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생각을 갖는 것은 미덕이다-그러나 우주 공학자 제임스 오버그가 언젠가 말했듯이, 머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열어서는 안 된다. 물론 새로운 증거가 보증한다면 기꺼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증거는 강력해야 한다. 모든 지식의 주장이 다 같은 업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외계인 납치 사건에서 증거의 기준은 대략적으로 중세 에스파냐의 마리아 환영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213쪽, 칼 세이건, 김영사

  인용한 위 문단의 마지막 줄은 조금 오역 같지만, 원문을 확인해 보지 못했다. 일단 그걸 제외하고 보더라도, 칼 세이건의 이 지적은 상당히 중요하다. 열린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함정이, '매사에 줏대가 없어지는' 것일 터이다. 정말로 옳고 그름이 분명한 일에도 일단 판단을 보류하거나 그른 생각마저 모두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분명 큰 문제가 아닐까?
  그러나 여기서 과연 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옳음'을 어떻게 확립하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유교에서 군자가 되고자 할 때 확립하려 하는 어짊이 아닐까? 팽이는 뾰족한 축이 없으면 아무 쓸모 없는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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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선박 소유자는 이민선을 바다로 내보내려고 했다. 그는 배가 낡았고 처음부터 아주 잘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이 배가 많은 바다와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고, 배를 자주 수리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배가 항해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이 의심 때문에 그는 마음이 괴로웠고 불행했다. 그는 아주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배를 정밀 조사하고 다시 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가 항해하기 전에 그는 이 우울한 반성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배가 아주 많은 항해를 안전하게 통과했고 수도 없이 폭풍을 견뎌냈으며, 이 배가 항해에서 안전하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는 하늘의 섭리에 믿음을 걸었다. 하늘의 섭리는 모국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더 나은 인생을 찾아가는 이 모든 불행한 가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건조자와 계약자의 정직성에 대해 품었던 모든 옹졸한 의심을 마음 속에서 쫓아버리려고 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자신의 배가 아주 안전하고 항해에 적합하다는 진심어린 확신을 얻었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예정된 낯선 새 고향에서 이루어지는 망명 생활의 성공을 바라는 자비로운 희망을 가지고 배의 출항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배가 대양 가운데서 침몰했을 때 보험금을 받았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물론 그는 틀림없이 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유죄이다. 그가 자기 배의 온전함을 진심으로 믿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의 진실성은 결코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증거를 믿을 권리가 없기 떄문이다. 그의 믿음은 끈기있는 조사로 성실하게 얻어낸 것이 아니라, 의심을 억눌러서 얻은 것이다.


윌리엄 K. 클리포드, '믿음의 윤리학', 칼 세이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252쪽에서 재인용

  내가 가지고 있는 진실된 믿음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의심을 억눌러 만들어낸 믿음은 무지의 세련된 변용일 뿐이다. 나의 성실성은 믿음의 진실성의 한 요소이다. 물론 성실함이 믿음의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성실성 없는 진실된 믿음은 성립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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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인은 사회에 의해서 잉태되고 성장한 존재이며, 따라서 사회의 억압을 개선하여 일상으로 복귀시켜야 할 책임을 가진(또는 자처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사회와 역사가 지성에게 부여한 책임이며, 그 책임감음 바로 스스로의 자부로부터 발생해 나온다. 즉 이 책무감은 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한 것이다. '무위적, 일상적 삶'의 회복을 위해, '유위적, 비상한 삶'을 살아야 하는 비극성이 바로 공자가 생각하는 지사(志士)의 삶 속에 깃들여 있는 모순이다.
  여기서 공자는 비극적 현세에 개입하기를 촉구한다. 그것이 끝내 일상성의 회복이 될지는 운명(命)이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 정치적 투신은 스스로 역사와 사회로부터 담지한 공공의 행위이기 때물일 뿐, 어떤 이로움이나 남의 눈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유가적 앙가주망, 그 정치적 개입행위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는" 비극성을 잉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불가(無不可)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정신이 다시금 무가(無可)라는 부정의 정신 속으로 내림(來臨)하지 않는 한, 무가(無可)의 세계는 기껏 야만/자연으로의 회억이며 그것은 리얼리즘을 무시한 좌파의 몽상적 사유이거나 자기 위모적인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에 불과하고 만다. 말하자면 그것은 극좌적(極左的) 이기성이다.
  공자의 무불가(無不可)의 세계는, 은자들의 무가(無可)와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즉 횡으로 맞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가(無可)를 끌어안고 뛰어넘는 것(包越)이다. 즉 공자는 무가(無可)의 세계를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자기인식, 자기 위상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라는 '법어'에 깔려 있는 공자의 속내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2> 444~445쪽, 공자,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

  대학교 시절 선배가 나를 가리켜 '낙관적 비관주의자'라는 평을 내린 적이 있다. 참으로 애매모호한 평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 선배가 왜 내게 그렇게 평했는지를 온전하게 알지는 못한다.(다만 되돌아본 그때의 모습으로 대략적인 짐작을 할 뿐이다.) 당시에는 그 알쏭달쏭한 평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인상비평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을 그떄의 평과 견주어 보면, 저 평어를 내 모습에 쓰기는 부적절해 보인다.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모습에 견주기에는 말이다. 지금의 내가 추구하는 나의 모습은, '비관적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앞 부분의 '낙관적/비관적'은 현재 세상을 대하는 자신의 관점 혹은 인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현재 내 삶이 썩 나쁜 것은 아니라 여기고 즐거이 살아가고 있었다. 비하여 지금은 내 삶과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모순을 느끼고 불만과 안타까움과 좌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뒷 부분의 '비관주의자/낙관주의자'는 자신의 궁극적인 지향점 혹은 이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결국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어서 해결할 도리는 없으며,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참여보다는 현실을 살짝 비켜서는 삶을 원하고 있었다. 굳이 거기에 현실참여를 더해야 한다면 직접적 방법보다는 간접적 방법으로, 행동보다는 말로, 정석적인 서술법보다는 풍자와 조롱과 비꼼으로 대응하는 방법론을 원했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세상이 모순에 가득하다는 인식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 글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생겼다. 결국 언젠가 세상은 달라질 것이고, 내 노력에 의해 아주 조금이나마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그 변화를 내 눈으로 봐야 한다는 집착이 사라졌다. 우공이산의 고사는, 그 집착을 버린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낙관적 비관주의자'이고 싶지 않다. '비관적 낙관주의자'로 살아가고자 하며, 그 삶 속에서 '낙관적 낙관주의자'로 변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자그한 희망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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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이 이상향과 은둔자(隱士)들의 꿈과의 거리는 또 얼마나 될까. 공자의 꿈은 근본적으로는 은둔자들의 꿈과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자에게는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론, 또는 살아내는 실제가 달랐을 뿐이다. 은둔자들의 삶이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닌", 전도된 사회현실을 체념한 채, 나 홀로의 "산을 산으로 여기며 사는", '현세 부정의 정신'에 머물고 있다면 공자의 길은 '현세 극복의 정신'이 깃들이어 있다. 즉 공자의 삶은 그 "산이 산이라"는 '원래의 꿈'(1차)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산이 더이상 산이 아니라"는 '혼란의 현실'(2차)을 극복하고 다시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현실극복의 비전'(3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은둔자들이 몸을 감추어, 혼란의 현실(2차)을 주관적으로 무시하는 길을 택했다면, 공자는 혼란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객관적 참여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은둔자들이 퇴행(re-gression)이라면, 공자는 의식적 참여(pro-gression)이다. 공자와 노자, 또는 공자와 은둔자들의 언어들이 매우 흡사하면서도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이다. 꿈은 같을지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혹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현격히 다른 것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2> 63~64쪽, 공자,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

  같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 방법론의 차이로 대립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그러한 많은 길 중, 참된 길은 존재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 안에서도 선, 경전, 수행 등 그 방법론은 다양하고, '하느님'을 온전히 믿는 크리스트교에서도 다양한 종파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한 다양한 길이 저마다의 진실함으로 정당성을 세우고, 그 진실함을 앞세워서 상대방과 대화를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로는 진정 바람직한 길이 아닐까? 다양함은 그것이 참되게 유지된다면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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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되 생각하지 않음(學而不思)'은 배우는 것에 맥놓고 매몰되었거나, 배우면서도 생각은 멀리 떠난 경우인데 이럴 때는 배워도 한 귀로 듣고 또 한 귀로는 흘릴 뿐, 내게 남는 것이 없다(罔). 객관(대상)에 휘둘리기만 해서는 소득이 없는 것이다. 이 대목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해버리면 덕을 버리는 것(道聽而塗說, 德之棄也)"(17-14)이라는 경고와 궤를 같이한다.
  한편, '생각하되 배우지 않음(思而不學)'은 제 생각에만 골똘하여 타당성을 검증하지 않은 경우다. 예컨대 성경책 한 권 달랑 들고 입산(入山)해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휴거 소동 같은 것들이 그래서 생긴다. 자기 생각에만 골똘하여(思), 근 2천 년간 성경학자들과 교부(敎父)들이 이루어놓은 성경에 대한 방대한 주석들은 공부하지 않은(不學) 결과 빚어진 혼돈(殆)인 셈이다. 주관의 오류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더욱 어려운 법이다.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변증법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배우고, 생각하며, 또 그 갈무리된 생각을 바탕으로 더 널리 또 더 높게 배워가는 것, 이것은 공자가 자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지적한바, 호학의 실행과정인 셈이다. 그래야만 몸에 제대로 학문이 배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서 생각하고(學而思), 생각한 것을 바탕으로 배우는(思而學) 변증적 긴장을 늦추지 않을 때 참된 배움(學-習)이 가능하리라.


<한글세대가 본 논어 1> 96~97쪽, 공자,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

  위 인용문 자체만으로도 이미 내가 할 말은 더 없다. 저대로 따르기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굳이 한 마디 덧붙여 본다.
  생각하되 배우지 않음은, 어쩌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모순을 혁파하고 세상의 밝은 부분을 지향하지만, 자신의 앎이 그 생각을 현실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그런 차이 말이다. 정신적으로는 높은 격을 갖추고 있을지 몰라도, 실제 앎은 전혀 그 격에 맞지 않는 초라함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 것이다.
  이는 결국 내 현재 모습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이 넘치고 세상의 모순에 분노하지만, 결국 실력은 전혀 없는 현재의 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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