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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보낸 5년 - 인생의 갈림길에서 시작된 아주 특별한 만남
존 쉴림 지음, 김진숙 옮김 / 엘도라도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천국에서 보낸 5년>을 읽는 지금은 6월이지만 크리스마스를 느끼게 되는 책이다. 눈이 사락사락 내리고, 아우구스티노 수녀님을 만나러 성요셉 수녀원으로 가는 길 위에 축복처럼 하얀 눈이 내리는 것만 같다.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깊고 따스한 눈빛과 미소를 지닌 이 멘토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사랑으로 자신을 변화해 구순의 나이에 이른 노수녀의 모습으로 독자들을 맞이한다.
세상에는 잊혀진 수녀원 한 모퉁이에 도자기 공방이 있다. 주인공 존 쉴림은 서른 살의 청년으로 방황의 시기에 우연히 들른 공방에서 인생의 스승을 만나면서 5년여 동안 나눈 대화가 이 책 속에 담겨져 있다. 존은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정규직 교사가 되지 못해 임시직 교사의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요리책 작가로서의 성공도 꿈꾸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모호함 속에서 거대한 자석처럼 소박한 공방으로 이끌린다.
고양이와 노수녀와 그리고 수녀님이 만드는 도자기 성물이 빼곡한 공방은 시간을 거슬러 살아가는 곳이고, 현대적 기술이나 물질적 욕망이 문턱을 넘지 못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이 세상에서 점처럼 작고 소박하지만 우주처럼 반짝이는 곳이랄까. 독자로서 감탄이 나오는 대목이 많았다. 주인공 존은 사랑스럽고 착한 심성을 가진 청년이지만, 나는 주로 구순이 된 노수녀님의 일상과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굳이 상품으로 팔려는 의도는 없다. 성모 마리아, 성 요셉, 동방박사 세 사람, 양치기 소년, 아기 예수, 갖가지 모양의 포도주병과 컵과 물망초꽃 받침대들을 진흙으로 빚고 그림을 그리고 가마에서 굽고 잘 만들어진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가마에서 깨져 나온 것 하나하나에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수녀님의 일상의 낱낱의 움직임이 하나의 기도였다. 그것은 완전한 봉헌이었고 삶의 순간들과의 일치였으며, 사랑의 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북이와 개구리 조각상에는 ‘성모송 세 번’, 무당벌레에는 ‘성모송 한 번’이라는 가격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물질문명과 디지털의 기세 속에서 가격을 기도로 매기는 이 수녀님을 나는 충분히 책 속에서 만나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비록 지금 이 책은 저자가 천국에 계신 수녀님을 회상하면서 쓰는 글이지만, 수녀님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수녀님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도자기를 통해서 인생을 보는 시각이 참으로 놀라웠다. 찰흙으로 형상을 만들고 가마에 넣고 뚜껑을 덮고 나면 가마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미 만든 이의 손을 떠났기 때문에 완성품이든 아니든 그것은 하나의 섭리로 보는 시각을 배울 수 있다.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깨어진 도자기 하나하나에 자신이 삶에서 받은 은총을 자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대목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시각과 다른 수녀님의 시선은 중요한 순간에 속도를 늦추라는 가르침을 나에게 주는 것 같았다.
존이 행복에 대해 질문하자, “행복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가진 걸 사랑하면 돼요.”(p.81) 수녀님의 대답은 신선한 공기처럼 독자에게 다가온다. 삶조차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자신을 다 비운 후에 채워진 충만한 천국의 시간이 담겨진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천국으로 향하기 직전 마지막 만남에서 존이 “천국은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나요?” 질문하자, 수녀님은 우리는 이미 그 이야기를 수없이 했다고 대답하신다. 수녀님의 일상 이야기 속에 들어있던 것이 바로 천국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선물이라는 것, 용서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또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p.102)이며, 그것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사랑과 공감 자유의 선물이라는 수녀님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소박함이라는 작고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며,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보여주고 살았던 한 노수녀님의 일생이 바로 크리스마스였음을 감사하며 이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