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자책] 아버지는 말하셨지
송정림.손정연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했다.
송자매 작가의 아버지는 시기적절하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 분 같았다. 이 가르침들은 앞으로 계속 생각날 것이고 나뿐 아니라 내 아이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칠 것 같다.
이렇게 삶에 도움이 되는 명대사를 남기신 아버지와 달리 내 아버지는 거의 대부분 침묵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더 깊이 생각해보니 우리 아버지는 ‘침묵’으로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침묵이 말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 침묵도 말이다.)
우리 아버지도 송자매 작가의 아버지처럼 새벽같이 일어나시는 분이셨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우리에게 일어나라 창문 열어라 청소해라 등등의 잔소리를 한 적이 없으셨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린 그냥 아버지가 벌써 일어나셨다는 사실, 이방 저방 창문을 열고 다니시는 인기척, 마루에서 들리는 아버지 발소리만으로도 벌떡 깨어났고 긴장했고 1분도 더 길게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우린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의 눈빛을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아버지가 무얼 원하는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았다.
그렇게 어렵기만 했던 우리 아버지…….
나는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아침에 엄마한테 꾸지람을 듣고 시무룩한 얼굴로 등교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 공장에서 올라오시는 아버지와 길 한복판에서 딱 마주칠 때도 있었다. 당연히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나는 어렵고 무서운 아버지에게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아버지 앞을 빨리 지나가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불러세운 뒤 주머니를 뒤적여 건네던 이천원 혹은 삼천원.
지금 생각하니 그건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아버지 몸 안에 들어 있던 ‘말씀’이었다.
큰애야 너 엄마한테 또 잔소리를 들었니? 엄만 네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기대감이 있어서 그런 거야. 너무 섭섭해 하지 말고 그거 때문에 하루종일 우울해하지 말렴. 자 이것 갖고 가서 쉬는 시간에 소보로 빵이라도 사먹어. 그렇게 어깨 축 쳐져 있지 말고, 힘내!
아버지는 조곤조곤 아마도 나에게 그런 말씀을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끝까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지금껏 우리 삼남매는 아버지에게서 단 한 번도 부드럽거나 상냥한 위로의말을 듣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팔십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성격이 바뀌시겠는가. 술이 억수로 취하신다면? 단언컨대, 그래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그런 아버지 앞에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 뭔가를 물어본 적은 있는지?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셨고 십대에 전쟁을 겪었다는 것만 알 뿐, 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무엇을 하고 지내셨는지 청소년기에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런 걸 들은 적도 물어본 적도 궁금해 한 적도 없었다.
송자매 작가의 아버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 아버지의 침묵어법에 대해 생각했고 내 아버지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자식에게 분명 뭔가 할말이 있으셔서 불러다 앉히셨지만 한참을 침묵하셨고 종내엔 창문만 활짝 열어젖히시더라는 작가의 아버지. 그래도 작가는 그때 그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읽었다!
돌아보니 그렇다. 등교하는 딸에게 돈 천원을 건네주면서 내 아버지도 분명 말을 하셨다. 지나온 시간들 속엔 그런 추억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지 못했고 반추하지 못한 추억은 바람처럼 나를 그냥 쓸고 지나갔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내게 건네던 아버지의 말씀을 무심하게 날려보냈던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내 아버지의 말씀은 얼마나 많을까.
이 책은 그런 깨달음을 주었다. 부끄러웠고 한편 그러한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단지 이 말을 되뇌어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괸다.
많이 배우지 않았으나 참으로 명민하신 분, 끊임없이 일하면서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분. 그러나 어찌 그리도 생활은 곤핍하기만 했던지. 마침내 병든 아내를 떠나보냈고 집도 일터도 잃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지옥 같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그 불바다 같은 시절을 맨몸으로 건너오셨다.
이 책에 적힌 주옥같은 아버지의 말씀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미처 하지 못한 말씀이라 생각하며 들었다. 귀한 보약을 챙겨먹은 기분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의 명언들로 인해 나는 앞으로 더 지혜롭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 아버지가 침묵 속에서 건네고자 했던 말씀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의 깊디깊은 속마음을 읽는 일. 이제라도 나는 그것에 집중하고 싶다. 지천명이란 침묵도 읽을 수 있는 나이일 테니까.
아버지,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