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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시게노부 후사코 지음, 최순육 옮김 / 지원북클럽(하얀풍차)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일본 적군파라면, 72년 전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합적군의 내부 숙청 사건이라 할 아사마 산장 사건이 떠오른다. 이 시기에 이미 레바논에 넘어가 있던 시게노부 후사코는 일본 적군파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국제근거지론'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전선과 함께 다양한 '테러' 작전에 결합한 이력을 갖고 있다. 2000년 11월에서야 오랜 지명 수배 생활을 끝내고 20년형을 받았다. 이 책은 27년간 무국적자였던 딸에게 일본 국적을 취득해 주기 위해 법무성에 보내는 탄원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체계가 잡힌 책은 아니다. 뭔가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기 일쑤고. 다만 70년대 초반 말그대로 이역만리로 날아가 혁명에 투신한, 어느 여성의 내면을 훑어보기에 적당하다.
지금 보면 마냥 놀라울 뿐이다. '국제근거지론'이라는 것, 아마 68혁명도 그렇고 체 게바라등 게릴라들의 남미 혁명 운동의 기운이 남아 있는 70년대 초반에는 무척 신빙성 있었을 거다. 무장 투쟁노선도 그러하고. 어디 취직하고 재테크는 어떻게 해야 하고 결혼은, 애들 교육은, 내집마련은.. 뭐 이런 문제들에만 골머리 싸안는 지금 세대의 눈에, 세계의 부조리를 바로 잡기 위해 인생을 내던지는 각오가 가능했던 그 시절은, 차라리 희망이 있어 보이기도.
"총이야말로 남녀노소를 평등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실감했었다.
어른이나 어린이도 총을 손에 들었을 때, 그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한다면 체력적 한계와 관계없이 적을 향해서 평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총을 잡지 않으면 안 되나?
왜, 총을 잡을 수밖에 없나?
이런 물음 앞에 놓여지면,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되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강대국의 이기심, 돈이나 자본에 의한 지배 논리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결론을 내려본다.
사람을 다치거나 죽이지 않고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에는 폭력이 힘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있으며 서방측과 대결할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강대국의 폭력은 깔끔하고 세련됐으며, 피를 보이지 않고 돈이 붙어 다니는 자본의 냄새가 난다. 민중의 무장 봉기는 증오에 찬, 피비린내 나는 행위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미숙한 투쟁을 벌인 결과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 하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주변의 친구나 친척들이 폭력 앞에 전사하고 말았다. 나도, 그 누구도 사람이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81-82)
여전히 팔레스타인은 '자살폭탄테러'를 벌여야만 해외단신에 소개된다. 공정치 못한 역사를 만든 것은 영국과 이스라엘인데, 그들은 정치와 자본의 동맹으로 엮여 있다. 수백 킬로에 달하는 장벽으로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살던 땅에서 떠나가도록 만드는 이스라엘의 잔학성은, 그들의 부와 세련된 정치로 가려져 있다. 내가 구입한 스타벅스 커피 한 잔(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은 유명한 과격파 시오니스트다)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불도저나 총알이 될 수 있지만, 이런 사실은 닮고 싶은 뉴요커 이미지에 가리워져 있다.
평화, 폭력과 비폭력, 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주제에 대해 그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튼 주말에 시게노부 후사코의 딸인 시게노부 메이가 나오는 일본 다큐멘터리를 보러 인디스페이스에 갈 생각이다. '9.11-8.15 일본심중'이란 작품이다. 실은 이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한 워밍업 차원에서 책을 읽은 것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