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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시간 - 완벽하지 않은 날들을 위한 인생 수업
줄리 리스콧-헤임스 지음, 박선영 옮김 / 온워드 / 2022년 5월
평점 :
어렸을 때 내게 어른들은 "히어로"였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나타나 날 구해주는 영웅,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구세주 같은 존재. 그래서 부러웠다. 멀리 내다볼 줄 아는 혜안, 내가 가진 힘을 어디에 쓸 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뒤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도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자립은 자기 인생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필요한 것을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직업을 찾고, 살 집을 찾고, 아플 땐 약을 찾고, 식재료를 찾아서 음식을 만들고, 세금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p.21
처음 '자립'이란 단어를 체감한 건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취직을 해 돈을 벌면서 나는 어떻게 돈을 관리해야 할지 몰라 부모에게 맡겼다. 그리고 몇 년에 걸쳐 차차 내가 운영해 나갔다.
부모로부터 자립한다는 건 들어온 월급을 소비, 저축하고 학자금 대출을 스스로 갚아 나가는 것이다. 나의 건강을 좌우할 음식을 결정하고, 직장 내에서 부딪치는 일들을 스스로 감당하고 소화해야 한다. 뉴스를 보고, 투표를 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때론 세상을 메탄가스로부터 구하기 위해 고기를 줄이고, 음식물 쓰레기와 분리수거, 빨래, 관리비도 신경써야 한다. 당시 갓 독립한 친구들은 독립하면 해야 할 일이 이토록 많은 줄 미처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어른의 시간>은 저자가 (법적)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되기까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실패했는지 지금까지의 삶을 담담하게 고백하며 조언한다. 직장에서 겪은 어려움을 토대로 직장에서 배움과 성장을 얻는 방법(p.49)에 대해 조언하고,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꿈꾸던 변호사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직업적 성공과 정체성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p.110)를 알려준다. 스탠퍼드대 학장으로 일하며 대학생들을 상담한 이력이 있어서인지 조언이 가득하지만 잔소리, 꼰대같단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어요. 다섯 살짜리 아이는 뇌가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아서 시간 감각이 없어요. 그래서 사건 지평선이 아주 짧고 즉각적이죠. 예를 들어 오늘 간식이 뭔지, 언제 놀이터에 갈 수 있는지만 생각할 수 있어요. 고등학생에게 앞으로 5년 계획을 세워보라고 하면, 잘 모르겠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더 많은 세월을 살고 나면 지나온 세월만큼 앞으로의 모습을 더 쉽게 그릴 수 있어요."
p.259
책에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이란 말이 나온다. 이는 마음으로 지금 다루는 문제 너머를 그려볼 수 있는 능력으로 동양에선 혜안이라고 부른다. 사건 지평선이 길수록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다. 여기에 지름길은 없다. 숱한 고난을 많이 겪어 혜안을 일찍 얻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게 지름길이라면 (가시밭)지름길일까.
누군가 어른이 된게 부담스럽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고, 부모 품 속에 숨어 캥거루처럼 살고 싶다면 인생 일회차 동지로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십대 초반보다 후반이, 삼십대 초반일 때보다 후반일 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수월해지고 한결 편안해진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할 일 리스트를 지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면서 점점 나아지는 과정이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아주 많은 주제를 다루지만, 책을 덮어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을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알아가는 과정이고, 무엇보다 견디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p.10
마흔이 된 지금 나는 스무살일 때보다 어른을 더 존경한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의 동병상련이기도 하고, 경험한 세월의 시간이 쌓이고 경험이 깊어진만큼 어른들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된 덕분이기도 하다. 대단한 철학, 사상이 없어도 세상에 순응하다 보면 시간이 어른으로 만들어 준다. 어떤 어른이 되느냐는 내가 그동안 결정한 크고 작은 무수한 선택이 쌓여 나라는 '결'을 만든다.
사실 어른들은 진짜 히어로다. 스스로를 구하는 히어로. 이 세상에 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범법자가 되어 뉴스에 나온게 아닌 이상 당신 안에는 이미 좋은 사람이 될 능력이 숨어있다. 단, 누가 품에 안겨주길 기다리지말고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어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를 때, 그저 막막한 기분이 들 때 이 책을 들어 어디를 펼쳐도 좋다. (이 책이) 아직 성장 중이라면 좋은 영양분이 되어줄 것이고, 어른이라면 더 크게 뻗어나갈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