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까지 길게 길게 그리고 나른하게 햇살이 내리쬐는 도로를 하염없이 달렸다. 멀리서 인천대교가 보이기 시작하자 그 아찔하게 높은 곳으로 차가 올라가고 그 곳을 건너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제정신도 아닌 상태에서 도로를 질주하는 나같은 운전자가 있으니 운전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하리라. 숙이 떠나고 내 삶이 지속적으로 지옥의 불길과 심연의 바다속으로 숨을 쉬지도 못하고 질식하듯 방황 속에서 살아온 것이 이제 몇개월 이던가.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었고, 사회적 요구는 빈껍데기의 몸뚱어리를 필요로 했다. 전화를 받았으며, 사람을 만나 수다를 떨었고, 일을 진행시켰고, 무섭게 스스로를 학대했다. 12시가 넘어도 사무실에 앉아 일에 몰두했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사무실로 나갔다. 머리 속은 텅비어 있었고, 손발은 바빴고, 입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곤 했다. 그리고도 언어조작은 멈추질 않고 나름 의미있는 발언도 했다. 그래서 일은 그렇게 이어졌고, 날은 지나갔으며, 생명은 끈기있게 지속적으로 호흡과 심장박동을 이어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살아있기만 하면 살아지는 것이다.

 

오늘은 티보 맥클랜드 박사가 오는 날이다. 이것도 내가 해야하는 일중에 하나다. 박사가 일주일 동안 머무르는 동안 그의 방문지에 가서 컨퍼런스를 준비하고, 그의 연구와 프로잭트를 도와주는 것. 인천대교를 지나니 다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니 낮잠이라고 자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에소프레소라도 한잔 마셨으면, 아 껌이라도 씹었으면, 그것도 없고, 창문을 열었다. 바닷가를 다 지나갔는데도 어디선가 바다냄새나는 공기, 비릿한 냄새가 없는 이 습한 바다공기와 내리쬐는 햇살 어디선가 기억의 한 켠에는 숙과 함께 같던 포구와 해안가, 그리고 바람이 생각나는 순간 이었지만..그것도 사실은 졸음 속에서 아련하였다. 드르럭 드르럭, 차로에 표시해진 과속방지 선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바람에 잠에서 완전히 깼다. 그리고 대한항공이라니, A구역 15번 녹색으로 칠해진 기둥옆에 차를 세웠다. 아직도 시간이 남았구나. 에소프레소는 한 잔은 할 수 있겠군.

 

그 아가씨는 나를 알아봐주었다. 요즘 계속 외국에서 손님이 오니 말이다. 외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들러던 카페베네에 아르바이트 여학생, 방긋이 웃으며, 마치 기억이라도 하듯, "에소프레소요?" 했다. "음... 네.." 귀염성있는 아가씨는 에소프레소 더블을 새까만 작은 잔에 가져와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보통은 가지러 가야했는데, 책을 읽고 있었더니 못들었나보다. "고마워요..미안해요." "괜찮아요, 선생님." 하면서 그녀는 밑줄을 잔뜩 긋고 있는 내 책을 흘깃 들여다 보았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호기심이 가득찬 눈을 들여다 보았다. "알랭드 보통이야" "네.." 그녀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계산대 뒤로 물러갔다. 다른 사람들이 주문하려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책에 밑줄 잔뜩 치면서 읽고 있는 것이 이상했던가? 내가 선생처럼 입었나? 혼자 생각을 하면서 다시 책에 빠져들었다. 이사벨은 숙과 좀 닮은 면이 있다. 물론 좀 더 읽어 봐야 하겠지만, 이 책도 마침내 둘이서 헤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 틀림없어. 이사벨이 숙이 같은 여자이고, 주인공이 나같으니 말이야. 조금 뻔해지기 시작하자 빨간 실책갈피를 꽂으며 일어났다. 에소프레소를 다 마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도착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항에서 구경하는 가족간의 재회는 항상 가슴 뭉클하게 하는 것이 있다. 게이트 A에서 기다리려하니 시카고에서 도착한 비행기가 있었다. 엄마와 떨어졌던 꼬마 남자아이가 엄마를 발견하더니 엄마에게 다가가기를 망설이다가 마침내 꾸벅 인사를 하는 걸, 엄마가 크게 팔을 벌리자 안기고는 울어버리는 장면이라든지. 그리고 그 안고 눈을 잠시 감는 엄마의 모습이라든지. 남편의 눈길과 잠시의 포옹이지만 애틋한 몇 초간의 멈춤의 순간. 아빠와 외할머니를 보고는 달려드는 외손녀, 나이 좀 든, 유학중 일 듯한 나이든 아들이 나오자 어쩔 줄 몰라서 손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수줍은 중년을 훨씬 지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아들과 포옹을 기다리는 모습, 그리고 포옹을 하는 모습. 한결같이 그들의 포옹에는 잠시의 멈춤이 있다. 그 몇초간의 멈춤에는 짙은 애정이 배어 있다. 그들이 정말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서로 반목을 하고 싸우기도 하든지 말든지, 공항은 가족임을 증명하는 장소인 것 같다. 그리고 손님으로 온 사람들을 반기는 사람들, 그들은 포옹을 하더라도 그들의 포옹은 좀 다르다. 깊게 포옹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포옹하고 몇 초간의 멈춤이 없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전화가 울렸다.

 

티보 맥클랜드박사는 게이트 B에서 나온 것이다. 예전 모습에 좀 더 흰머리가 희끗해진 것 빼고는 여전히 젊잖고 신사답고, 그리고 이지적인 모습이었다. 얼마만의 조우인가? 스위스 컨퍼런스에 지난 해에 잠시 만났으니 겨우 몇 개월 만이지만, 마치 오랜 만에 만난 듯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고 반가워 했다. 그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학자였다. 차안에 자리를 잡자 그는 책을 두 권 내민다. "하나는 당신의 인생에 조언을 위해서, 다른 한 권은 직업을 위해서 선물하는 겁니다."  그가 내민 책은 거이 도체스터가 쓴 거였고, 다른 하나는 David Nicolls의 책이었다. 나는 인생의 조언을 그에게서 얻고 싶었다.

 

"헤이, 티보 맥클랜드 박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던가요? 가족? 개인적인 성취? 성공? 사랑? 미래의 꿈? 과거의 기억? 재정적인것? 어떤 것이던가요?"

"아, 그건 좀 무거운 질문이군요, 인터뷰인가요?"

"하하, 아닙니다. 좀 무거우면 오늘 대답하고 좀 가볍게 만들어 내일 답을 바꾸어도 됩니다."

"오, 그래요?"

"하하, 그래요, 아님 중요도를 배분해서 여러가지로 대답해도 좋고요, 저를 위한 조언이라고 칩시다."

"아하, 음. 글쎄요,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였어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했는가. 주변의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동료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거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실패했을 때, 그들이 원했던 것을 해주지 못 할 때, 늘 저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없었는 것이었는지, 할 수도 있는데 못한 것이었는지 생각을 했었습니다."

" 아, 그렇군요. 좋은 대답이에요. 현명한 대답이에요. 한가지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여러가지 중요한 것들 사이에 있는 것들이군요. 전혀 다른 각도의 대답이군요. 고마워요.."

 

그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부드러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좋은 친구였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좋아했고 지금도 그런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내가 너무나 사랑해서 떠난 숙을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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