서 본 화려하고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폭발 3초 전 해체된 시한폭탄이라든가 낭떠러지 직전에 멈춰 선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 다리 위 불타고 있는 기차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거뜬히 헤엄쳐 나오는 사람처럼 허황된 것들. 기적같은 순간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믿게 만드는 정교하고 오만한 거짓들.

 

기적은 없다.

남자의 아내는 사고로 죽을 것이다."

 

 

나는 내가 운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주혁에게 깊이 공감했다. 허황되게 운좋은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분노의 질주>같은 쓰레기 영화는 예고편만봐도 분노 게이지가 치솟는다.

 

 

《밤의 행방》 속 주인공 주혁는 반의 도움으로 죽음을 예견할 수 있다. 하지만 막아설 수도 밀어낼 수도 없다.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알려주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마당에 감사할게 뭐가 있겠나. 불똥이나 안 튀면 다행이겠는데 주혁은 그도 개의치 않는다. 소설은 작은 점으로 태어나 선이 되고 면이 되고 이윽고 도형이 되었지만 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붕괴된 이들을 조명하고 있다.

 

 

"다툼은 서로에게 매일 새로운 형태의 모멸감을 더해주었다. 다툼의 끝에는 화해나 이해처럼 다정한 단어가 아니라 명징한 몰이해와 구차한 변명만 남았다."

 

"누나가 성장함에 따라 옷장과 방과 학교생활을 차례로 포기해나가는 식이었다. 누나가 성인이 되자 부모는 그녀의 이력과 인생 전체를 포기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가정의 붕괴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사회로부터 찍힌 낙인이 한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 누군가의 말 몇 마디가 타인의 삶에 어떻게 비수가 되는지,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라는 오명이 얼마나 끔직한 고통을 주는지 느낄 수 있다. 간결한 문체가 아니었다면 읽기 힘들었을 이야기들이었다.

 

 

공통점은 인재(人災)다. 빌미를 제공했든 아니든, 직접적이든 선의였든,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든 단초를 제공했고 망자의 죽음에 얽혀있다. 가깝게 지내던 누군가를 잃는다는건 그래서 상처가 되고 아픈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모르는 내가 준 상처가 내 몫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 어디서 온 건지 분명히 알고 난 다음에 눈물을 흘려 보내야 한다. 내게 되돌아 온 상처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파만 하면 있다. 인재로 생명을 잃는 건 정말이지 이제 그만하고 싶다.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만상의 모든 생명이 쇳대를 가지고 척도를 초월한 삼엄한 궤율로 진행하는 위대한 시간이 정지되었습니다

엄한 궤율로 진행하는 위대한 시간이 정지되었습니다

아아 님이여 죽음을 방향이라고 하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 한용운 《님의 침묵》 , <가지 마셔요> 부분 중에서

 

 

 

 

+

반 :

"귀신한테도 당분이 필요한 모양이지. 주혁은 창장에서 믹스커피 봉지를 꺼내 뜯었다. 원하는 대로 단 걸 먹이면 주절거리는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커피 알갱이를 대충 골라내고, 흰 가루에서 프림 알갱이를 골라내려다 귀찮아져 그대로 화병에 부었다. 어쨌거나 설탕이니까. 가루를 붓자마자 나뭇가지가 꽥꽥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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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0
정지돈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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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행위는 가상의 인물을 상대로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을 시뮬레이션, 훈련해보는 과정과도 같다. 대체로 이해가 가능한데 드물게 소설을 읽고 "이 사람은 뭘까?"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난 한없이 작아진다. 좋게 말하면 겸손해진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 그래,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건 조물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넌 그냥 받아들여. 이런 사람도 있어." 이 소설이 그렇다. 이 경비원은 뭐지?

 

 

"모르는 걸 견디는 것, 그게 바로 시입니다. 이성복이 말했다. 모름을 모름으로 받아들이는 것! 앎의 국면으로 사태를 전환하지 않는 것!

다시 생각해도 독서 모임을 그만둔 건 잘한 일이다."

'경비원'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남색 점퍼, 한 손엔 후레시, 푸근한 인상, 희끗하고 단정한 머리카락,연륜이 느껴지는 주름 등 ... 《야간 경비원의 일기》 속 경비원은 다르다. 나이가 젊고, 몸이 날렵하고, 하는 일도 경호원에 가깝다.

일기도 나의 생각과 다르다. (내가 읽기엔) 굳이 쓸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야기도 있다. 쓸데없이 자세한 날도 있고, 뜬금없이 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날도 있다. 내 일기도 그런가? 내 포스팅도 그렇겠지? 남이 보기엔 쓸데없고, 뜬근없고, 가끔 공감가고?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게 기적같은 일이다. 그런데 왜 나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속이 상할까. 내가 덜 된 인간이라서 그런가. 우리는 무관심에 익숙해져야 할까. 만일 그렇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무관심에 익숙해지기. 외톨이가 될 준비를 하기."

소설 속 사람이라 다행이다. 나 때문에 진짜 상처받진 않을테니까. 나도 그래야할텐데.. 알면서도 쉽지 않다. 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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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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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복을 얻으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뤄야 한다.

침울한 별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던 9년 전쟁 후, 사람들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평화를 갈망했다. 사회적 안정과 개인의 조용한 삶을 위해선 뭐든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핵폭탄보다 무섭다는 탄저열 폭탄이 사방에서 터지고 끔찍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우리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멋진 신세계》 속 미래는 11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10명의 통치자가 10개의 구역을 나눠 관리하지만 사실상 하나인 셈이고 나머지 고압철조망 건너에는 야만인이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밖은 방치되어 자유로운 덕분에 누릴 수 있는 것도 적다. 철조망 안에 있는 세상은 철저히 통제되어 자유롭진 않지만 모두가 행복하다. 통제와 행복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관리된 배아를 원하는 대로 수정, 복제하는데 이 모두 철처한 계획 하에 인공부화가 이루어진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앱실론. 다섯 등급에 맞춰 생산된 태아들은 산소량마저도 차등 배급되고, 유리병 안에서 자랄 때부터 (병을 모체로 치면 태교로) 맞춤식 교육을 받는다. 보모에게 양육되는 동안에도 꽃과 책, 시골을 싫어하도록, (열대지방 공장으로 보낼 인간들은) 추위를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개인이 감정을 느끼면 집단 생활이 비틀거려요."

- 레니나

"사회의 한 부분이 되기 싫어."

- 버나드

레니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믿는 것이 모두 세뇌된 것이란 사실을 모른채, 자신이 아는 정답 외의 것은 모두 배척하고 외면한다. 반면에 버나드는 다른 것을 갈구한다. 레니나를 꼬셔(?)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데이트를 다녀온 뒤로 더 달라진다.

"그럼 당신은 저기서 채찍으로 맞고 싶었다는 얘긴가요?"

- 레니나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 내가 고통을 견디어 낸다는 걸 보여주려고요." - 버나드

인간들은 자기들 세계로 온 야만인에게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살도록 강요한다. 이해와 존중은 찾아볼 수 없고 자신들의 삶만이 정답이라고 고집한다. 도를 넘은 오만이... 낯설지 않다. 난 얼마나 오만을 떨며 살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나의 모습은 생기넘치는 야만인보다 현재에 안주하려는 레니나와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에 더 가까웠다. (!!)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 야만인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 무스타파 몬드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 야만인

야만인과 인간 중 무엇을 택하는게 옳은지 머릿 속으론 이미 알지만 무엇 때문인지 선택이 쉽지 않다. 야만인처럼 당당하게 불행을 원할 수 있을까? 마약같은 생활을 맛 본 상태에서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난 불행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인간이 되기엔 아직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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