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오늘날에도 건재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위용은 (결국) '미켈란젤로의 헌신'이 없었다면 마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베드로 대성당이 오롯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래도록 공사의 책임자로서 현장의 질서를 바로잡고, 더욱이 (절대 갑!인) 교황청의 고질적인 변덕 등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결국 그는 대성당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의 예술적인 영향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노년의 예술가가 그렇게 대성당의 건축에 헌신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도 그럴것이 굳이 교황청의 계획에 따르지 않아도 그는 이미 뛰어난 예술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이미 이룩한 명성을 뒤로 하고, 특히 그의 오리지널리티를 뽑낼 수 있는 계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째서 대성당의 건축을 담당하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결국 이는 당시의 미켈란젤로의 노년의 모습, 그리고 이제 막 중세의 옷을 벗어던지려는 당시의 시대상 뿐만이 아닌, 중세인으로서의 (유럽의)사고방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여느 예술가의 모습과는 달리 (비교적) 사회 친화적이고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이는 개성적인 모습과 더불어 독선적이고 높은 자존감을 보인 여러 예술가들과는 다른 (내면의)연약함을 가진 인물이라는 말이 된다.
때문에 노년의 미켈란젤로는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 특히 그의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는 동료의 죽음을 감내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보인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남긴 노년의 많은 기록들을 통하여,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노년의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 성취 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활동'을 모색한 흔적 또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