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사례가 있다. 현재 로봇이 조립 라인에서 사용되는 빈도는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일본에서는 모든 공장이 로봇화되고 있다. 더욱이 로봇은 점점 더 발전하고 있으며, 보다 '똑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한 20년 이내에(문명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면) 이러한 로봇화가 사회의 모습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키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는 것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누구의 공인가? 단 한 사람에게 그 공을 돌리기는 어렵지만, 전체 로봇의 30퍼센트를 제조하고 그 누구보다 많은 양을 설치한 유니메이션의 사장 조셉 F. 잉겔버거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잉겔버거는 1950년대 말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가 회사를 어떻게 설립했을까?
  몇 년 전에 들은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에 내가 쓴 『아이, 로봇』을 읽고서 로봇의 가능성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1940년대 양전자 로봇 단편을 쓸 무렵 내 의도는 분명하고 단순했다. 그저 단편을 좀 써서 잡지에 팔아 대학 학비를 좀 벌고 내 이름이 인쇄된 책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과학소설 이외의 것을 썼다면 일어난 일은 그게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과학소설을 썼고, 이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 105쪽, 아이작 아시모프, 오멜라스

  아시모프의 '자뻑'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견줄 이가 몇 안 되는 고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비교할 만한 사람을 꼽자면, 예전에 글쓴 적 있는 연암 박지원 정도? 하지만 박지원의 '자뻑'이 현실에 대한 지학이 역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면, 아시모프의 '자뻑'은 당당한 자신의 성취를 내세우는 것이다.
  아시모프가 돈을 벌기 위해 쓴 짤막한 단편은, 세상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의 위대한 상상력 때문일까?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은 좀 덜 떨어지고 빈약해 보이는 나조차도, 아주 사소한 일 하나로 세상의 모습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폭풍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데이빗 보위는 'We can be heroes, just for one day'라고 노래했다. 단 하루만의 영웅. 하지만 그 사소한 행동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 보잘것 없어 보여도 그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도전은 무한히, 인생은 영원히, 말하는 대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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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지적인 종을 발전시킨 행성들 중에서 기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고, 또한 별들 사이의 거리를 넘어 의사소통을 바라는 문명을 가진 행성들의 비율을 알아야만 했다. 모리슨이 말한 바에 따르면 기술이 없는 지적인 종을 상상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기술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기술을 발전시킨 모든 사회가 극초단파를 알 것인가? 캘빈이 말하기를, 전자기 복사(극초단파는 그중 한 형태다)는 생명의 진화에 필수적인 것이다. 호기심이 있고 기술을 갖춘 문명은 복사의 전체 스펙트럼을 탐색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극초단파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술 문명들이 다른 문명과 소통을 하려고 할까? 이것은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1961년의 인류 문명을 그 예로 꼽기는 어려웠다. 오즈마 프로젝트는 외계의 메시지를 들으려는 노력은 했지만 자기들의 메시지를 전파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외계 문명은 텔레비전과 극초단파를 감지할 수는 있겠지만 이 또한 대단히 발전된 도구가 필요했다.


<칼 세이건> 112쪽, 윌리엄 파운드스톤, 동녘사이언스

  미지의 다른 존재와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당장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를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드레이크 방정식을 통해 인류가 인류 외의 문명과 만날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들은 과연 외계인을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을까? 우리가 소위 'UFO체험 경험담(예를 들어 제3종 근접조우 같은 거라든가)'을 통해 알고 있는 인간형 외계인의 형태가 아닐 가능성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개인적으로는 그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본다)
  만약 외계인이 돌멩이라면?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돌멩이라면? 돌멩이로서 가진 특유의 의사소통 방식을 가지고, 엄연히 지성이 존재하는 그런 존재라면? 인류는 과연 그 돌멩이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까? 마음을 나누고 진심으로 교류할 수 있을까? 한때 이런 생각의 일부를 가지고 단편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통에 대한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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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선택곡 중에서 베리의 곡이 가장 주목을 끌었다. 로큰롤을 우주로 보내는 데 반대하는 숨은 보수주의자들이 있었다. 그것이 훌륭하고 오래된 곡이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베리가 감옥에 간 적이 있고, 소득세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다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1979년에 그를 감옥으로 보낸 상당히 '독창적인' 이유다.) 이런 논쟁이 코미디 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에 영감을 주었다. 거기에는 우주로부터 네 낱말의 메시지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베리의 곡을 더 보내주오'였다.


<칼 세이건> 418쪽, 윌리엄 파운드스톤, 동녘사이언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라는 것은 무섭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선입견에 맞춰서 사물을 재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이다. 과연 이 편견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주로 보내는 인류를 대표하는 곡에 척 베리의 로큰롤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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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경이 제 목표의 반을 채운 날 밤에, 갑작스런 심한 근육통을 앓았다. 가슴의 근육이 저려 숨을 반도 채 못 쉬는 꼴이라, 밤새도록 무경은 죽는다고 고함과 울음을 섞는 소리를 내었다. 아침이 되어 여전히 가슴의 고통에 헐떡거리다가, 문득 무경이 말했다.
  "백 일을 기한으로 둔 일은 천 일을 기한에 둔 일에 비하면 사소할 것이고, 만 일을 기한으로 둔 일과의 차이는 그야말로 아득할 것이다. 그러나 백 일의 한가운데에 뜻하지 않는 고통이 찾아오니, 어떤 목표를 두었건 그 기한이 대수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이는 마음의 간사함이 아니겠는가! 당장의 고통이 과연 처음 먹었던 결심보다도 더욱 커다랗단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단지 당장의 마음이 고통을 결심보다 크게 비추고 있을 뿐이다. 아! 이로서 일을 하는 방법 하나를 알았다. 그저 꾸준함만이 최고의 미덕이요, 진득함이 최고의 선이었던 것이로구나!"
  아픈 가슴팍을 움켜잡은 채,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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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나 수행을 하다 보면 하기 싫고 꾀가 날 때가 있다. 그렇게 몸뚱이 하나 꼼짝하기 싫을 때 그 마음을 누르고 기도를 하면 기도에 힘이 생긴다. 어렵고 힘들다고 한 번 물러서면 두 번 물러서게 되는 것이고 오늘 할 일을 못하면 내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영원히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를 하다 어려운 고비가 생기는 것을 불교에서는 마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돌아보면 마장은 결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무너지는 건 내 마음이다. 세상을 속이기 전에 자신을 먼저 속이고 세상과 타협하기 전에 자신과 먼저 타협하는 것이다. 기도의 성취가 나 자신에게 달린 것처럼 마장을 극복하는 것도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 달렸다.
  드디어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오백 일이 되던 날, 기도를 마치고 신도들을 향해 삼배를 했다. 내가 절을 하자 당황한 신도들이 황급히 일어나 절을 했다. '여러분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내 말에 신도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스님은 사춘기> 236쪽, 명진 스님, 이솔출판

  100일을 기약하고 시작한 이 글쓰기가 오늘로 50일이 되었다. 이 책의 위 글은, 그 중에서 마지막 문단은, 내가 이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고 50일이 되면 옮겨 보려고 생각한 글이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막상 나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그 위의 문단들이다.
  나는 이 글쓰기를 언제나 진지하게 해 왔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기꺼이 예, 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때로는 무성의하게, 때로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때로는 전전긍긍하면서 써 온 적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매일매일 꾸준하게 쓰기'라는 목적은 지켜오려고 애써왔고, 지금 일단 반 오는 동안 그 목적에는 어긋남 없이 해 왔다.
  나는 이 글쓰기를 언제나 진지하게 해 왔는가? 다시 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아니오, 라고 답한다. 나는 한 번이라도 이 글쓰기를 진지하게 한 적이 있는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나는 적어도 이 질문만큼은 당당히 예,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남은 50일 동안은, 더욱 더 당당하게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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