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

 

그는 나에게 2000년대 초반 한뜻이라는 생소한 출판사에서 나왔던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이라는 소설로 처음 알게 된 작가이다. 성적호기심과 수치심이 동시에 무조건반사하던 20대 초반이었던 나였기에 제목만 보면 들고 서 있기 창피한 심정이 드는 제목이었기에 읽을까 말까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당시 내가 존중하던 선배 N형이 말하기를, 야한 소설이나 허섭한 소설이 아니고, 현대여성의 사랑에 관한 '지적인 탐구'가 담겨 있는 작품이라기에 마음을 고쳐 먹고 읽기 시작했다. 그 소설이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이었다. 재미있게 읽었으나, 곧 그를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한 이름의 작가가 알랭 드 보통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소비되기 시작했다. 너무 인기가 많아지니까 그냥 쳐다보기도 싫었다고 할까. 한동안 알랭 드 보통의 인기가 가실 무렵, 그의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원제 Romantic movement))가 [우리는 사랑일까]라는 다른 제목으로 번역되어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난 후, 이제서야 보통의 에세이를 몇 권 구해서 비로소 한 권씩 다시 읽기 시작했다.

 

먼저 손에 쥐게 된 작품이 [불안 Status Anxiety](정영목 옮김, 이레, 2005)였다. 현대인의 '불안'을 주제로 한 이 에세이는 크게 '원인'과 '해법'이라는 두 덩이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1부에 해당하는 원인 편에서는, 인간이 불안한 상태로 머물게 된 요인을 역사와 철학에서 찾아내고,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와 인정투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은 '사랑결핍'과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 불안상태를 지속시켜주는 주 요인으로 꼽고 있는데, 그럴싸하다.

 

그렇다면 그가 또 해법의 묘책으로 내어놓는 것은 이렇다. '철학'과 '예술', '정치', '기독교', 끝으로 '보헤미아'인데, 개인적으로는 보헤미아가 이 나이에, 의외로, 다시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상상력을 자양분으로 삼고, 상업적 성공을 배척하는 자유로운 영혼들! 옛 생각이 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면 지금부터 인상적인 구절들을 쭈욱 옮겨보겠다.

 

1부 원인

ㅡ따라서 물질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관점에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는지 결정한다. (22~23쪽, 사랑결핍)

ㅡ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29쪽, 속물근성)

ㅡ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35쪽, 속물근성)

ㅡ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56쪽, 기대)

ㅡ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59쪽, 기대)

ㅡ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80쪽, 기대)

ㅡ능력주의 시대를 맞아 정의는 부만이 아니라 빈곤의 분배에도 관여하게 된 것이다. (112쪽, 능력주의)

ㅡ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119쪽, 능력주의)

ㅡ노동과 자본 사이의 투쟁은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이제 마르크스 시절처럼 맹렬하지 않다. 그러나 노동 조건의 향상과 고용 입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행복이나 경제적 복지가 부차적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과정에서 도구 노릇을 하고 있다. (142쪽, 불확실성)

 

2부 해법

ㅡ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이것은 오만, 잔혹, 허세에 대하여, 미덕과 양식으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222쪽, 예술)

ㅡ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224쪽, 예술)

ㅡ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 광고는 또 어떤 물품이라도 우리의 행복 수준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268~269쪽, 정치)

ㅡ이데올로기 진술이란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전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277~278쪽, 정치)

ㅡ"부르주아지를 증오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그렇게 썼다. (354쪽, 보헤미아)

ㅡ소로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 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 보헤미아의 역사에는 그들의 우정으로 유명해진 장소의 이름들이 찬란하게 빛난다. 몽파르나스, 블룸스베리, 첼시, 그리니치빌리지, 베니스 비치. (......) 보헤미안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업적 성공 능력보다 어떤 사람의 윤리와 상상력의 한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시도 없다. (363~366쪽, 보헤미아)

ㅡ위대하고 독창적인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하는 것, 아니 더 나아가서 그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과 동의어였다. (373쪽, 보헤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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