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내 작은 모퉁이 - 2003년 뉴베리 상 아너 수상작 문학의 즐거움 42
앤 M. 마틴 지음, 구계원 옮김 / 개암나무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한국사회는 언젠가부터 '다르다'라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자신의 '개성'과 가치관을 우선하기 보다는, 사회가 요구하거나, 대중적으로 통용 되거나,

아니면 대중에게 인정받는 가치관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데, 예를 들자면 격식을 차리는 장소에

양복이나 예복을 입고 가는 것이나,  한국에서 '팔리는' 자동차의 색상이 대부분 흰색과 검은색

2종류에 국한된다는 사실 등이 그러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사회가 너무 딱딱한 것이 아닌가?" 하는

내용의 비난의 대상이 될 원인을 제공 할 지언정, 배척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의 '위기의식'을

자극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뭐 간단하다, 실제로 사람들이검은차를 타고 다니고,

양복을 입고 직장에 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 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있어서 혐오감을

유발하거나 정신적이고, 또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회의 인식과

공감대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또 대다수에게 '문제'로서 의식되어야 한다는 것은

돌려 말하자면,  그러한 공감대가 자신과 상대방에게 있어서 씻을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회의 인식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의

주제가 되기도 한 내용 즉 '편견'이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해티는 미국의 전형적인 서민의 딸이자,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쌓고 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하숙집 딸내미' 이다.         그녀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하숙집의 아주머니(그리고

할머니 라고도 정의한다) 의 사랑을 받고, 또 그 사랑을 받는것에 대해서 조금의 꺼리낌도 없는

순수함들 지닌 소녀로서,  이러한 순수성은 어느날 여름 처음 만난 (자폐아)삼촌 '애덤'과의

만남을 계기로,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주는 큰 요소가 되어준다.

 

주인공 '해티'에게 있어서, 애덤 삼촌의 존재는 남들보다 더 표현하고, 더 잘 웃고, 뭐든일에

행복해 하는 얼굴을 잊지 않는 솔직한 사람일 뿐이다.           물론 그녀는 애덤 삼촌이 자신에게

말하는  "너는 우주의 모퉁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야."  같은 이야기에 대한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를 이해하고 또 공감하는 능력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애덤 삼촌의 존재보다는 그를 '정신병자'라는 이유로 눈쌀을 찌뿌리고, 홀대하고, 심지어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주변 인물들의 존재가 더욱 더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해티는 애덤삼촌과 거리를 걷고, 산책을 하면서,  그가 활기찬 이야기를

떠벌리거나,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눈물짓기도 하는 감정의 표현을 모두 보아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가 '다른사람과 다르다.' 라는 주변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니 오히려 에덤 삼촌이야 말로, 주변 사람들보다 더욱 더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절친' 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물론 시간이 지난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그녀의 믿음은 한치의 변화도 없다.)    물론 애덤에게 있어서도 귀여운 소녀 해티의 존재는

단순한 친척이라는 관계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친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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