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자명종이 촉각의 축제라도 하듯이 귀속의 소리 연결관들을 흔들었다. 눈을 뜨지도 않고 기다란 손을 뻗어 자명종을 건드린다. 건드리기만 하면 저절로 소리가 사라지는 기능이 달려 소리는 사라졌지만 그 소리는 온몸의 촉각을 이미 세워놓아 아침의 건강한 의식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아침의 이 짧은 순간들은 하루를 시작하는 간소한 의식이기 마련이다.

 

나는 숙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숙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는 길게 누워 왼쪽 팔을 얼굴에 올려 창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막고 있었다. "일어나자, 우리 바닷가에 갈까?"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모로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숙은 뒤에서 나의 어깨를 감싸안았고, 나는 앞으로 오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제자리로 돌려주며 일어났다. "나 샤워"

 

물은 늘 그정도의 온도로 맞추어져 있어서 여름날 소나기를 연상하게 한다. 지금이야 비를 맞으면 큰일이 날듯해서 우산이 없으면 비를 긋기를 기다리곤 하지만, 어린시절에는 휠씬 청년이 될 때까지 비를 맞는 일이 비가 내리면서 옷을 통해서 살에 닿는 것, 머리카락속으로 젖어들어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일에 대해서 감상적인 적이 있었다. 그 감상적인 느낌은 오래도록 아침 샤워에 남아 있었다. 소낙비를 맞는 대신 오랜동안 샤워실에 서있곤 한다. 내가 샤워를 마칠 때까지 숙은 그대로 창쪽으로 누워 기다란 씰루엣으로 잠든 짐승처럼 조용했다. "커피? 아님 티?" "티..." "어.." 커피를 내리고 물을 올려놓고 토스터에 빵을 넣고나서야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딸기를 씻으면서 진한 녹색 꼭지를 따내고는 다시 플라스틱 팩에 담았다. 바닷가에 가면서 먹을 요량이었다.  우유를 데우고, 치즈를 꺼내고, 딸기잼의 뚜껑을 열고.....

 

도로에는 차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순조롭게 강릉까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갔으니까. "아..난 강릉에 가는 것이 좋아, 서해안가는 것보다, 동해안이 좋아. 풍광도 좋고, 도로도 좋고, 시간도 세시간정도 당신과 갖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도착해서 점심도 좋고, 그리고 저녁은 회를 먹고, 돌아오는 시간도 부담스럽지 않고 말이야, 그렇지?" 그녀는 혼자서 한참동안 쫑알거린다. "사랑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했다. "많이 사랑해, 알지?" 숙은 아무말도 않고 고개를 푹숙인다. 그녀가 찻창으로 고개를 돌릴 때 들판에서는 몇마리의 새들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 통통한 몸둥어리가 밑으로 처지는 것으로 보아 오리과인듯했다. 도로에 차들이 정지한듯이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 한 대를 무작위로 뒤쫒고 있는 것처럼 뒤따라 붙기 시작했다. 어느듯 강릉이었다. "오색약수터로 간다" 우리가 자주 가던 식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로 한면으로 주차를 했을 때 오른쪽 계곡으로는 겨우내 내린 눈이 아직도 하얗게 쌓여있었지만 날이 따스해서 그런지 물흐르는 소리도 들렸고, 눈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약수 마실까?" 숙은 기다란 부츠를 또각거리며 팔짱을 꼈다. "응" 그녀가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어린 양의 두려움이 있었다. 주인을 바라보는 눈동자,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눈동자, 털을 다 깍일 때의 가느다란 속눈섭과 겁에 질린 동공. 약수터 입구에는 할머니가 앉아 직접 농사를 지었다며 무우말랭이 말린 것과 겁질을 벗겨 하얗게 된 옥수수, 녹두 엿과 들기름을 팔고 있었다. "이거 다 내가 농사를 지은거야, 순전히 우리 밭에서 난거지, 약수마시고 가면서 사가, 이 바가지를 써 그리고 오면서 돌려주면 되" 할머니는 느리고 낮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숙의 눈길을 잡아 끌고 있었다. 숙은 "물 떠다줘 응?" 나 부츠 신어서..." 나는 천천히 할머니의 바가지를 집어들고 약수터로 내려갔다. 계단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닳아서 반들 반들했고, 그곳 몇계의 계단에는 누군가 천을 넓게 깔아 놓아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 놓았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물은 퐁퐁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고 온갖 종류의 희망이나 꿈이 그러하듯이 서서히 목마른 자들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여러종류의 잔과 바가지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도 그틈에 끼어 한잔을 마시고 또 한잔을 채웠다. 희망의 잔도, 꿈의 잔도 이렇게 기다리면 채울 수 있다면 좋겠구나. 기다리면 말이지. 절망적인 순간에 조차, 기다리면 말이지. 그러나 절망은 가차없이 그 가지를 꺽어 그 방향으로 다시는 피어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내가 바가지를 채워 그녀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고 계단을 좀 오르자 그녀가 할머니가 펼쳐놓은 허름한 상점에서 뭔가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알 수 있는데, 서 있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숙은 하얗게 깐 옥수수를 집어들며 할머니가 펼쳐놓은 모든 물건들의 가격을 물었다. 내가 다가가자 손을 내밀어 바가지를 받았다. 쇠맛이 나서인지 미간을 찌푸리는 숙의 얼굴에 햇살이 와서 바스라지듯 미끄러지며 하얗게 빛나곤 했다. 하얀 얼굴, 하얀 얼굴, 두려워하는 얼굴. 마치 '메에에'라고 소리라도 낼듯한 얼굴 표정이었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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