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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 이광수 장편소설 ㅣ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7
이광수 지음, 이경훈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평점 :
이 책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때였다. 문고판이지만 두 권으로 되었던 '흙'을 읽고서 기억에 남았던 것은, 저자 이광수가 우연성을 너무 남발하는데 대한 불만이었다. 기차를 타면 (만나서는 안될) 아는 사람을 만나고, 기차에 내려서도 휑하니 지나가는 차에서 아내의 불륜현장을 우연히 발견하고, ... 등등 이런 우연성의 남발이 참으로 못마땅했다. 생각해보니 이광수의 '우연성'이란 것은 대부분 기차에서 주인공들의 중요한 여행 장면에 많이 나오는 듯하다. <무정>에서 여주인공 영채가 '자살여행'을 떠나는 길에 동경에 유학을 간 여학생을 만난다던지, 그 여학생과 동경 유학을 떠나는 길에 (역시 만나지 말아야 할) 미국유학 떠나는 형식을 기차 안에서 만난다든지 하는 설정 등등.... 아무튼 이런 기차여행 중의 우연한 만남의 남발이 참 맘에 들지 않았다. 이게 이광수 소설의 한계려니..... 이런 생각들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우연의 장치들이 고의적으로, 어떤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서 의도된 것이라면? 이광수는 본격적인 조선의 근대소설의 최정점에 있는 작가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정치적 야심을 가진 계몽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의 일관된 계몽주의가 세월의 무게에 꺾이어 일제 말기에 곡필을 일삼아 그의 한국문학에서의 업적에 문신과도 같이 지울 수 없는 먹칠을 하고 말았지만... 어쨋거나 계몽주의자로서 이광수는 소설의 자연스러운 전개과정 자체보다는 자신의 사회철학적인 사유를 그대로 작품에 투영하여 독자들을 설득하는데 초점을 두는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이 가지는 (우연성의 남발과 같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과정들은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옳을 듯하다.
<무정>에 이형식이 있다면, <흙>에는 허숭이 있다. <무정>의 선영과 영채는 <흙>에서 정선과 유순을 상기시킨다. <무정>에서는 근대화의 예찬, 도시예찬이 주류를 이루고 시골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미미하지만, <흙>에서는 근대화/도시화에 따른 부작용에 예의 주시하면서, 조선인의 80%가 사는 시골(살여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두 작품 간에는 약 15년의 격차가 있다. 경성은 당대에 이미 급격한 도시화의 파고 속에 있었으나, 그것이 긍정적인 효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대학(전문)을 졸업한 도시 엘리트 젊은층에게 만연한 실업들(경성제국대 졸업생 김갑진, 심지어는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박사를 따온 이건영조차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에 탐닉한다) . 도시는 발전하지만 여전히 궁핍한 80%의 농촌의 재발견. 살여울이라는 이북의 어느 농촌 출신으로 변호사까지 획득하고 부잣집의 미녀와 결혼하지만 절망하는 고향 농촌을 일으켜세우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허숭은 <무정>과 <흙> 사이의 15년의 시간 차이에서 성숙한 작가, 또는 당대 지식인들의 반성 위에서 창조된 인물이다.(작가는 단행본 후기에서 '채수반'이라는 농민계몽활동가를 모델로 했음을 밝힌다.) 그러나 이 영웅적인 지식인 농민계몽활동가는 제대로 고향에 안착하지 못한다. 하나는 완벽한 도시적 여성을 대표하는 아내 정선의 반대와 외도, 다른 하나는 고향에서 그의 활동을 백안시하고 방해하려는 유정근 등의 세력들, 그리고 당장 눈앞의 이익에 끌려다니는 귀 얇은 무지몽매한 농민들(맹한갑)의 사이에서 허숭의 노력은 좌절에 부딪힌다. 후반부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작품을 끝내는 과정에서 이해하기 힘든 비약(정근의 개과천선 등)이 나오며 (이광수 작품 특유의) 서둘러 해피엔딩으로 맺음하는 것이 아쉬움을 주기도 하지만 당대의 이광수의 독자들이 원하는 바, 또한 나름 정치적 야심가로서 그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했던 바는 충분히 전달이 되었으리라. 70년 뒤에 읽을 독자들까지 만족할 마무리를 기대하는게 무리다.
<흙>이 비록 농촌계몽소설로 규정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의 배경에 상당부분(분량으로 절반 이상은 되었던 듯하다)은 경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치정관계들이 중심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래서 궁벽한 시골인 살여울보다는 훨씬 내게 이해되기 쉬운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어서 (중학시절에는 별 재미도 못느꼈으나 이제는)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나름 쌓은 내공(?)을 깔고 우리의 근대소설의 재미를 감각할 수 있다는게 보통 즐거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 선대들이 살며 공유해온 삶이 솔직하게 녹아 있다. 지극히 개인, 가족 중심으로 원자화된, 이기적인 소설들에서 느낄 수 없는 그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