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4일 지금은 10시 1분이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내가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들리는 타각거리는 소리뿐. 오른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밖으로 내다보이는 창가에 네가 서 있곤 했었는데. 그리고 가끔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곤 했었지.
"네, 다음에 다시 전화 드릴께요. 지금은 쫌."
너는 밖으로 나갔어. 그리고 한참 전화통화를 하고 들어왔지.
"누구?"
"엄마, 집에 좀 복잡한 일이 있어서..."
"내가 알면 안되는 일?"
너는 그냥 말없이 다시 문을 닫고 나갔어. 내가 네 전화기가 궁금했던 것은 정확하게 그 때부터야. 너는 엄마라고 했지만, 남자 목소리, 그리고 네 곤란한 표정. 그리고 너의 어색한 표정. 그 때부터야, 내 가슴속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던 것은. 왜 하필이면 엄마라고 했어? 목소리가 아니잖아? 나는 네가 원망스러웠어. 삼촌, 큰아빠, 뭐..그럴듯했어야 할 거아니야. 내가 모르도록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면 말이지. 나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내가 알기를 바랬던 건가? 그날 기억해? 내가 너를 처음 보았던 날 말이야. 그 파리에서의 저녁파티.
나는 선배의 아뜰리에가 그렇게 정리정돈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하지 않았지. 내가 초대받아 갔을 때 그 선배는 아마도 너를 의식했었던가봐. 네게 관심이 있었던 거야. 그 파티에 한시간 정도 후에 나타난 너를 처음 보고서야 선배가 왜 애타게 너를 기다렸는지 알것 같았어. 짙은 청녹색 원피스를 입은 너의 모습, 너는 부근 아스테릭스파크를 지나왔는지 네게서는 수풀 냄새가 났었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선배의 시선이 네게로 갔기 때문에 나도 너를 보지 않을 수 없었지. 너는 현관벽에 걸려있는 에로틱한 남녀의 인도판화를 잠시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왔어. 선배의 기타리스트 친구들이 끊임없이 키타를 번갈아 가며 치고 있었고 몇사람들은 이미 와인과 맥주에 취해있었어. 나도 와인 두잔과 맥주 세잔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근의 깔깔 거리며 웃는 여자들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였지. 그렇다고 네가 그런 효과에 힘입어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아니었어. 아마도 너는 선배보다는 그의 그림에 관심이 있는 듯 했으니까. 선배가 그의 아뜰리에에서 전시한 그림은 모두 그의 것이 아니었지만, 너는 그를 숭배하는 눈길로 바라보았지. 내 시선은 그 숭배의 눈길을 따라 다니고 있었고, 그 미소에 굴복했던 거야. 그래서 보드카에 토닉 얼음을 흔들며 소파에 주저 앉았던거야. 선배가 한국에 와이프한테서 급한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네가 내 옆에 그렇게 오래 앉을 행운을 얻지도 못했겠지. 바로 그때 부터야. 정확하게 그때 부터. 너를 사랑한 것이.
나는 너와 같은 유형의 여자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예술이나 예술가와 관련을 맺어보려고 애쓰는 한 때는 큐레이터지망생이었다던, 수상쩍은 예술가들에게 과장된 존경심을 품고 있는 여자 말이야. 본인은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생활의 황량함에서 벗어나기위해 예술가 인척을 조금만 해준다던지, 혹은 조금만 예술가적이거나 현학적인 체하면 마구마구 애착을 느낄. 며칠 논문을 쓰느라 까칠하게 자란 수염에 존경심을 표시를 하는 너 같은 여자, 그리고 집안이 조금 부유하다 싶으면 마구 마구 웃음과 호의를 뿌려대는 여자. 그래서 너에게 눈길이 갔었음에도 그리고 네가 지독하게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아이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지. 결국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피했던 유형의 여자 말이야. 너는 그런 여자 였는데. 선배가 돌아왔을 때, 너는 다시 선배의 좌파적인 발언에 매혹된듯 보였으니까. 마르크스가 연애에 도움이 되는 것은 적어도 사실이야. 막시즘과 동물보호단체의 감상주의 그리고 물질주의적 애착이 뒤섞여 그가 설명하는 그림과 그 가격에 감탄하던 눈빛. 채식주의에 빠져있던 나조차도 성욕에 꿈틀거리게 만드는 너의 취약한 정신, 너에게 내가 데이트를 신청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끌렸다는거야.
졸업을 앞두고 심리적으로 조금은 압박감을 느끼던 터라 너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하고 부엌쪽으로 걸어 갔던거야. 네가 뒤에서 어깨를 치지 않았으면 어슬렁 어슬렁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르겠어. 파울라너맥주병을 따자 거품이 병으로 흘러 손에 젖었길래 손으로 훔지며 될아섰을 때 네 얼굴이 다급해 보였어.
"맙소사, 나 좀 구해주세요."
"무슨 일이에요?"
"지갑이 없어졌지 뭐에요. 선배한테 말하는 거 보다, 모르는 사람한테 도움을 받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선배한테는 비밀로 해줘요. 칠칠맞지 못하다고 생각할거에요. 미안해요 초면에"
아, 이건 무슨 횡재란 말인가. 너는 속삭이듯 말했지만, 내 귀에는 우뢰소리처럼 들렸어. 이층 계단에서 선배가 내려오면서 나를 아니 정확하게 너를 발견하고 우리쪽으로 걸어오자, 내 눈빛을 바라보며 말했었지.
"선배가 오나요? 나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척 해줄래요? 첫 눈에 반한 것처럼"
나는 네 허리에 손을 대고 가볍게 춤을 추었지. 그때서야 비지 피의 음악이 귀에 들어오는 거야. 너는 금새 취기라도 있는 듯 내게 머리를 밀착을 했잖아.
"전 롤랑바르트하고는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책과 경쟁을 해야 하잖아요? 책에서 오르가즘을 느꼈다니까."
"제가 읽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저도 살아 숨쉬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것을 선호합니다."
너의 뻔한 하이파이에 맞장구칠 요랑으로 손을 댔을 뿐이라 생각해.
" 맥주 더 마셔라, 네가 좋아하는 파울라너 채워놓았는데."
" 오케이, 저기 김빠지게 기다리고 있는게 제 맥줍니다."
너의 머리카락이 내 가슴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 같았고 그 때마다 수풀 냄새가 났지.
"제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러지 말아야 할 때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굴어요. 냉랭하게 굴지 못하고 상대방이 기분 나빠질 까봐 두려워요. 그래서 친근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부인도 있는데."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길 바라나봐요."
나는 최대한 예의를 지키리라 생각을 했어.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슴같이 굴다가 내가 만약 내 속을 드러낸다면 너는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똑같이 말했겠지. 너는 사냥하고 싶게 만드는 동물이었던거야. 그러고 보니 내가 너를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사냥했던 걸까. 지금 생각하니 둘다였던 것 같아. 그리고 지금은 놓친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