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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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 비금속을 인공적 수단으로 귀금속으로 전환하는 기술. 이 단어를 들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아마 고등학교 때의 세계사 시간이었던가. 동방 지역의 역사를 설명하던 선생님의 입에서 나왔던 그 단어는, '납이나 쇠를 금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헛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하더라. 물론 그로 인해 관련과학과 문화는 크게 발달할 수 있었지만......'라는 식의 다소 허황되면서도 헛된 여담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반 아이들도 같이 웃어버렸고, 이야기는 다시 긴 역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었다는 것은 더없이 멋진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잘못되었고 그들의 노력은 헛된 것임이 드러났지만 자신이 꿈꾸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릴 수 있는 열정. 그것은 그들이 찾고자 했던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만의 금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도-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는 꿈속에서 이집트 피라미드로 가 숨겨진 보물을 찾으라는 계시를 받는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늙은 왕’의 권유를 따라 아프리카로 건너간 소년 산티아고. 그는 피라미드로 가는 길에서 도둑, 크리스털 상점주인, 낙타몰이꾼, 영국인 학자, 사막의 여인 파티마를 차례로 만난다. 이들은 산티아고가 원하는 그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희망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그리고 동반자로 등장하는 매개체들이다.  꿈의 실현으로 이끄는 영혼의 메신저들이다. 그리고 물론 산티아고가 겪어야하는 과정들은 쉽지 않다. '갈매기의 꿈'의 조나단이 그랬고,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가 그랬다. '연금술사'의 산티아고도 마찬가지다. 보물을 찾으려다가 자신이 가진 돈을 도둑맞기도 하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과 질타를 받는다. 돈을 잃어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일하게 된 크리스탈 상점의 주인은 이미 시들어버린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정말로 원하지만 이제는 원하지 않게 되었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산티아고는 다시 한번 고민한다. 그냥 양을 치던 옛날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찾고 있는 그 보물이 사치스러운 바램은 아닐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일 것이다. 지금 나의 모습, 대학생들의 모습도 그런 것이 아니던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냥 남들이 사는 것처럼 평범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이상이라는 것을 펼치기에는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이 너무 척박하지 않을까? 산티아고가 마음  속에 두고 온 양들은 결국 경제적인 가치를 뜻한다. 안정과 풍요. 그것들이 선사할 수 있는 수많은 조건들과 가치 앞에서 과연 우리들은 초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산티아고는 마침내 사막의 깊은 침묵, 죽음의 위협과 대면한다. 사막은 그가 피라미드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련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바람과 이야기하고, 사막을 타이르고,  해를 빛나게 한다. 모든 것과 통할 수 있는 '고귀한 언어'를 배워낸 그. 그리고 세상을 만든 위대한 진리 앞에 선 산티아고는 그 곳에서‘만물의 정기’(Soul of the World)를 배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책에서 확인하시길 바란다 )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항상 우리 옆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상성만큼, 그것에 도달하는 길은 힘들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에 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그 대상이라는 것은 멀어진다. 나를 강조하고, 나를 사랑하자는 말은 요즘 얼마나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인가. 광고에는 자신의 소중함을 내세우는 문구들이 넘쳐나고, 주위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결국 그 끝은 끝없이 소비하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누군가가 나에게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과연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버린 이 물음들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산티아고를 통해 “우리 모두 자신의 보물을 찾아 과거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연금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데는 늘 마음의 두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풍요를 버리고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떠날 자신이 있는가? 이 책은 우리에게 그렇게 따져 묻지는 않는다. 다만 그 과정을 산티아고를 통해 조용히 일러줄 뿐이다.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삶 속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다. 지금, 우리는 이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abraxas)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만물에게는 저마다 자아의 신화가 있고, 그 신화는 언젠가 이루어지지. 그게 바로 진리야. 그래서 우리 모두는 더 나은 존재로 변해야 하고, 새로운 자아의 신화를 만들어야 해.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의 말 중-(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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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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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미술이라는 것에 눈을 뜬것은 대학교에 들어온 후였다. 1학년 때 현대미술에 관련된 수업을 듣게 되었고, 피카소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밖에 모르던 나에게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같은 현대의 거장들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새로운 시선이 열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그림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표현 기법 덕분에 다소 고전적인 방법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우습게 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성서에 나온 익숙한 장면이라든가 꽃·과일을 그린 정물화 같은 그림들은 중·고등학교 때 지겹게 보아왔던 것들이었다. 그 때의 그 그림들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혹은 '이 그림의 화가는 누구일까요?' 같은 시험문제에서 답을 하기 위해 지겹도록 봐야하는 것에 불과했다. 어쩌면 새로운 그림에 열광했다는 것은 지겹던 입시생활을 마치고 모든 것이 새롭던 대학교 1학년 때, 제대로 만나 분출한 감정들의 편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미술서적을 조금씩 보게 되었고 화가나 작품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도 가지게 되었다. (그래봤자 아직 중구난방이고 화가와 작품을 헷갈려하는 일도 다반사지만!) 앞에서 미술서적이라고 거창하게 말을 했지만 전문적인 책은 거의 읽지 않았고, 주로 에세이를 곁들인 그림 감상서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하나가 최영미의 '화가의 우연한 시선'이라는 책이었다. 그리고 '화가의 우연한 시선'이라는 제목은 베르메르의 '연애 편지'라는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표현이었다. 여인들의 얽힌 시선, 환하게 빛나는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 그러나 내게 베르메르는 고전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을 주로 그려온 그의 그림들은 너무 소박해 보였다. 그 당시 열광하던(지금도 좋아하긴 하지만) 마그리트의, 어찌 보면 I·Q 테스트 같은 그림들에 비하면 베르메르의 그림은 너무 작아 보였고, 독창성이 결여되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마음속에서 밀어내 버렸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발견한 건 우연한 일이었다. 가입한 어떤 카페에서 회원 한 분이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올렸었다. 너무나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책이라고. 그러나 남이 열광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의심을 품고 '흥, 그럴까?' 라고 반응하는 것이 나의 성격이었다. 상과 함께 올려진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그림도 작아서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홀린 듯이 무언가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한 그 표정이라니. 더 큰 그림을 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고 마침내 발견한 그림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반듯한 이마, 말갛게 빛나는 눈, 약간 벌린 촉촉해 보이는 입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지닌 입가, 그리고 귀에 고요히 자리잡은 귀걸이. 어찌 보면 단순한 쇠 같기도 한 귀걸이지만 고요한 빛을 내며 그림 전체에 가볍지 않은 무게를 전하고 있었다. 이 그림의 소녀는 도대체 무엇일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당장 서점에 가서 책을 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책이 담긴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 (때로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읽고 싶은 책이 있기 마련이다. 버스 안에서 인쇄 상태가 잘 되었나- 하고 뒤적거리지 않고 말이다.) 집에 도착해서도 중간에 책을 덮고 싶지 않아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새벽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새벽,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어느새 쉬지 않고 책을 읽어 내리고 있었고 마침내 책을 덮은 순간 뻐근해오는 가슴과 더불어 눈에 작게 눈물이 맺힌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 날 밤 나는 이 책을 꼭 껴안고 잠들었다. 앞에서 말한 정말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책이다- 라는 찬사에 진심으로 동감할 수 있었다.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그림에 대해서는 사실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남겨진 건 그림과 베르메르의 이름뿐이고 모델이 누구인지,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베르메르의 딸이라는 설도 있지만 부정확하다. 그녀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자아냈다. 베르메르의 집에서 일하게 된 '그리트'라는 가상인물을 통해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과 감정을 마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처럼 보여주는가 하면, 등장인물간의 감정의 흐름을 무심한 눈빛과 그리트의 담담한 어조로 서술해나간다. 이 감정의 흐름이라는 것에는 물론 베르메르와 그리트와의 교감이 대부분이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색에 대한 느낌과 그 아름다움을 아는 그리트, 그녀는 베르메르의 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점점 자신의 미감을 넓혀가게 된다. 빛이 어떻게 빛나는지, 하나로만 보이는 색에도 얼마나 많은 색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런 그녀를 조금씩 일깨워주는 화가 베르메르. '안정된 표정을 띈, 바다처럼 어두운 회색 빛의 눈을 가진 남자'라고 묘사되는 그는 그리트가 가진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그녀를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그림은 그리트를 파멸시키고, 베르메르를 주저하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림이 가져오는 결과를 알면서도 아름다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그리트와 베르메르, 그들이 가졌던 수많은 생각과 미묘한 긴장들은 수없이 많지만 잔잔하게 묘사되며, 추잡함이나 난잡함은 보여지지 않는다. (제발 롤리타 컴플렉스 같은 건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 그들의 감정이 표현되는 건, 진주 귀고리가 그리트의 귀에 달릴 때이다. 자제되었던 감정은 딱 한 번 폭발하지만, 그 폭발 또한 절제된 고요함이다. 그러나 그 그림은 결국 그리트를 거리로 내몬다. 거리의 광장 바닥에 있는,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 원안에서 그녀는 고민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은 과연 어디인지. 그녀가 선택을 한 순간, 순수했던 소녀시절은 끝이 나고, 그리트는 어른이 된다. 아픔 앞에서도 무덤덤해질 수 있는 그런 어른 말이다.

 

이 책은 가난했지만 아름답고 총명한 소녀의 이야기이고, 그런 소녀를 그리지 않을 수 없었던 화가의 이야기이고, 그런 화가에게 섬세한 시선을 돌린 작가의 숨결이 묻어있는 책이다. 동시에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해 가는 한 여자의 가슴 아픈 사랑이 묻어난 이야기이고 무심한 듯 그녀를 지켜보았던 화가의 눈빛이 고요하게 빛나는 이야기이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했지만 다가설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열망과 좌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베르메르의 시선으로 이 글이 다시 쓰여졌다면 어떠했을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그는 누구보다도 대상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겠지만 친절하고 따뜻한 눈은 아니었을지 모른다.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위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그리트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그림에 관한 것만 있었고, 그림을 완성해야겠다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와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눈은 그래서 다른 것이다. 충실한 관람객이자 영감을 주는 뮤즈였던 그리트의 눈에서 나는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을 보는 법을 배워낼 수 있었다. 그림 너머에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어내고 만들어내는 법. 그것은 또 다른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는 일인 것이다. 물론 그림을 보는 데 정답은 없는 것이고, 내 의견이 맞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살아온 인생에 따라 그림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책이 유치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 분들과 나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를 잠시 들어본 것으로 하자고 하면 위로가 될까. 무심히 넘어가지만, 그 안에 있는 예기치 못한 세계를 본 것으로 만족하자고. 카메라 옵스큐라를 바라본 세상의 경이로움을 알게 된 그리트의 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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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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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에서 이 말을 비추어 볼 때, 사르트르의 말은 명제에 도전하는 지독한 모순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타인'을 '지옥'이라는 극단적인 언어로 표현했을까. 아멜리 노통의 '오후 네 시'는 한 개인이 지극히 불편한 한 타인을 대하면서 변해 가는 과정을 재치 있고도 잔혹하게(이건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고 있다.

고전어를 가르치는 학교 선생인 에밀과 그의 아내인 쥘리에트는 정년 퇴직 후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로 이사를 한다. 꿈에도 그리던 아름다운 집까지 얻은 그들이 원한 것은 평화와 안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웃에 사는 베르나르댕 씨의 방문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은 혼란에 빠진다.

이들의 이웃인 팔라메드 베르나르댕은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매일 오후 네 시에 그의 이웃을 방문한다. 친교를 맺으려는 것 같은 뚜렷한 이유가 있는 방문은 아니다. 세수를 하거나 이빨을 닦는 것 같은 지극한 일상처럼 그는 그저 이웃집에 잠시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상일 법한 일이, 이웃에게는 공포가 된다. 그리고 그 공포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성실한 자아성찰이 아닌, 오히려 내면에 숨어있는 추악한 면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내면화시킨다. 법 같은 드러나는 규칙도 있고, 규범이나 예의 같은 드러나지 않는 규칙도 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규칙들은 보통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잘 지켜진다. 지키고 있는 우리들도 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저 '존재'하고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규칙들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조금 더 유혹적으로, 이런 규칙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온다면. 과연 우리들은 얼마나 '사회적 규칙'에 충실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에밀과 쥘리에트는 처음에는 베르나르댕에게 예의바르게 대한다. 차를 대접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하면서 소위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나르댕은 이에 대한 감사나 반응은 전혀 없이, 그저 두 시간만 채운 후 나가버린다. 그는 사회가 정의하는 관계와 그 관계에 대한 규칙 또한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가 최소한의 소통은 원한다는 것이다. 에밀과 쥘리에트가 점점 그의 방문을 꺼리게 되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차를 내오지 않는 식으로 머리를 쓰자, 그는 격렬하게 화를 낸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의무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모습. 익숙한 이미지가 아닌가? 이것은 떼를 쓰며 울어대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에밀이 견딜 수 없는 것은 베르나르댕의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일깨워내는 자신 안의 추악한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당신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라는, 간단하고도 잔혹한 사실이다. 한때 도시라는 문명화된 곳에서 교양 있는 인간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아왔을 에밀의 내면은 불쑥 나타난 타인 앞에서 무참히 부서지고 깨진다.

결국 에밀은 점점 난폭해지는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베르나르댕을 살해한다. 그도 원했을 거야, 그의 눈은 죽음을 바라고 있어, 나는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주는 거야! 이미 에밀은 신의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이 될 자격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 늘어놓는 궤변은 한 때 그가 교양 있는 학교 선생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에밀이 신이라는 역할을 맡은 것은 아주 잠시뿐이다. 잠시 창조주였던 것처럼 즐거워했던 그의 입에서는 마침내 무서운 말이 나온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라고.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아니면, 나도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도 말한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범위를 넘어서는 자신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가끔 일탈을 꿈꾸기도 하고, 전혀 다른 자신을 그려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가 정해주는 테두리 안에서이다. 그러나 어느 날 테두리 자체가 사라져버린다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누군가가 옆에서 속삭인다면? 돈을 훔치고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인간답게' 행동할 수 있으며, '인간답게'  타인을 대할 수 있는가?

소설 '파리대왕'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린이들에게 권력을 주면 그들은 세상을 파괴할 것이라고. 굳이 어린이들에게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의 추악한 면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것. 그것 자체가 벌써 커다란 권력이다. 그리고 제어장치가 없는 권력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미 우리는 대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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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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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당신의 청소년기를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는가?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괴로운 기억뿐이었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소위 '어른'이라는 시점에서 바라본 지난 시절은 좋은 기억만 남아있을 수 있다. 단지 십대라는 숫자에 혹해서, 젊음이라는 그때의 기분을 다시 찾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십대라는, 청소년기라는 지난 시절이 과연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는가? 성적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말을 연발하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부모님에게 절망하고, 믿었던 친구마저도 등을 돌리는 때. 모든 것이 실수연발일 때의, 그 쓰라린 기억들을.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거의 모든 과목을 낙제하고, 그 전에도 여러 학교를 진전한 경험이 있으며, 그를 이해해줄 친구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암울한 상황을 뒤로 한 채, 그는 막연하게 '어른의 세계'인 뉴욕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그는 마치 인생의 쓰라린 면만 맛보는 코스로 안내된 듯,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

언뜻 보면 주인공인 홀든은 별로 호감 가는 인물은 아니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지만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불평이 대부분이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며 여자를 사려하고, 술을 마시고 변태들을 구경하며 짜증을 낸다. 그 상황 안에 존재하는 자신마저도 그렇게 우스워지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그렇게 완벽했던가? 자기 자신이 완벽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보면서 살아간다. 하물며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완벽하지 않는 청소년기에는 더하다. 친구의 지적에 흔들리고, 부모님의 꾸중 한마디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모습을 들키기는 싫어한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남들 앞에서는 강한 척을 하는 것이다. 그 강한 척 중 하나가 바로 '어른인 척' 하는 것이다. 어른처럼 옷을 입어보고, 어른처럼 담배도 피워보고, 어른처럼 말해보고.......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불안을 감춰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홀든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홀든은 누구나 십대에 흔히 느끼는, 인생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인생은 시합과도 같다는 말에 그는 코웃음을 친다.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다면 시합이겠지만 못난 놈들 사이에 끼어있다면 그것은 이미 시합이 될 수 없다고. 그는 이미 '어른들 세계'의 냉혹한 법칙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마음껏 조소한다. 마치 우리가 선생님과 부모님을 보며 '어른들은 다 똑같애'라고 투덜거리는 것처럼. 왜 그러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뚜렷한 대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다. 설명할 수 없는,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은 불안을 기반으로 한 반항심 때문이라고.그리고 소설 내내 보여지는 홀든의 방황은 비록 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한번은 꿈꾸었을 일탈이자 여행이었다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이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다. 정말 되고 싶은 것이라고 홀든은 힘주어 말하지만, 동시에 그는 지독한 혼란을 느낀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아득함. 단지 아이들을 잡아주고 싶다는 그의 말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잡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으로 들린다. 이 책의 결말이 다소 아픈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병동에서 자신이 냉소하던 친구들과 주위의 사물들마저 그립다고 하면서, 역설적으로 말을 하지 말라며 신경질적인 자존심을 세우는 홀든은 우리 안에 내재된 약한 모습 그대로이다.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도 막상 본질을 보기 두려워하고, 다가서는 것을 주저하는. 누구에게나 있는 자화상이다. 부정하고 싶은가? 하지만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가만히 들여다 보라. 내 안에 있는 홀든이, 파수꾼이 되어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을. 그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어수룩하고 약한 또 다른 나의 자아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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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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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친구여 뚜렷한 근거가 떠오르거든 어리석음이 커져서 행동을 방해하기 전에 그대를 묶고 있는 것들로부터 멀어지라....나무와 물에게 그대가 필요하게 하라...." (투서 ..좋은 농부가 되는 오백가지 방법..중에서) 첫 장을 펴는 순간 보이던 글귀다. 지금의 삶을 모두 버리고 나무와 물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조화로운 삶'일까? 책을 처음 접할 때, 재생지로 된 이 책이 좀 지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읽어나가면서 이 부부의 꾸밈없는 삶과 재생종이의 느낌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첨부된 사진 또한 그들이 얼마나 '조화로운 삶'을 살았는지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은 니어링 부부가 뉴욕 생활을 그만두고 버몬트의 외딴 산골로 들어가 살았던 20년 동안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니어링 부부가 도시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이유는 부를 축적하려고만 하는 사회에서 멀어져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째, 다른 나라로의 망명. 둘째, 그냥 순응해서 살아가는 것. 셋째, 시골로 내려가 자급자족하는 것 중 세 번째 방법을 택하여 일할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그 나머지 시간을 연구와 책읽기, 글쓰기, 대화 등을 통한 "조화로운 삶"을 살기로 했다.

 

 "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 되는대로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 아니면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더 나은 길을 찾아 성실히 사는 것이다."(헉슬리...생물학자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흔히 도시를 벗어나 농사를 짓고 산다고 하면 대충 농사나 짓고 시간가는 대로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부부는 그렇지 않았다. 버몬트에서의 10년 계획을 세우고 "삶의 원칙"을 정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성실히 지키며 살아갔다. 간단히 정리하면 하나, 먹고사는데 필요한 것을 반쯤은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한다. 둘,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고 더 이상의 돈은 벌지 않는다. 셋, 은행에서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는다. 넷, 우리 땅에서 아무 것도 내다 팔지 않는다. 채소나 곡식이 남는다면 이웃에게 필요한 만큼 나눠준다. 다섯, 집짐승을 기르지 않는다....이러한 그들의 원칙은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생활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들은 손수 주변의 돌과 밭을 갈다 나오는 돌을 나르고 쌓고 해서 자연과 하나되는 집을 지었다. 이웃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스무 해 동안 열두 채나 돌집을 지었다. 집 짓는 것을 작은 것까지 하나하나 적어서 마치 집 짓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는 듯 했다.그리고 유기농법으로 곡식, 채소, 과일 등을 키웠다. 또 저장고를 꾸며 채소를 겨울에도 먹을 수 있게 했으며 이들은 인정 넘치고, 분수에 맞으며, 깨끗하고, 단순한 생활 방식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육식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이들은 "집짓기" 와 "농사짓기"를 통해 결코 도시를 벗어나 살아가는 삶이 단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단순히 어떻게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림을 꾸릴 것인가 따위의 '귀농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는 동떨어진 버몬트의 산골에서 대안으로서의 삶을 찾으며 그렸던 꿈을 현실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던 '단순한 생활,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남, 무엇이든 쓸모 있는 일을 할 기회'를 누리는 생활을 말이다.

 

니어링 부부는 꼼꼼하게 산골에서의 삶을 묘사했다. 마치 귀농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전해주듯이 잡초 제거하기, 양식을 보관하는 법,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기, 농기구 다루는 법 등 세세한 방법들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들은 도시에서 농약이 가득한 채소와 과일, 표백제로 영양분이 다 빠진 밀가루를 먹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했다."제대로 먹는 것이 가장 훌륭한 치료이니, 충분히 신경 써서 건강을 지켜야 한다."(섭생..중에서).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땅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유기 농법으로 자기가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기르고 화학 약품이 들어간 식품 대신 자연 식품을 사서 집에서 요리해 먹기를 권한다. 또 도시에서는 항상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우리도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음을 믿게 해준다. 하지만 솔직히 그들의 숲 속 농장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것은 좋은 생활 방식이나 이런 생활 방식은 그이들에게는 훌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그 생활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고 했듯이 이 부부처럼 철저하고 꼼꼼한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아직 자신이 없다. 이 부부는 문명이 주는 분주함, 편의 시설, 흥분 등이 없이는 살 수 없고 따라서 이런 생활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철저함, 꼼꼼함 때문에 산골에서의 그런 '조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철저함을 나타내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밭일 공책'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모든 연장을 쓰고 나서 기름칠을 해 제자리에 놔두고, 태양열을 이용한 온실을 만들고, 손님이 와도 자신들이 일할 시간이면 그저 일하며 이야기하는 등...솔직히 놀라울 뿐이다.

 

이들은 또 일한 후 네 시간은 자유롭게 쉬고, 취미 생활을 즐겼으며, 일요일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했다. 또 이웃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기운을 돋우기 위해서도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 누구보다도 농사꾼에게 이런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어느 만큼은 여가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마컴...만족스러운 시골 생활..). 이 얼마나 문화인다운 생활인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음악을 감상하고 토론하는 일이란 일부러 만들어도 잘 즐기지 못할 것이다 .즐긴다고 해도 무언지 모르게 쫓기는 느낌이 들것이다. 그러나 이 부부는 진정으로 삶을 느끼며, 즐기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이들은 서두르고 속도를 내서 살아가야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평온한 속도의 삶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에게 가르치려 하지는 않는다. 또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솔직한 삶을 보여주면서 독자 스스로 삶을 돌아보게 할뿐이다. 니어링 부부가 보여준 것은 자본주의 경제와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 자급자족을 하면서도 인생에서의 자아를 실현하고 여가를 즐기며 개인의 재능을 향상시키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은 소박한 삶의 방법론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 경쟁과 시기가 가득한 사회 질서에 등지고 모두 함께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보여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이익을 늘리는 목적 하나만을 갖고 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 이렇게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어 살 때, 모든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도널드슨 ...행복의 지름길..중에서) 니어링 부부가 버몬트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 당신이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이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었다. 이들의 대답은 "틀림없이 거의 그대로 살아갈 겁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 거의 후회 없을 정도로 살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들처럼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이 글의 끝 부분에서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라는 이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 나에게도 희망이 있었던가? 지금껏 희망이 있어 달려왔다기보다는 단지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데 급급해 정말 나의 '희망'이 무엇인지는 생각지 못했다. "희망"이 없다면 삶에 열정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노력"이 없다면 그 열정을 채워 줄 수가 없을 것이다. 내 삶도 "조화로운 삶" 이 되길, 후회 없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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