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나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이 존재하는 독립국가에서 대기근이라 부를 만한 사태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대기근이 실제로 발생했던 곳은 고대왕국이나 현대의 권위주의적인 사회, 또 원시적인 부족공동체와 근대적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 집단)에 의한 독재체제, 선진국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경제, 전제국가의 지도자 또는 편협한 일당독재체제에 놓인 신흥 독립국가들입니다.
  이와 반대로 정기적인 선거가 치러지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야당이 존재하고, 대규모의 언론검열도 없으며 정부정책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보도의 자유가 있는 민주적인 독립국가에서는 대기근이 본격화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현 시점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한 나라는 딱 두 군데가 있습니다. 당연히 북한과 아프리카의 수단은 전형적으로 권위주의체제가 지배하고 있지요.


<센코노믹스,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 82쪽, 아마티아 센, 갈라파고스

  국론이 서로 나뉘어 나라가 시끌시끌하면 혹자는 문득 탄식하며 말한다. "저 비열하고 무식한 자들이 나라를 망친다."라고. 때로는 비분강개해하며 "내가 권력을 잡았다면 저런 자들은 당장 감옥에 가두고 혼쭐을 낼 텐데."라고 통분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쓴소리 없는 나라는 결국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국론의 분열 없이, 최고 지도자의 통치 아래 낙원마냥 행복하다는 어느 나라의 국민 대다수는 배를 굶주리고 있다. 배고픔이 그들의 행복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라 안이 시끄러울수록 나라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다고 안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세상이 하나된 의견으로 모아져 행복함으로 가득 차기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나와 그대의 생각이 다르다면, 결국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뻔한 소리 말고는 정말로 다른 의견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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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뜨자 백아伯牙는 자신의 금琴을 끌어안고 장차 뉘를 향해 연주하며 뉘로 하여금 감상케 하겠나? 그러니 허리춤에 찼던 칼을 뽑아 단번에 그 다섯 줄을 끊어 버려 쨍 하는 소리가 날밖에. 그러고 나서 자르고, 끊고, 냅다 치고, 박살내고, 깨부수고, 발로 밟아, 몽땅 아궁이에 쓸어 넣고선 불살라 버린 후에야 겨우 성에 찼다네. 그리고는 스스로 물었다네.
  "속이 시원하냐?"
  "그래 시원하다."
  "엉엉 울고 싶겠지?"
  "그래, 엉엉 울고 싶다."
  그러자 울음소리가 천지를 가득 메워 마치 종소리와 경쇠 소리가 울리는 것 같고, 흐르는 눈물은 앞섶에 뚝뚝 떨어져 큰 구슬 같은데, 눈물을 드리운 채 눈을 들어 바라보면 빈산엔 사람 하나 없고 물은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었다네.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박지원, <연암을 읽는다> 280쪽에서 재인용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다지도 슬프고 원통한 일이란 말인가? 내가 내가 아니게 되고 나의 존재가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박지원의 표현을 보아 느끼자면 천하에 비할 바 없는 슬픔이다.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나 혼자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조차도 그 모습을 보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나의 모습을 만들어 주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와 나의 주변, 나와 사람들, 그들이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 준다.
  뜻하지 않게 어떤 이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이를 안다는 것을 그 이는 평생 몰랐으리라. 그러나 그 이의 삶을 문득 아주 약간이나마 지켜보았던 인연으로, 그 이의 참된 모습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이를 알았다는 사실이 내 모습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도 더불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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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온 세상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한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였다.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몸을 닦았다. 자신의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였다. 자신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앎을 극한까지 확충시켰다. 그와 같은 앎의 확충은 사물을 탐구하는 데 있다.


<대학·중용> 61쪽, 주희 엮음, 김미영 옮김, 홍익출판사

  위 글은 <대학>의 경1장의 내용 중 일부이다. 흔히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알려진 내용을 조금 더 구체화시켰다. 다시 말해 수신, 즉 자기 몸을 닦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사물을 탐구하여 알아 나가고 그렇게 의지를 쌓아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앎이 자신을 지탱하는 모양새'이다. 여기서의 앎은 결국 사물의 본모습에 대한 자신의 가치부여가 아닐까? 나와 사물의 관계,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이러한 관계 사이에서의 나의 모습. 이러한 생각들이 이어져 나가 마침내 분명한 답에 닿을 때 자기 몸이 닦이고, 그걸로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 진행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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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道의 옳고 그름(是非), 일의 이익과 손해(利害)는 병립할 수 없습니다. 이해만 따지고 시비를 중시하지 않으면 일을 옳게 처리할 수 없고, 시비만 따지고 이해의 소재를 강구하지 않으면 변고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권이란 중도를 얻는 것이 중요하고 의란 마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중도를 얻고 마땅하게 한다면 하는 일이 모두 옳고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비도 명백하지 않고 이해도 분별하게 어려운 것이어서 선택하기 어렵다면, 일의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을 살피면 됩니다. 나라는 근본에 힘써야 하며, 일은 요령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에 힘쓴다는 것은 안을 중요시 여기고 밖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요령을 안다는 것은 두 가지 중에서 중도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 가지 일은 이쪽이 옳으면 저쪽이 그르고, 한편이 유리하면 다른 한편이 해롭지만, 거기에 경중과 완급이 있을 것입니다.


<율곡문답> 115~116쪽, 김태완, 역사비평사

  위 글은 율곡 이이가 책문으로 제시한 글의 일부이다. 책문은 일종의 과거시험 답안지이다. 주어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견해를 드러내는 글인 것이다. 이 책문의 문제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라 안의 일곱 가지 큰 현안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율곡은 책문의 서두에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이 글을 단지 답안의 일부로만 볼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이는 일을 처리하는 보편적인 처리 기준을 제시하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처리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의 핵심이 되는 생각, 다시 말해 이념일 것이다. 이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엇이 가장 근본적이고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이라고 하면 될까?
  결국 나에게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무거우며, 무엇이 느슨하고 무엇이 급한가를 세우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워지고 난 뒤에, 세상을 향한 일을 시작함에 오점을 크게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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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나무는 완전히 멸종된 줄 알았던 라무스 마니아Ramus mania라는 야생 커피나무의 일종이었다.
(중략)
  그 나무는 왕래가 많은 길가에 있었고, 로드리게스에서는 모든 나무를 땔감으로 여겼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베어가지 못하도록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특별한 나무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울타리를 넘어가 가지를 잘라내고 잎을 따고 나무껍질을 벗겨갔다. 이런 대우를 받는 걸 보면 특별한 나무인 게 틀림없었고, 그러니 특별한 효험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조금씩 떼어갔다. 숙취가 사라진대, 임질에 특효약이래. 로드리게스에서는 집에서 뒹구는 것 외에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기 때문에 다들 이 나무를 보러왔고, 그렇게 조금씩 잘라가고 꺾어가다 보니 금세 시름시름 죽어갔다.
  첫 번째 울타리가 소용이 없다고 판명되자 이번엔 주변에 가시철망을 둘렀다. 그리고 첫 번째 철망 주변에 두 번째 철망을 두르고, 두 번째 주변에 세 번째 철망을 두르면서 울타리가 반 에이커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나무를 지킬 관리인도 임명했다.
  큐 왕립식물원에서는 하나 남은 나무에서 잘라낸 부분으로 뿌리를 내려 두 그루를 새로 육성한 후 야생에 다시 옮겨 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는 철망 바리케이드를 두른 이 한 그루만이 지구상에서 자신의 종을 대표하는 유일한 나무로 남을 것이며, 한 조각을 떼어 갖겠다고 나무를 죽이려드는 사람들로부터 계속 보호해야 할 것이다. 도도가 멸종한 탓에 우리는 더 슬프고 더 현명해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단지 더 슬프고 정보만 많아졌을 뿐이라는 증거들도 산적하다.


<마지막 기회라니?> 329~330쪽, 더글러스 애덤스, 마크 카워다인, 홍시

  "환경이 밥 먹여주나?"라는 논리(혹은 주장)를 듣곤 한다. 조금 세련되게 말해 보자면, "환경의 파괴로 발생하는 비용보다 그 파괴의 산물로 얻을 수 있는 편익이 크다면 환경 파괴도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환경 파괴라는 것이 과대평가된 위험이라고 주장한다. 환경 파괴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지구 온난화의 피해는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고, 그 피해조차도 발전한 과학의 힘으로 수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부끄럽지만 나는 과학에 대한 앎이 부족한지라 어느 쪽의 말이 맞을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고작 나무 한 그루 가지고?"라는 말로 위 글을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나 남은 나무를 재생시키려는 시도는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저 한 그루 남은 나무를 재생시키려는 시도는 우리 인류의 삶이 좀 더 다양해지기 위한 의미가 있다. 모두가 판검사나 의사가 되는 세상보다는 다양한 직업이 있는 세상이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일 것이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 추정하는 공식에서 잔차(residual) 항목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공식과 실제 데이터 사이의 차이가 바로 이 잔차이다. 이 잔차의 존재는 어쩌면 추상화된 공식과 실제 현실이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화는 생각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단순하게 만든 세상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은 더 다양하고 '현실같기' 위해서, 나는 저 한 그루 남은 나무가 처한 운명을 슬퍼하고, 나무의 번식이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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