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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초판본 리커버 고급 벨벳 양장본) ㅣ 코너스톤 초판본 리커버
알베르 카뮈 지음, 이주영 옮김, 변광배 감수 / 코너스톤 / 2022년 4월
평점 :
표지 속 금으로 그려진 이 형체는 무엇일까. 꿈틀거리는 바이러스일까, 이글거리는 태양일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다가오는 건지, 해치기 위해 다가오는건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건 이것이 무엇이든 우린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도시를 쉽게 알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사랑하며 죽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p.10
프랑스 오랑이라는 작은 항구도시는 여느 작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만큼 무덤덤한 이 도시는 194X년 이른 봄을 맞으며 변모한다. 쥐를 시작으로 사람이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하는데 이때까지만해도 죽음은 남의 일이었고, 공포가 일상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위기를 실감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았다.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은 고열, 멍울(고름), 구토, 전신통같은 증상을 보이다 수일 내 사망했다. 그리고 환자의 곁에 있던 사람들도 며칠 뒤엔 같은 증상으로 명을 달리했다. 페스트를 의심한 리외의사는 멍울을 연구소에서 분석 의뢰했고 그 결과 뭉쳐진 페스트균 같은 것이 발견되었다. 감염 속도가 빨라 촌각을 다퉈야 할 판에 관료직은 페스트냐 아니냐를 두고 입씨름하기 바빴다. 그러는 동안 성당에선 미사가 계속되고, 카페엔 사람들이 나와 차를 마시고,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아직은 "실직" 상태가 아니라 "휴가" 중이라 생각해 다들 여유가 있.었.다.
결국, 도시가 폐쇄되고, 사람들이 격리되었다. 두려워해도 절망하진 않던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흔들렸다. 초기에 보이던 열정(=벗어나보려 애쓰는)이나 안타까움은 사라지고 체념하고 무기력해졌다. 희망을 품던 사람들도 언제 끝날지 모를 현실에 고개를 떨구었다. 솔직히 코로나를 겪지 않고, 혹은 겪을 당시에 이 책을 읽었다면 감정적으로 너무너무 괴로워 완독이 어려웠을 것 같다. 생존자로서 느끼는 안도감과 뒤따르는 책임감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성실함의 문제입니다. 비웃음을 당할 생각일 수도 있으나 페스트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함입니다."(p.216)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진실인 것이 있다면 페스트에도 마찬가지로 통하겠죠. 페스트로 인해 성장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p.165)
영화 속에선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구하지만 현실에선 모두의 성실함이 모여 기적을 일으킨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누리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정신이나 영웅주의가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 공무원들이 제 자리를 지켜 준 덕분이고, 개인이 최선을 다해 서로를 지킨 덕분이다. 코로나를 겪지 않았다면 나는 위기 속 '성실함'이나 '성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그랬듯, 인류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존재라 위기 상황에 결국 '본심'이 드러날테고 그 '본성'은 '선'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위기를 통해 악은 드물고, 선은 절대다수라는 걸 몸소 배웠다. 심지어, 그 어느 때보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고 염려하고 챙기며 더 돈독해져, 집단은 불행했지만 개인은 행복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존자의 이야기일 뿐이다. 예기치못한 생이별을 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다를 것이다. <페스트>의 끝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일상으로의 회복도 좋지만 한 편에선 상실을 겪은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애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목숨, 재산, 기회, 희망, 시간 등...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에 개인이 감당할 몫으로 두긴 무리가 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한 책무이며 개인적으로 코로나복지정책으로 정신과 진료가 지원되었으면 좋겠단 생각도 한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코로나 얘기는 "이제 그만"을 외치고 있다. 이렇게 급변해도 괜찮은걸까?
지금은 생존자이지만 앞으로 어떤 형태로 코로나가 우리를 괴롭힐 지 장담할 수 없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IMF 위기가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 고독사로 나타나는 것처럼, 코로나의 그림자도 길 것이다. 한 발 앞서 그늘 아래 놓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가진 마음의 평화를 나누어주어야 한다. 혼자 빨리 뛰어 1등을 하는 달리기가 아닌 달리기가 힘들지만 함께 동참하게 된 친구의 손을 맞잡고 함께 결승선에 들어온 아이들처럼. 그런 해맑은 마음이 우리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죠."
"무슨 말씀인지 완벽하게 이해되었습니다."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