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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 자유주의적 우생학 비판 ㅣ 나남신서 553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장은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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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살아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만하는가"에 대한 질문 앞에 어떤 구속력 있는 답변을 얻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삶에 대한 질문의 무게 앞에 우리는 우울하고, 당혹스럽게도, 무능함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학문이나 지식이 올바른 삶에 대한 원리나 원칙을 제시할 수 없다면 학문은 슬픈 것이다. 그렇다고 윤리학의 힘을 빌어 잠언적 형식으로 포착된 '병든 삶으로부터의 반성들'에 만족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이 질문의 무게에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사회는 그 자신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각자의 자유에 충분히 맡겨두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가? 그 문제는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접어두기로 한다. 어쨌든, 정의로운 사회란 각자의 '좋은 삶'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는 능력과 판단에 의해서 각자의 자기이해에서 출발하여, 그 '좋은 삶'을 실현시키고 발전시키려는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고 기대하는 사회일 것이다. 딱히 대한민국이 그런 사회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근시일내에 이루어질 것이라 낙관적으로 보여지지도 않는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고 1929년 생 원로 학자이다. 2009년 뮌스터 대학에서 정년을 마친 송두률교수(이전 김일성대 교수)의 지도교수로도 유명하지만, 송두률교수로 말미암아 위르겐 하버마스의 저서가 1986년까지 금서였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학문적 경직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소통행위 이론에서 공공영역의 개념을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인간은 이성적인 관심사를 쫓고 있으며 이것을 소통을 통해서 수용하고 비평하는 이성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저서는 의사소통의 합리성, 담론 윤리, 보편적 화용론, 의사소통행위 등에 촛점을 맞추고 있어 다양한 분야에서 읽혀질 만하다.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는 배아연구와 PID(착상전 유전자 검사, 책은 독일어 번역이라 PID라고 약어를 쓰고 있지만 영어로는 PGD(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이다.)와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글들은 아래와 같다.
우리가 포괄적인 우리의 관점에서 모두가 서로에 대해 서로서로 부여하는 권리와 의무에 대해 물을 때와, 일인칭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염려하면서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나에 대해'또는'우리에 대해' 가장 좋은 것인가를 물을 때에 '해야한다'는 당위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자신의 안녕과 고난에 관한 그와 같은 윤리적 문제들은 일정한 삶의 역사 또는 특별한 삶의 형식의 맥락안에서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우리는 누구이며 누구이고 싶은지에 대한 정체성에 관한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29쪽)
우리는 삶을 잘 살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좋은 삶'과 도덕적 판단에 대한 물음은 자기 자신의 안녕에 대한 염려에서 유도될 때 올바른 행위의 동기가 효과적인 구속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료한 해답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인간 실존양식의 교란을 느끼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감수할 만한 호모사피엔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고통이라고 한다.
개인은 자신의 개성과 자유를 의식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고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사물화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거리도 획득한다. 그는 숨쉴 틈도 없이 단편들로 쪼개져 버린 생의 익명적 혼돈에서 스스로를 건져 올려 자신의 삶에 연속성과 가시성을 부여한다. ---- 생략
그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자신에게 부과된 하나의 과제로서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또한 그가 스스로를 선택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 생략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의 구조,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의 기획을 성공시키는데 대한 무한한 관심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윤리적 자기반성과 자기선택의 형식이다. 단독자는 하나의 사실로서 주어져 있고 구체적으로 현재화시켜낸 자신의 삶의 역사의 과거를 미래의 행위가능성에 견주어 자기비판적으로 전유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스스로를 비로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격으로 만들고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개인으로 만든다. ----생략
그가 자신의 자유를 통해 설정해 놓은 모든 것은, 그것들이 아무리 우연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그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다. (33-34쪽)
우리가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다면, 지식과 그 이해가 인간의 삶에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고,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웃기도 할 것이고 울기도 할 것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의 통찰은, 우리가 지식의 결핍을 통탄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 만성적 질병을 앓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의지의 타락에 대해 통렬하게 스스로를 비판해야한다는 자성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정신은 깊은 죄의식, 후회를 통해서 자신의 유일한 실존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의 전제조건은 삶이 시작되기 전의 우연성과 조작불가능성이다.
우리는 이제 두 개의 서로 다른 염기서열의 예측불가능한 결합으로 귀결되었던 우연적 생식과정의 조작불가능성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불투명한 우연성은, 그것이 저해되는 순간, 우리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을 위한 필연적인 전제이자 우리의 상호인격적 관계를 위한 근본적으로 평등한 (자연적) 본성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자식의 바람직한 유전적 소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산물로 여기고 그 생산물을 위해 자신의 선호에 따라 적절한 디자인을 기획하게 되는 순간, 그는 자신에 의해 유전적으로 조작된 결과물에 일종의 지배를 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생략
그렇게 되면 자식은 자신의 게몸의 생산자를 고려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자신의 삶의 역사는 유기적 출발상황이 빚어낼, 자신으로서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새로운 책임 묻기의 구조는 인격과 사물의 경계를 허문 결과로 생긴 것이다. (43쪽)
다행히도 니스에서 유럽연합의 기본권 -차르타는 이미 인간생명의 산출과 출생이 자연발생적 조작불가능성이라 지적하고, 그 행위로 인해서 우리의 규범적 자기 이해에 대해서 본질적인 요소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있다. 신체와 정신의 불가침성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차르타의 제 3항은 '우생학 실행, 특히 인격체의 선택을 목표로 하는 그런 실행을 금지'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을 재생산하는 복제의 금지'도 포함하고 있다. (45쪽) 다행이다. 만약에 유전적으로 조작되어 태어난다면 그것이 진정한 나일까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생길 것이며, 나의 행위는 '나'가 만들어낸 행위가 아니라, 유전적으로 조작된 '나'의 프로그래밍의 결과라는 책임회피로 결과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유전적 소질이 과거의 프로그래밍의 결과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있음'을 '신체를 가짐' 위에 두고 그것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식의, 말하자면 실존적 압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자유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자신의 자유는 어떤 자연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과 연관하여 체험된다. 인격체는 자신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자기 행동과 주장의 최종적 원천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기 위해 자기 자신의 유래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시초로 환원시켜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가, 신이나 자연처럼, 다른 인격체의 통제를 벗어나 있을때 단지 그 때에만 자신의 자유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게 되는 바로 그런 시초로 말이다. 출생의 자연성 또한 그와 같이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초에 대한 개념으로 필요한 역할을 충족시킨다.
즉 절대적인 우연성에 의해서 결과되어진 누구도 간섭되지 않은 절대적인 평등성에서 태어난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만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고유한 자신만의 자유로운 결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절묘한 반전에 의한 논리이다. 가슴 속에 간질간질한 희열이 느껴진다. '인간이 자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합리성과 정당성이 뽀도독 뽀도독 돋아나는 느낌이다.
인간의 출생은 그토록이나 중요하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알몸으로 태어나는 것 같은 출생이지만 그와 더불어 주어지는 것은, 세속적인 잣대로 흔히 결론지어 생각할 수 있는 물질적인 환경이외에도, 존재로서 시작하면서 동반되는 수많은 메커니즘이 작용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출생률의 개념은 출생에서 성장하는 의식이 출발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모든 출생과 더불어 이 세계에 나타나는 새로운 시작이 이 세계에서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신생아가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행위를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시작을 한다'는 자발성의 의미 안에 모든 인간 활동들 안에 있는 행위의 요소가 들어 있다. 그러한 사실은 그 활동들이 바로 출생을 통해 이 세계에 왔고 출생률이라는 조건에 종속되어 있는 그런 존재자에 의해 행사되었다는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107쪽)
따라서 자연적 운명의 조작 불가능성은 자유의 의식을 위해 본질적인 조건처럼 보인다. 유전적 프로그래밍은 비대칭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설정하게 하는 것이며, 특이한 부모의 간섭주의가 불결하고도 불길하게 '자유로운 실존의 탄생'에 끼어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그 의도의 결과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감행된 유전자조작의 결과가 지니는 비가역성은 이미 끔찍한 결과를 전조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인격을 혹은 인간의 능력이나 자질을 부모라고 하는 구매자의 욕구나 선호에 의해서 유전적 수퍼마켓에서 미래의 인격체를 선택하게 하는 엽기적인 미래를 꿈꿀 수는 없다.
도덕적 진공 상태, 도데체 도덕적 냉소주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삶의 형식 안에서의 삶은 살 가치가 없을 것이다. (151쪽)
유전자를 조합하여 조작하는 디자이너는 분명히 대상이 되는 태어나기 전의 생명체의 유전자를 전-인격체로 취급하는 대신에 적극적인 우생학으로 고려하여 인간대상을 사물로 간주한다. 이 경우 부모 또는 유전자 디자이너는 자유주의적인 우생학에 경도되어, 자식을 사물로 취급하는 것으로 자식을 희생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게임규칙에서 이기고자하는 제로-섬 게임에 현혹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예' 또는 '아니오' 라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그들의 인격이 다름을 설명하곤 한다. 그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인격체의 태도를 비판하거나 찬탄한다. 인간이 가지는 자유는 주도적으로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이며, 이 때 이미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 실수를 교정하는 능력과 의식을 기대하고 그것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출발의 우연성에서 비롯되는 실수를 허용하는 자유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의 존재를 성장시키고 '나가 나'이게 하는 고유한 특질인 것이다.
2015.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