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세상이 참 무섭다 무섭다 해도 " 그것은 그저 과장과 푸념을 섞어 법썩을 떠는 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날 일어나는 각종 범죄들의 잔인함과 흉악함을 보면, 진실로
"세상이 무서워 진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진다.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사형이 남용되어진 사회였고,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임의적으로 사회와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해서 죽어갔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법제도는 상당히 민주화되어 비록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해도,
법률에 의한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죽음을 선고 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형수들은 사회의 정의를 바로잡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
한다는 논리 아래 그 수명을 강제로 강탈당한다.
그러나 다른것도 아닌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을 거두는 일이기에, 사형제도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 존폐여부를 시험받는다.
2012년 9월 울산자매 살인사건 당시, 범인을 체포한 그 시점에서 자매의 아버지는
기자들에게 "아직 우리나라에 사형제도가 있지요?" 라고 물었고, 그것이 기사화되자
수많은 사람이 파렴치한 범인을 사형에 처하라며 들고 일어난 적이 있다.
범죄자에게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의 죽음을 원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감정적인 복수이고,당한 만큼 이상의 고통과 보복을 해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제3자인 사람들 역시 그들과 같은 사람이기에 감정적인 그들의 마음에 쉽게 동조된다.
예를 들어, 울산자매 사건 이전의 한국은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국가의 그러한 사법 방침에 대하여, 국민들은 '인권을 보호하는 선진국의 의식을 따라잡고
있다는 것' 으로 해석하며, 호의적인 지지를 표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잔혹한 살인마의 등장 하나에 국민들은 '죽어도 싼 인간은 죽여라' 라며 과거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관용의 정신을 뒤집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보복적 가치' 즉 함무라비 법전의 가치가
부활한 것이다.
나의 학창시절 즉 대학에서 형법을 논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논란을
주제로 격렬한 토론을 벌인적이 있다.
아직 사회를 모르고, 혈기가 넘치는 대학 1학년생들은 대부분이 '사형제도를 지지했다.
그들은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게 감성적이였고, 심지어는 범죄자를
가두고 먹여 살리는 국비(비용)이 아까우니 죽이라는 의견도 내놓았었다.
물론 그들의 의견은 심히 감성적이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본질에 솔직한 의견이기도 하다.
분명 사형제도는 사회에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는 제3자의 피해를 유발한다.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앗아가는 잔인한 행위이면서도, 고도로 밀집되어 통제하기
어려운 오늘날의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정의의 채찍 역활을 수행하는 필요악의 두가지 얼굴을
가진 존재이자, 창과 방패 이야기처럼 영원히 모순을 간직하기에
사형제도는 오늘날에도 논란속의 "뜨거운 감자' 가 되어 있고, 그 결말의 끝은 보일 기미가 없다.
그러나 개개인은 분명히 자신만의 정답을 가지고 있다. 과거 감성적이던 학생부터, 오늘날
이 글을 읽고 있을 사람들 모두가 각각의 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을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들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제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