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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이종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5월
평점 :
아나운서: 지난 26일 저녁, 강원도 인제의 한 시내버스. 만취 상태의 한 남성이 버스에 탑니다. 앉을 자리가 있는지 보려는 듯 버스 안을 두리번대던 남성이 갑자기 뒷문 쪽으로 향하더니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승객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시비가 말싸움으로 번질 무렵 만취 상태의 A씨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B씨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
p.13
공포 소설이라길래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 정도로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어...
어....
필자는 가해자가 어떤 X든, 피가 낭자하든 공포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해불가 돌아이가 나오는 <쏘우>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귀신이 판치는 <컨저링>이든 공포의 대상이 판타지적이라면 상관없다. 눈쌀이 찌푸려지고 욕은 나오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스크린이 꺼지면 감정도 끝이 난다.
그런 내가 혹은 내 친구가 겪을 수 있는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들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간다. '엉덩이 털고 일어서면 끝' 이게 안된다. 집 앞 공원 건너 창고에 살거 같은 악인이 나오는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처음으로 "공포"를 살로 느꼈다. 난 이런 공포엔 젬병인데 이 소설이 딱 그랬다.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영화들처럼 신체를 훼손하는 잔인한 묘사는 없다. 다만, 심리적으로 상당히 옥죄는 스타일이라 이런 이야기가 버거운 이에겐 불안을 가중 시킬 수 있어 주의하길 권하고 싶다. 소설엔 겉으로 보이지 않는 심리적 내상을 입히는 악인들이 등장한다.
희수는 동성애자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자신의 정체성을 터놓지 못한다. 오해받을까봐. 그런데 가장 두려워하는 그 일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상대를 통해 일어난다. 그림 연습을 위해 그린 누드 크로키로 변태 취급을 당하고, 사무실이 훼손되고, 미행당하고, 친구들에게 험담을 해 피해를 입지만 피해자라고 말하지 못하고 공포를 고스란히 감내한다. 성소수자인 피해자는 그 자체로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는다.
"내 주제에 무슨 사랑이야."
희수는 중얼거리며 일어나 바닥에 흩어진 그림 조각들을 주웠다. 여자들의 몸은 조각나 있었다. 팔과 다리와 가슴 들. 희수는 그림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자신의 꼴이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났다.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서 벌을 받은 것 같았다.
p.153
민재는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도 집에 들어오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집 안을 쓱 둘러보고 빈틈이 보이면 한두 마디씩 지적을 한다. ... 매일 그러는 것은 아니고 며칠에 한 번씩 지나가듯 하는게 전부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콕콕 와서 박힌다. 그런 말을 듣기 싫어서 진아는 집안일을 말끔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부모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인터넷에도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다. 얼마나 한심한 여자로 보이겠는가.
p.25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의 진아는 회사 계약 만기로 고민하다 남자친구의 제안에 취집을 택한다. 군인인 남편을 따라 관사라는 어항에 들어가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집안일을 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집은 깨끗한지, 음식은 어떤지 검사(?)받으며 평온하지만 불안한 일상을 보낸다. 배부른 소리한다 취급받을까봐 남에게 터놓지도 못한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안이나 공포가 싹터서 점점 크게 자라나는데,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서 한 발짝 떨어져서 봐야만 안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바로 무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p.286
사실 누군가에게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심심한 일상 정도로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아주 안전한 세상에 속해 있다. 소설은 이런 소수를 제한 상당수의 2030 여성들이 공감할만한 일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아주 흔한 일이라 선뜻 피해라고 보기 애매한 것들을 은밀하게 담아 두고 있다. 그래서 타자화하기가 힘든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정말 한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안심이 되었을까. 나는 안심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