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황혼이 깃든 예술가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분투기
윌리엄 E. 월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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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명의 최대의 전성기... 라고 딱히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정신의 또 다른 도약과 발전 을 상징하는 단어로서, 르네상스는 분명 남다른 역사적 무게를 담아내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주인공인 미켈란젤로 또한 한 명의 유명한 예술가라는 영역을 뛰어넘어 이른바 '거장'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낸 인물이기에, 그 결과 조르조 바사리를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위의 인물을 탐구하는 동시에, 그의 장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려 했다.

때문에 역사속의 인물로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는 위의 언급한 것과 같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으로서 존중받는다. 더욱이 화가이자 조각가 그리고 건축가로서 이름높은 명성을 얻었기에, 결국 보다 폭넓은 예술의 영역에서 활약한 '남다른 열정'을 상징하는 인물로서도 쉽게 평가되고는한다.

소네트든, 대리석 조각이든, 성 베드로 성당이든, 79세의 예술가는 (...) 그가 두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만 작자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상과 창의만으로도 작자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이러한 강조점이 이동은 미켈란젤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항이다.

252쪽

그렇기에 그가 남긴 여러 예술 작품들은 당시 '미켈란젤로'의 정신과 인생을 대변하는 좋은 증거가 되어준다. 예를 들어 1499년 불과 24세의 나이에 조각한 '피에타'는 당시 예술적인 가치와 명성을 추구하는 혈기 넘치는 젊은 시절을 상징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 작품의 한 켠에 자신의 서명을 새겨넣은 행동은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그 스스로의 실력을 뽐내는 동시에,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각인시키려는 나름의 욕망(또는 혈기)에서 이루어졌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열정과 실력이 뒷받침된 '인생의 절정'을 살펴보는 것도 그 한 인물의 면면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시도일 것이다. 다만 이 책의 내용은 보다 더 나아가 인생의 후반기... 이를테면 이제 노년의 휴식을 만끽해도 이상하지 않을 70~80세의 미켈란젤로가 그 스스로 운명으로서 맞아들인 계획, 즉 성 베르로 성당의 건축 책임자로서 활동한 시간을 통하여, 그가 생애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열정' 즉 예술에 바친 그의 꾸준한 자세를 드러내는데 목적을 둔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 아니고, 예술은 전쟁, 정치, 불확실한 재정상태, 변덕스러운 후원자들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다. (...) 여든한 살이 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가 경력이 끝났다고 생각할 만했다.

전쟁과 피난

실제로 오늘날에도 건재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위용은 (결국) '미켈란젤로의 헌신'이 없었다면 마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베드로 대성당이 오롯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래도록 공사의 책임자로서 현장의 질서를 바로잡고, 더욱이 (절대 갑!인) 교황청의 고질적인 변덕 등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결국 그는 대성당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의 예술적인 영향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노년의 예술가가 그렇게 대성당의 건축에 헌신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도 그럴것이 굳이 교황청의 계획에 따르지 않아도 그는 이미 뛰어난 예술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이미 이룩한 명성을 뒤로 하고, 특히 그의 오리지널리티를 뽑낼 수 있는 계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째서 대성당의 건축을 담당하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결국 이는 당시의 미켈란젤로의 노년의 모습, 그리고 이제 막 중세의 옷을 벗어던지려는 당시의 시대상 뿐만이 아닌, 중세인으로서의 (유럽의)사고방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여느 예술가의 모습과는 달리 (비교적) 사회 친화적이고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이는 개성적인 모습과 더불어 독선적이고 높은 자존감을 보인 여러 예술가들과는 다른 (내면의)연약함을 가진 인물이라는 말이 된다.

때문에 노년의 미켈란젤로는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 특히 그의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는 동료의 죽음을 감내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보인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남긴 노년의 많은 기록들을 통하여,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노년의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 성취 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활동'을 모색한 흔적 또한 드러난다.

교황 율리우스3세 시절에, (...) 그는 멀찍이 떨어져서 크게 개입하지 않으면서 공사들을 관리했다. (...) 미켈란젤로는 그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확대했다.

5장 새교황 율리우스 3세

결국 미켈란젤로의 노년의 모습은 단순한 '워커홀릭'이 아닌 또 다른 형태로 확장되어진 예술활동의 일부라 정의 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의 안정적인 시대가 아닌 전쟁을 포함한 수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자칫 중단되기 십상인 대공사를 이끌어 진행시킨 추진력은 분명 미켈란젤로가 지닌 '예술성'(또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다시끔 재확인 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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