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클라라 하스킬 - 앨범 컬렉션 [10C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앙세르메 (Ernest Ans / Documents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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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하스킬이 남긴 너무나 값진 음악적 유산을 이렇게 염가의 박스셋트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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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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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그는 나에게 2000년대 초반 한뜻이라는 생소한 출판사에서 나왔던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이라는 소설로 처음 알게 된 작가이다. 성적호기심과 수치심이 동시에 무조건반사하던 20대 초반이었던 나였기에 제목만 보면 들고 서 있기 창피한 심정이 드는 제목이었기에 읽을까 말까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당시 내가 존중하던 선배 N형이 말하기를, 야한 소설이나 허섭한 소설이 아니고, 현대여성의 사랑에 관한 '지적인 탐구'가 담겨 있는 작품이라기에 마음을 고쳐 먹고 읽기 시작했다. 그 소설이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이었다. 재미있게 읽었으나, 곧 그를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한 이름의 작가가 알랭 드 보통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소비되기 시작했다. 너무 인기가 많아지니까 그냥 쳐다보기도 싫었다고 할까. 한동안 알랭 드 보통의 인기가 가실 무렵, 그의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원제 Romantic movement))가 [우리는 사랑일까]라는 다른 제목으로 번역되어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난 후, 이제서야 보통의 에세이를 몇 권 구해서 비로소 한 권씩 다시 읽기 시작했다.

 

먼저 손에 쥐게 된 작품이 [불안 Status Anxiety](정영목 옮김, 이레, 2005)였다. 현대인의 '불안'을 주제로 한 이 에세이는 크게 '원인'과 '해법'이라는 두 덩이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1부에 해당하는 원인 편에서는, 인간이 불안한 상태로 머물게 된 요인을 역사와 철학에서 찾아내고,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와 인정투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은 '사랑결핍'과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 불안상태를 지속시켜주는 주 요인으로 꼽고 있는데, 그럴싸하다.

 

그렇다면 그가 또 해법의 묘책으로 내어놓는 것은 이렇다. '철학'과 '예술', '정치', '기독교', 끝으로 '보헤미아'인데, 개인적으로는 보헤미아가 이 나이에, 의외로, 다시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상상력을 자양분으로 삼고, 상업적 성공을 배척하는 자유로운 영혼들! 옛 생각이 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면 지금부터 인상적인 구절들을 쭈욱 옮겨보겠다.

 

1부 원인

ㅡ따라서 물질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관점에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는지 결정한다. (22~23쪽, 사랑결핍)

ㅡ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29쪽, 속물근성)

ㅡ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35쪽, 속물근성)

ㅡ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56쪽, 기대)

ㅡ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59쪽, 기대)

ㅡ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80쪽, 기대)

ㅡ능력주의 시대를 맞아 정의는 부만이 아니라 빈곤의 분배에도 관여하게 된 것이다. (112쪽, 능력주의)

ㅡ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119쪽, 능력주의)

ㅡ노동과 자본 사이의 투쟁은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이제 마르크스 시절처럼 맹렬하지 않다. 그러나 노동 조건의 향상과 고용 입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행복이나 경제적 복지가 부차적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과정에서 도구 노릇을 하고 있다. (142쪽, 불확실성)

 

2부 해법

ㅡ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이것은 오만, 잔혹, 허세에 대하여, 미덕과 양식으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222쪽, 예술)

ㅡ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224쪽, 예술)

ㅡ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 광고는 또 어떤 물품이라도 우리의 행복 수준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268~269쪽, 정치)

ㅡ이데올로기 진술이란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전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277~278쪽, 정치)

ㅡ"부르주아지를 증오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그렇게 썼다. (354쪽, 보헤미아)

ㅡ소로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 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 보헤미아의 역사에는 그들의 우정으로 유명해진 장소의 이름들이 찬란하게 빛난다. 몽파르나스, 블룸스베리, 첼시, 그리니치빌리지, 베니스 비치. (......) 보헤미안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업적 성공 능력보다 어떤 사람의 윤리와 상상력의 한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시도 없다. (363~366쪽, 보헤미아)

ㅡ위대하고 독창적인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하는 것, 아니 더 나아가서 그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과 동의어였다. (373쪽, 보헤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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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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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영국의 여류 소설가 도리스 레싱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다섯째 아이](정덕애 옮김, 민음사, 1999, 첫 출간년도 1988)의 주요 테마는 가족이다.

    삶에 대해 신중하며 도덕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결혼해서, 아이를 여럿 낳고, 포근한 가정을 만들어 가족-친지-이웃과 함께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며 살기를 소원한다. 그들은 가족에 대해서 구시대적 가치를 옹호한다. 사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형편이 아주 넉넉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교외에 얻은 커다란 집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의 모범적인 상을 만들어내는 기쁨으로 인해 기꺼이 감내한다. 덕분에 한동안은 이 부부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기쁨으로 충만하며, "우리가 원하던 게 바로 이런 삶이었지.", 라고 누구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 벤을 낳으면서부터 모든 것들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벤은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적절하지 못한 아이였다. 한마디로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아이라고 보이지 않는 아이가 태어났다. 

    벤의 출생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강아지를 죽일 수 있는 괴물같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특단의 조치로 벤을 돌봐줄 수 있는 곳으로 보내는데, 어느 날 해리엇은 벤을 그렇게 버렸다는 자책감으로 그 수용소를 찾는다. 인간으로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수시로 약물주사를 맞고 있던 벤은 오래 살 수 없는 상태였다. 해리엇의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선택으로 집으로 다시 데려오게 되고 대신 세 아이가 집을 떠나게 된다.

    그 이후로도 순탄한 순간이 없이 계속해서 해리엇은 모든 신경을 벤에게만 쏟아야만 한다. 결국 데이비드도 일에만 몰두하는 아주 범상한 도시의 인간으로 변해버렸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 큰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가족에 대한 얘기라고만 생각했으나, 벤의 출생 이후 인생에 있어 예상할 수 없는 결과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기괴한 존재가 탄생이 가능하다는 심리적 공포감을 동시에 주고 있기 때문에 벤의 출생 이후 전체적인 맥을 잡는 게 솔직히 불가능해져버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기억하고 싶은 지점은,
    33쪽,
    "그건 중요해요. 모든 사람은 각자 방이 하나씩 있어야 해요."
라고 얘기한 데이비드의 말이다. 방이 있어야만이 비로소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존재감에 대해 느낄 수 있다는 공감이 들어서이다.
    또, 벤의 상태를 진단받기 위해 해리엇이 도시의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진술한 대목이다.
    144쪽,
    그 애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 애는 그녀 옆에 바싹 붙었다. 아니, 어머니 옆에 선 아이처럼이 아니라 겁에 질린 개처럼.

    이 소설은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올려본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상 외로 나는 곳곳에서 상황설정이 너무나 웃겨서 몇번이고 크게 웃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반응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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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로 가는 길
앙드레 말로 지음, 김붕구 옮김 / 지식공작소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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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말로의 [왕도로 가는 길](김붕구 옮김, 지식공작소, 2001)는 형식상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클로드와 페르캉이라는 두 인물을 축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미개척된 오래된 사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두 인물이 왕도를 찾아가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돈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삶에 대한 회의 끝에 내려진 현실적 이상적 대안이라 보여진다. 둘 다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고, 남은 것은 삶에 대응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게 자신의 인간존재를 증명하는 길이다. 오래된 사원에서 발견한 조각품을 떡하니 내보이며 무언가 보상을 받길 원하는 클로드나,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부락들을 정부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무기를 사려는 페르캉이나, 지독한 자기증명에 대한 염원을 실현시키려 몸부림치는 것이다.

탐험대로 원주민들도 꺼리는 밀림 속을 헤맨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가까이 두고 그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조건 하에 클로드와 페르캉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중에 이 부분이 작가 앙드레 말로가 이야기하려는 중요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흠...... 그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심정을 알 수 있겠어요......"
    "그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당하는 거야. 죽음이란 그가 아직 모르는 거니까. 그렇지만 대가리에 총을 한 방 맞고 뻗는다는 건 문제없단 말이야!" 이어 그는 목소릴 낮추며, "그러나 배에 한 방 얻어맞는다는 건 벌써 약간 불안스러운 노릇이지. 시간을 끄니까 말이야. 나와 마찬가지로 자네도 인생이 아무 뜻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지. 사람이란 외로이 살면 자기 운명에 대한 집념을 벗어날 수 없는 법이지...... 그때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는 거야, 마치 뭐랄까...... 마치 삶의 부조리의 피할 수 없는 증거인 양......"
    "누구에게나 다 그렇죠."
    "천만에! 죽음은 아무에게도 없는 거야. 저마다 죽음 앞에 놓인다면 누가 살아갈 수 있겠는가...... 실은 모두가 생각하는...... 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죽임을 당하는 것, 그래, 바로 이걸 생각하고들 있는 거야. 그건 대수롭지 않은 문제지. 그러나 죽음, 이건 문제가 달라. 그것과는 정반대야. 자네는 아직 너무 젊지만 내가 그걸 깨달은 건 어떤 여자가ㅡ결국 한 여자에 불과하지만ㅡ차츰 늙어가는 꼴을 보았을 때야. 응, 사라 이야긴 먼저 자네에게 한 일이 있지...... 그 다음엔 마치 그 죽음의 예고만으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내가 생전 처음으로 계집 앞에서 성적 불능을 나타냈을 때......"
    한 마디 한 마디가 속에서 끈덕지게 얽히고 잡아당기는 수많은 뿌리를 끊고서야 겨우 겉으로 뽑혀 나오듯이 입밖으로 뜯겨 나오는 말들이다. 그는 계속한다.
    "그건 죽어 뻗어 있는 시체 앞에서 느끼는 건 절대 아니지...... 늙는다, 바로 그 늙는다는 거야. 더구나 세상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살 때는 말이야. 홀연히 엄습하는 그 파멸의 느낌! 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그건...... 뭐라고 할까? 그건 내 '인간 조건'...... 내가 늙는다는 것, 그 잔인스러운 사실...... 시간이 내 속에서 암처럼 퍼져가고 있다는 사실, 이미 늦어 다시는 취소할 수 없게끔...... 시간, 바로 이거야. 저 모든 더러운 곤충들은 광명에 끌려 우리들의 횃불쪽으로 오는 거야. 저 흰개미들은 그들의 집에 끌려 그 속에서 살고 그러나 난 끌리고 싶진 않아."
(142~143쪽)

결국 무릎에 전침을 맞아서 온몸에 독이 퍼져, 페르캉은 죽음을 맞이하고야 만다. 죽음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을 절박하게 느끼다가 최후의 순간을 맞는 순간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사실 나로서는 인도차이나 주변의 당시 상황이나, 인물들의 생각들이 그대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관념편향의 소설인데다, 전지적 시점이어서 그들의 내면과 거리를 두었기에 읽는 내내 반신반의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인간존재의 조건을 묻고자 하는 인물의 의지가 자못 숭고해 보이는 건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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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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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녕이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로 돌아왔다. 이른 봄에 구입하고 최근까지 묵혀두었다가 며칠 전부터 하루에 한편씩, 마침내 읽었다. 이제는 나이가 중년에 접어들어서인지 예전보다 시선이 더욱 깊어져서, 편편 읽는 과정이 가을볕 아래 잘 여문 과실을 따는 기분이었음을 고백한다.

  표제작 「제비를 기르다」와 「탱자」, 「고래등」, 「편백나무숲 쪽으로」는 소설의 주인공의 기록이기보단, 화자와 관계 맺은 자에 대한 회고에 가까운 소설이다. 그리고 그 관계 맺은 자는 한없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사돈의 팔촌 내로 꼭 한 명은 있을 것 같은 인물이다. 집안의 말썽꺼리일 수도 있고, 세상에 쉽게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인물들에게 윤대녕은 관심을 보인다. 표지 뒤쪽에 신경숙의 글처럼, 그는 사소한 개인을 신화적으로 이끄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어떤 이의 일생도, 윤대녕을 거치면 거대한 인류의 흐름 속에 자리잡은 하나의 역사로 치환되고야 만다. 그것이 윤대녕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제비를 기르다」는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빛의 걸음걸이」나 「천지간」, 「상춘곡」에 비견될만큼 한 가족의 일생을 서사로 담담히 풀어놓고 있는데, 태어날 때부터 제비에 온통 마음을 뺏겨버린 어머니로 인해 가슴 속에 상처를 갖고 있는 아들은,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한다. 초등학교 사학년 때, 가출했다가 하루만에 아버지에게 붙잡힌 채 끌려가 마주쳤던 “문희”라는 술집의 여인을 마음에 두게 된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 군대에서 전역해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한 여학생을 만나고 연정을 품게 되는데, 그의 이름도 문희였다. 하지만 문희는 군에 간 남자친구가 있었고 결국 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훗날, 문희라는 작부집에 다시 찾아가지만 어릴적의 문희는 이미 할머니가 되었고, 그 앞에서 주인공은 끝내 오열한다.

  약간 해묵은 감정도 느껴지고, 「은어낚시통신」의 “상처에 중독된 사람”처럼 자의식 과잉의 대화도 거슬린다. 게다가 제목도 그닥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비에 어머니를 빼앗겨버린 한 소년의 심정은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곡진함에 독자들은 감동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아쉬워하고 있을까. 그에 반해 「탱자」는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던 고모의 제주도 방문이라는 소재로 한 인간의 내력을 잘 전하고 있다. 그리고 회피할 수 없는 부정(父情)이란 테마를 잘 그려낸 「편백나무숲 쪽으로」와 「고래등」도 좋다.

  하지만 실로 내가 좋아하는 윤대녕의 소설은 「연」, 「낙타주머니」, 「못구멍」, 「마루 밑 이야기」처럼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는 인물들을 다루는 소설들이다. “인간의 삶에는 어느 순간 균열이 찾아올 수 있다”고 얘기하던 소설이 초창기 윤대녕의 주된 테마였다면, 최근의 작품에서는 그 틈이 벌어졌을 때도 하루하루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그런 변화가 보다 더 성숙한 시선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국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소설적 인식은 우리들의 삶을 조금 더 견딜만하게 해주는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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