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산문집 (천줄읽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박지원 지음, 박수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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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학창시절 국어문제집에 그의 이름과 작품, 암기 포인트등을 열심히 적었던 기억이 난다. <양반전>은 몰락해가는 조선사회를 풍자하고 <허생전>은 실학사상이나 이용후생에 대한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라느니 하는 식의 것들을 아무런 이해나 의심 없이 외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떻게 국어 수업을 진행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작품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나 사상, 작가의 의도를 달달 외우라고 했으니 그걸 시키는 놈이나 따라하는 놈이나 참 매한가지로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만약, 국어 시간이 매주 한 권씩의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면 세상을 대하는 아이들의 눈과 마음이 조금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에 이르렀지만, 얼마 전 읽었던 박지원의 <연암 산문집>은 과거 고생스럽게 공부했던 고전문학의 맛을 새롭게 알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사실, 학교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곱게만 자라고 아직 사회의 쓴맛, 단맛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학창시절에 이런 작품들을 읽고 잘못된 사회를 풍자하느니, 세태를 꼬집고 있느니 하는 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세월이 흘러 지나간 고전을 다시 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0여 년 전 읽었던 책과 10년이 흘러 같은 책을 읽더라도 그 작품에서 느껴지는 여운과 작가의 의도가 너무도 확연히 차이가 나고 세상을 향한 노여움이나 비판의 소리가 더욱 매섭게 들리기 때문이다. 작년에 다시 읽었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정말 최고였음은 두 말할 필요 없고.

 

이번에 읽은 고전은 지식을 만드는 지식 ‘지만지’ 출판사에서 나온 <연암 산문집>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연암집>에서 총 52편의 글을 골라 해설해 놓은 책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박지원이라는 인물을 두루 알게 해주는 엑기스같은 작품으로 보여 진다. 특히 고전인데다 어려운 문장과 뜻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각 작품 끝에 실린 옮긴이의 해설이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어 작품 감상을 더욱 풍부하게 하도록 이끌어 준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총 4개의 소제목 - 사이에서 생각하기, 문장가의 마음, 생활의 발견, 현실과 사회 -을 두고 선별된 각각의 글들이 같은 주제로 연결되어 있어 연암의 생각을 좀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던 점도 신선했다. 무엇보다도 이번 독서의 가장 큰 수확은 짧은 몇 편의 글을 접하면서도 왜 연암이 최고의 글쟁이라고 칭송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글을 잘 쓰는 자는 병법을 아는 걸까? 비유하자면 글자는 군사고, 글의 뜻은 장수다.

제목은 적국이고, 고사(故事)를 끌어들이는 것은 싸움터의 보루다. 글자를 묶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 문장을 이루는 일은 대오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춰 소리를 내고 문채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날리는 것과 같다. 조응(照應)은 봉화고, 비유는 유격병이다. 억양반복(抑揚反覆)은 맞붙어 싸워 모조리 죽이는 것이고, 글의 첫머리에 제목의 의미를 밝히는 파제(破題)를 하고 마무리를 하는 것은 성벽에 먼저 올라 적을 사로잡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대를 정도해 개선하는 것이다....<중략>

 

그러므로 글을 쓰는 자는 그 걱정이 항상 스스로 길을 잃고 요령(要領)을 얻지 못한 데 있다. 무릇 길을 잃어버리면 한 글자도 써 내려가기가 어려워 붓방아만 찧게 되고,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쌓아도 오히려 허술함이 있을까 걱정된다...<중략>

 

진실로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을 잡게 되면 이소가 눈 오는 밤에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채성을 함락한 것과 같고, 한마디 말로 핵심을 뽑아낸다면 조귀 장수가 단 세 차례 북을 울려 관문을 빼앗은 것과 같다. 글을 쓰는 방법은 이와 같아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 본문 <글쓰기의 요령 중> -

 

글을 쓰는 것을 치열한 전투행위와 같다고 비유한 그의 생각이 참으로 탁월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노련함이 있다 싶다. 글을 쓰면 쓸수록 어렵다고 느끼는 요즘의 나는 아무래도 이 요령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훌륭한 미사여구를 사용한 글이라 한들 명확한 주제가 없으면 유능한 지휘관이 없는 군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가끔 어떤 이의 글을 읽다보면 참 좋은 명문장과 아름다운 문체가 시선을 끌고 있음에도 다 읽고 나면 도대체 주제가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어떤 경우는 내 앎의 깊이가 얕다보니 그럴 수 있지만, 또 다른 경우는 연암이 지적한 것처럼 주제의식이 불분명하여 좋지 않은 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좋은 문장과 뛰어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쓴다 해도 ‘이치를 얻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글쓰기의 가장 큰 핵심이 아닐까싶다.

 

이렇듯 이 책에 소개된 각각의 글들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연암만의 관점, 글을 읽고 쓰는 것에 대한 깨달음, 사물에 대한 독특한 해석등이 연암 박지원이라는 역사속의 인물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한 지식인의 자세와 삶에 대한 통찰을 배우기에도 충분했다. 한 마디로 옆에 두고 다시 읽어도 좋을 멋진 책이다.

 

아, 이러니 내가 어찌 고전읽기를 그만 둘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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