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메가테러리즘은, 최대한 많은 인명을 살해함으로써 사회를 공포와 충격으로 몰아넣는 최근의 테러리즘의 경향을 가리키는 단어다. 주지하듯이 과거의 테러리즘에서는 인명 희생이 부수적인 것이었다. 즉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폭력을 통해 사회의 관심을 끌고자 했을 뿐,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를 원하지는 않았다. 한 국가의 국경 내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테러리즘의 경우 테러리스트들은 보통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해 지역 주민 다수의 지지를 염두에 두었고, 따라서 이 지지를 훼손할 인명 살상을 의도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서 일어나는 오늘날의 지구화 시대의 테러리즘은 과거와는 명백히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 새로운 테러리즘은 자신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설정한 사회를 충격과 공포의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그 사회의 정치 권력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등장하는 것을 의도한다.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의 무차별적 인명 살상은 사회를 공황 상태로 몰아넣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테러 행위의 목표 자체가 된다. 9·11 테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러한 테러리즘의 극단적인 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은 9·11 테러 훨씬 이전부터 등장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 19쪽, 구춘권, 책세상

  노르웨이 테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위 글에서 말한 메가테러리즘의 모습과 무척 흡사하다는 점에서, 위 글을 인용해 본다. 자신의 주장을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회 자체를 공격하려는 목적으로 변한(차마 '진화한'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못하겠다. 이런 걸 진화라 할 수 있을까?) 테러리즘의 모습은, 노르웨이의 테러를 통해 더 이상 세계 속에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알리고 말았다.
  과연 이런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은 그들의 생각 같은 걸 알고 싶지도 않다는 마음이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 그들이 저지른 것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과연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테러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다양한 주장이 서로 존중받으면서 비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그저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일 뿐인가? 비극적인 현실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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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머리가 매우 좋은데다가 공부도 열심히 한다. 크면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 됐지만 벌써 어른에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매일 착실히 노트에 많은 것을 기록하고 책도 많이 읽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싶은 것이 많다. 우주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 생물이나 바다나 로봇에도 관심이 있다. 역사도 좋아하고 훌륭한 사람의 전기 같은 것도 좋아한다. 차고에서 로봇도 만들어봤고 '해변의 카페' 야마구치 씨의 천체 망원경으로 천체 관측도 해봤다. 바다는 아직 본 적이 없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탐험하러 갈 계획이다. 실물을 보는 건 중요한 일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오늘 계산해보니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3000 하고도 888일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나는 3000 하고도 888일을 나날이 훌륭해지는 거다. 그날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훌륭해져 있을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 너무 훌륭해져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모두들 깜짝 놀랄 거다. 결혼해달라는 여자도 많겠지. 하지만 나는 벌써 상대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결혼해 줄 수 없다.
  미안하긴 하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펭귄 하이웨이> 9~10쪽, 모리미 토미히코(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정신

  잠자려고 눕기 전에 그냥 책을 폈고, 책을 다 읽고,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책을 보고 난 뒤인데, 피곤은 잠깐 뒤로 미루는 게 마땅하리라.
  이 책에 대해서는 감히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작가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일 것이라 생각하고('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막상막하, 어쩌면 조금 더 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올해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데 감사드려야 할 거 같다. 누구에게? 글쎄, 펭귄에게라도?
  위 인용문의 '초딩'은 무척 건방져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초딩이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니, 매일을 어제보다 더 훌륭해지려고 노력하는 아이가, 심지어는 어른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나는 충분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주인공 초딩이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인정해 줄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굳이 말하자면,(이것도 상당히 심각한 스포일러일 거 같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솔라리스'다. 책날개 띠지의 문구를 적당히 가공했다고 화내지 마시길. 정말로 이 말만큼 어울리는 표현을 찾기 힘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꼭 읽어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읽어봐 달라고 조용히 청하고 싶다. 피곤에 절어 있는 사람이 피곤조차 참아가며 횡설수설 글을 써 내려가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어주시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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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하이웨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1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밝고, 재미있고, 눈물 찔끔 나는 소설. 이런 책을 추천 안하면 무슨 책을 추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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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로 재주재를 삼고 기독으로 대원수, 성신으로 검을 삼고 믿음으로 방패를 삼'는다는 군사주의적 수사학은 기독교 중에서도 구세군의 교리와 깊은 친연성을 보이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교파와의 연관성이라기보다 민족 담론에서 기독교를 흡수하는 방식이 얼마나 전투적이고 격정적인 것인가를 이 글이 잘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민족 담론은 기독교가 담지한 종교적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충전받고자 했던 것일 터, 결국 종교적 교리와 민족주의의 결합은 민족이라는 표상을 초월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민족이라는 초월자는 신과 결부된 존재,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어떤 존재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각인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와 더불어 기독교는 민족주의에 청교도적 결벽증을 부여한다. 위의 자료에서도 언급되듯이, 기독교적 논리에 입각하면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도 죄지만, 나라를 빼앗긴것도 죄가 된다-'죄의식', '원죄'라는 관념의 등장. 따라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전 국민이 회개하여 속죄하는 일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국권회복투쟁과 속죄의식의 결합이라?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47~48쪽, 고미숙, 책세상

  솔직히 말해, 이 책의 필자 자체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을 들뢰즈로만 보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무척 흥미롭다. 약간의 들뢰즈 냄새가 풍기는 것을 감수하고 읽는다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민족이라는 담론이 어떻게 종교적인 관념과 결합을 하는가에 대한 이 논의는,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기독교 극우주의자가 '민족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활동하면,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테러와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의 테러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길게 말하기에는 나의 생각이 부족하다. 다만 민족과 종교라는 '성스러움'을 핑계삼아 희생당해야 했던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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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정체성을 고립주의 관점에서 축소화하는 일이 초래하는 결과는 광범위하다. 사람들을 독보적으로 굳어진 범주로 나누기 위해 끌어들인 환영은 집단 간 투쟁을 선동하는 토대로 이용될 수 있다. 물론, 고급 이론들이 문명에 따른 분할이나 공동체주의적 틀 속에 감금하기와 같은 고립주의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더라도 어떻게든 대결의 씨앗을 뿌리려는 목적을 지닌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정반대다. 예를 들어 "문명의 충돌" 이론이 제시되고 장려될 떄, 그 목적은 이미 현존하고 있는 현실로서 간주되는 것을 식별하는 것이며(나는 이것이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되지만, 연구 동기나 추진력과는 별개의 쟁점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론가들도 스스로를 대결을 야기하거나 가중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결의 실체를 "밝혀내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이론은 사회사상과 정치 활동,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을 단일 정체성 속으로 인위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세계를 편 가르는 결과를 낳고 세계를 잠재적으로 훨씬 더 선동적이게끔 만들 수 있다. 예컨대 인도를 앞에서 언급한 "힌두 문명"으로 특정하는 환원주의적 관점은 이른바 힌두트바 운동의 종파적 행동주의자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아왔다. 실제로, 이런 행동주의 운동은 당연히 인도에 대한 자신들의 축소된 관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개념적 범주화라면 어느 것이든 끌어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이 운동의 극단주의 분파는 2002년 구자라트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를 조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결국 그 희생자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다. 이론은 현실에서 실제로 접했을 때 이론가들 스스로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가끔 있다. 그리고 그 이론들이 개념적으로 혼동될 뿐만 아니라 종파적 배타성을 강조하기 위해 쉽게 이용될 수 있을 때, 이론은 사회적 대결과 폭력을 이끄는 이들에게서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의 배타성을 주장하는 이론이 무슬림들이 가진 (자신의 종교적 소속 관계 외의) 다른 모든 정체성의 타당성을 무시하는 일과 결합되면, 폭력 버전의 지하드를 지지하는 개념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지하드는 평화를 위한 노력과 격렬한 선동 둘 다를 위해 호출될 수 있는 유연한 용어다.).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오도되어 불리는 것의 최근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경로를 이용해 폭력을 조장한 경우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무실림이 가진 상이한 정체성들, 예컨대 학자,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역사가, 건축가, 화가, 음악가, 작가로서의 상이한 무슬림 정체성들이 역사적으로 풍요로웠던 것은 무슬림이 과거에 이룬 성취에 (그리고 3~6장에서 이미 논의된 바 있는 세계적 유산에) 크게 공헌했으나, (이론의 도움을 약간 받아) 호전적 종교 정체성만을 외곬으로 옹호하는 주장들이 이를 압도하면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체성과 폭력> 281~283쪽, 아마르티아 센(아마티아 센), 바이북스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의 범인에 대해, 외국의 한 언론에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쓴 것들에서 단어 몇 가지를 바꾸면, 오사마 빈 라덴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범인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라고 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명의 대결' 구도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지고 싸우는 존재가 아닌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누군가 말한 바 있는 '극우와 극좌는 서로 같다'는 언술이 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하지만, 의견을 아주 극한으로, 골수적으로 밀어붙이면 그 결과는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극우에서 극좌로, 혹은 극좌에서 극우로의 전향은 그래서 쉽다는 듯 하다. 자신이 사용해 온 단어 몇 가지만 바꾸면 되니 말이다. 아, 이러한 모습을 나는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들.
  나는 세상에 보편적이고 참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즉 다시 말해 세상에 보편적으로 그릇된 이야기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한다면, 이번 노르웨이 테러 사건과 2001년 9월 11일의 테러는, 그러한 '보편적으로 그릇된' 무언가의 편린일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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