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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이런 남자가 다 있을까. 뭇 여성을 호리고도 남을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남자, 입을 열때마다 기지가 반짝이는 화술과 입가에 그리고 발음에 어린 수줍음,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주목을 끄는 언어의 조합으로 강의를 하던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처음으로 손에 잡았다. 그의 철학 강의는 매력적이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책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소설일까, 에세이일까, 아니면 심리철학서일까. 장르도 묘하지만 글의 스타일도 그의 어투만큼 묘하다. 관점을 이리저리 프레이저처럼 바꾸는 것도 그렇고 아주 디테일 한 것에서 리얼리티를 성취하는 것도, 그리고 번역도 마음에 든다. 반면에 등장인물이나 플롯은 단순하기 그지 없다.
건축회사에 다니는 주인공이 클로이라는 여성을 비행기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와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헤어지게 된 것은 클로이의 배신이다. 클로이가 주인공의 회사 동료인 윌과 원나잇 스탠드를 하게되고 그 관계가 지속되자 주인공은 그것을 감지하고 있지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와중에 마침내 클로이가 그것을 그것을 고백함으로서 둘 관계는 산산 조각이 난다. 그후 우리의 주인공은 다른 여성 레이첼을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 끝을 맺는다.
플롯이 이리도 평이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현실을 성립시키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눈길을 끈다.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읽게 만든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알랭드 보통의 묘한 심리묘사와 화려한 서술과 인용의 조합을 통해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사건을 세밀하게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똑같은 사건을 거꾸로 보게하기도하고 다른 방향에서 크게 혹은 작게 보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그 사랑에 눈이 머는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우선 그 사람을 이상화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다른 모습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우리가 이상화하고 싶은 부분만을 보게됨으로서 사랑을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싫어하는 모습은 아예보지 않거나, 축소시킨 채 말이다. 그래서 사랑은 하게 되지만 실은 정말로 상대를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니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 된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된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자신에게서 시야를 돌려 다른 사람을 보기 마련이고 이 봄은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바라봄에서 필시 하나의 각도를 채택하여 끊임없이 그것에 집중하고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특히 끌리게 되며 그것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결함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 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 [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주인공은 갑자기 클로이를 확대하고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같은 정도로 깊이. 무지가 사람을 더욱 용감하게 만든다는 것은 사랑학에서도 적용된다. 단순한 망상에서 사랑은 출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망상은 정확한 각도와 순간과의 절묘한 일치의 순간 끌어당기는 순간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절묘한 일치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리 작은 의미의 언어라 할지라도 수천가지 수만가지의 애매모호한 의미를 갖게 되므로 사랑은 다시말해도 무지에서 출발하는 것은 맞다. 따라서 확실함, 과학성 등을 철두철미하게 믿거나 숭배한다면 사랑에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외없이 그런 사람도 사랑에 빠지게 되기 마련이다. 사랑이 무지에서 또는 망상이나 과장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사랑의 창조적 특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랑의 상태에서는 보통의 의사소통에 유용했던 언어가 설명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는 심정적 상태가 생겨나게 되고 그것은 어떤 사전의 뜻풀이로도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된다. 그래서 모든 작은 디테일에서 의미를 찾으려한다.
순수와 공모릐 중간에 걸려 있는 클로이의 모든 행동에는 나를 미치게 만드는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문장의 끄트머리에서, 그녀의 웃음의 입꼬리에서 유혹의 흔적을 찾아낸 것 같은데, 맞나? 아니면 나의 욕망이 순수의 얼굴에 투사된 것뿐일까?
사랑하는 행위는 상대방의 작은 디테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의 손짓, 눈길, 그가 하는 말, 그가 쓴 글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것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무시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도 무지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집착은 어떤가. 사랑은 곧 잘 사랑하는 사람이 걸어올 전화에 집착하게한다.
전화기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클로이가 며칠뒤에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나는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오히려 준비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양말을 널다가 기습을 당했다. 나는 침실에 있는 전화로 달려갔다. 내 목소리에는 긴장과 분노가 담겨 있었는데, 만일 종이에 쓰는 글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능숙하게 지워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글쓰기가 유혹이 된다.
전화기의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하는 바일테고,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말하는 매력적인 사람의 역할은 만나기 정말로 쉽지 않은 상대이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라하는 사람 [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 [우리는 곧 그 사람을 잊어버린다] 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라고 쓴다. 맙소사. 그런 유사한 이야기가 시중에 나돌기는 한다. 속된말로 '줄듯 말듯 애태우는 여자'인것이다. 뿐만아니라 여자의 또는 남자의 수줍음은 많은 것을 감추어 준다. 그래서 수줍어하는 남자나 여자는 더욱 매력적이고 상대를 애태우게 된다. 그 수줍음의 표현뒤에 감출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는 모호한 신호들과 마주쳤을 때, 이런 분명한 태도의 결여를 수줍음 탓으로 돌리는 것보다 더 좋은 설명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도 바라기는 하지만, 너무 수줍어서 그렇다고 말을 못 한다. 이렇게 자신의 유혹의 대상이 수줍어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사랑은 애초부터 상대방에 촛점을 강조하고 보기 때문에 아부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지게 되며 상대방의 단점도 사랑하게 되고 단점조차 장점으로 보이게 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망설임이 수줍음뒤에 감추어지거나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결정적 기준에 맞추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라는 자아의 특질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개인적인 특징을 버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무가치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자아를 버린다는 것은 묘한 것이다. 이 자아리를 버리는 순간은 육체적인 것과도 관계가 있다. 자아를 버리는 정도는 친근함의 정도와 관련이 있으므로 육체적인 가까움, 즉 접촉의 정도와 균형을 이루려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이기도 한 모양이다. 그래서 키스를 하면서도 키스속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키스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역으로 키스나 육체적 접촉을 생각을 차단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성기와의 접촉이 뜻하는 친밀함과 그녀의 삶의 나머지 미지의 영역 사이의 불균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육체적 헐떡거림과 더불어 피어나는 그런 생각들은 무례하게도 욕망의 법칙들에 맞서서 불괘한 정도의 객관성을 끌고 들어오고, 그럼으로써 우리와 함께 방 안에 있는 제 3자, 지켜보고, 관찰하고, 또 심지어 판단까지 하는 자의 위치에 올라서려고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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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키스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둘러싼 공식적 신화이다. 침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상태를, 그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불가사의를 일깨우지 않겠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특별한 공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과 행위, 몸의 작은 움직임에 조차 촛점을 맞추게 되면 그가 또는 그녀가 가진 사물까지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물건의 배열, 옷을 입고 벗어놓는 자태까지도 오나별하고 세련되고 일반적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받는 사람은 어떤가. 사랑받는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쉽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상대방이 적극적일 때 오히려 거절하고 상대방을 애태우는 자이다. 즉 상대가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사랑에 투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상대가 마르크스주의자인경우 상대방의 행동과 상대의 행동에 대한 관심에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그 투쟁이후에 마르크스주의자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학교 배구팀 주장이었고, 아주 아름다웠으며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녀는 언젠가 학교 식당에서 내가 사준 오렌지 스쿼시를 앞에 놓고 앉아서 일허게 말했다." 어떤 남자가 9시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 진짜로 9시에 전화를 하면 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그 남자가 필사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뭐겠어?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남자는 나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남자야. 9시 30분이 되면 나는 그 남자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되거든."
나는 그 나에도 그 애의 마르크스주의를 직관적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애의 말이나 행동에 관심이 없는 척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몇주 뒤에 처음으로 그애와 키스를 할 수 있었다.
대단한 감정적 격변을 예고하고 운명과 연관지으며 때로는 삶과 죽음의 귀로에 오르게 하는 사랑은 상대방과의 차이점보다 유사성에서 더욱 결속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차이점에 대해서 느낄 때 서운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빠져나오면 거기에 육체적 경계뿐아니라 수많은 점에서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사성을 찾는 것은 사랑의 한 증상인 것이다.
사람들은 차이를 따지는 것보다는 유사성을 부여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그러나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몸을 분리하고 있는 살갗은 단지 육체적 경계일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심리적 분수령 -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일 뿐이다.- 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사람과 유사성을 찾기는 아주 쉽기도 하고, 그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완전히 이해하기를 갈망하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사랑의 증상인것이다.
내가 그녀를 알기 전의 그 모든 세월과 습관들. 그러나 그것도 그녀의 코의 모양이나 눈의 색깔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일부였다. 모든 관계에 내포된 분열이 눈에 보이면서, 나는 익숙한 환결에 대한 원시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었다. 새로 배우고, 나자신을 제시하고, 내가 순응해야 할 왼전히 새로운 사람, 어쩌면 그 순간 나는 내가 앞으로 클로이이게서 발견할 모든 차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일 그 모든 시간, 우리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창 밖으로 월트셔의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내가 이미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 집, 부모, 역사의 특이한 점까지 이미 다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갈망했다.
사랑은 아예 처음부터 기독교적인 사랑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증상은 다른 종류의 사랑과는 차이가 있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침실로의 이행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 사랑의 메시지는 특정한 경우보다는 보편적인 경우에 어울린다. 모든 여자에 대한 모든 남자의 사랑, 서로 코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두 이웃간의 사랑에 어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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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너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나는 네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너에게 영광을 주었으니 이제 너에게 상처도 주겠다.
이렇게 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은 독특한 관계가 성립되며 서로에게서 평정을 찾기는 어렵다. 끊임없이 갈등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 판매소 주인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다. 상대방을 통치하려고 하며 간섭하고 통제하고 심지어 압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옷입는 모양, 말하는 모습까지 이런 저런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의 말을 빌리면 최소한의 통치가 가장 바람직한 통치인 동시에 가장 바람직한 사랑이다. 사랑할수록 그 사람을 멀리 둘 수 있어야 한다. 그냥 내버려 둘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깨물지 말아야하고 손안에 넣어두지 말아야하고 너무 껴안아서 질식시키지 말아야한다. (이 부분에서 이 책은 사랑하는 방법을 말해준다.)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은 통치자들이 국민을 사랑하기 때문에 통치한다는 말을 그만두고, 분별력 있는 최소한의 통치에 집중할 그런 따뜻한 마음이 생겨난다고 대답했다. 자유주의 정치학의 가장 위대한 옹호자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가 1859년 출간한 [자유론]은 사랑없는 자유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옹호이다. 밀은 국각가 아누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며, 개인적인 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영위하라거나, 무슨 신을 섬기고 어떤 책을 읽으라거나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력있게 주장했다. 밀은 완국이나 압제는 "국가의 모든 구성원의 신체 및 정신적 규율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근대 국가는 가능한 한 뒤로 물러서서 국민이 스스로 통치하게 해야한다고 덧붙혔다. 남녀관계에서 괴로워하면서 그저 옴싹달싹할 수 있는 여지만이라도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 처럼. 밀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자유는 다른 삶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거나 자유를 얻으러는 노력을 방해하지 읺는 한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의지에 반하여 어떤 구성원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유일한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막을 때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 자신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상대방과의 깊은 신뢰나 믿음이 먼저 선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서로를 확인하는 단계가 있을 것이다. 이 정도로 자유로이 서로가 떨어져도 여전히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있는 경우이다. 이 모습은 표면적으로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진 부부의 모습과 유사한 면이 있다.
사랑이 오래전에 사라져버리고 껍질만 남은 결혼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각방을 쓰면서 출근하기 전에 부엌에서 만나 몇 마디 건네는 관계. 상호 이해에 대한 희망은 오래 전에 포기하고 대신 통제된 오해에 기초하여 미지근한 우정을 지속하기로 합의한 관계. 저녁에 세퍼즈 파이을 함께 먹을 때에는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지만, 새벽 3시에는 잠을 못이루고 감정적 좌절에 가슴 아파하는 관계.
반면에 사랑의 순간은 상대방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순간이다. 그 특정한 모습에 빠져들고 그것을 확대인식하는 순간이다.
무한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를 하거나 맞은 편 욕조에 누워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왜 우리의 욕망이 이 특정한 얼굴, 이 특정한 입이나 코나 귀를 선택했는지, 왜 이 목의 곡선이나 보조개가 우리의 완벽성의 기준에 그렇게 정확하게 응답했는지 묻게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하나는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서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들의 얼굴 풍경만큼이나 독창적이고 특색있는 방식으로 매력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재규정한다.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 감탄하는 미에 대한 기준은 플라톤의 미에 대한 기준과는 다르다. 플라톤의 경우 아름다움의 객관적인 기준이 수학적인 황금률로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만인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인것이다. 실로 Leon Bsttista Ablertti는 사람의 몸을 600조각의 단위로 나누어 그 비율의 넓이, 부분과 부분사이를 측정하여 플라톤적인 아름다움을 제시한바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은 경이롭기는 하지만 필자에 따르면 멱살을 쥐지 않는다.
어떤 그림은 우리의 멱살을 쥐는 반면, 다른 그림은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눈의 언어는 말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에 고집스럽게 저항한다.
주인공의 클로이에 대한 아름다움은 플라톤적인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결정 근거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나오는 견해에 가깝다. 그것은 뮐러-리어의 착시에 가까운 것이며, 스탕달의 말대로 '행복의 약속'인 것이다.
실제로 클로이의 얼굴에 내가 좋은 삶과 동일시하는 특질들을 암시했다. 그녀의 코에는 유머가 있었고, 주근깨는 순수를 이야기했고, 치아는 관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버리는 당돌한 태로를 암시했다. 나는 그녀의 두 앞니 사이의 틈을 이상적인 배열로부터의 불행한 일탈이 아니라, 심리적 미덕의 지표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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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흥미로운 얼굴은 대개 매력과 비뚤어짐 사이에서 동요한다. 완벽함에는 어떤 압제가 있다. 심지어 어떤 싫증이 느껴진다. 과학적 공식과 같ㅇ느 독그마의 힘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있다. 이보다 유혹적인 아름다움의 경우에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각도조차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떤 빛에서나, 어느 때에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미는 아슬아슬하게 추를 희롱한다. 자기 자신에게 모험을 건다. 비율의 수학적 규칙에 편안하게 안주하지 않고 모험에 나서서, 추로 미끄러질 수도 있는 바로 그 세밀한 곳들에서 매력을 발산한다. 마르셀 프루스타가 말했듯이,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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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상력은 클로이의 치아 사이의 틈에서 노는 것을 즐겼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헝클어져 있었기 때문에 창조적 재배치가 가능했다. 클로이의 얼굴은 그 모호함 때문에, 오리와 토끼가 둘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비트겐쉬타인의 오리-토끼 그림과 비슷했다. 이 그림에서는 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상상력이 오리를 찾으면 그는 오리를 보게 될 것이다. 상상력이 토끼를 찾으면 토끼가 나타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의 경향이다. 물론 나를 지배하는 주된 경향은 사랑이었다.
알랭드 보통에게서 놀라운 것은,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정당화가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든지 혹은 사랑때문에 가능하다든지 하는 것보다 그 아름다움을 감지하고 인식하는 자에 대한 시선의 전환에 있다. 즉 아름다움의 시선을 주는 자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의 위험은 그 위태로움 때문에 보는 사람의 눈을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상력이 치아 사이의 틈으로부터 철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훌륭한 치열 교정 의사가 필요한 것 아닐까? 보는 사람의 눈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보는 사람이 시선을 거둘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역시 클로이의 매력의 한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 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만들어버리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