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채굴장으로 -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처음에 ‘채굴장으로’ 라는 제목을 접했을 땐, 1950년대 배경의 농촌소설인 줄 알았다.
그야말로 촌구석인, 한 때 광산업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마을에서
치매 걸린 시어머니와 무기력한 남편과 함께
어떻게든 삶을 꾸역꾸역 살아나가는 한 많은 여인네의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그 위에 써 있는 ‘그에게 끌린다, 남편을 사랑하는데......’라는 문구를 보고
‘.......또 불륜인가......’하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불륜, 연애, 사랑. 왜 다들 그 ‘죽일 놈의 사랑’에 그렇게 열광하는가.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다 욕할 거면서.
몰래 훔쳐보고 남몰래 고개를 끄덕인 후 당사자들에게 침이나 뱉어줄 거면서.
왜 다들 불륜에 대해 쓰고, 이야기하지 못해 안달일까.
결국은 궁금해서인가보다. 책을 쓴 저자나 그 책을 읽는 나나.
주인공인 세이는 초등학교 양호교사로 화가인 남편과 섬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섬에는 친구이자 동료 교사인 쓰키에,
쓰키에와 연인 사이인, 가정이 있는 본토,
때론 심술궂지만 넉살좋은 이웃할머니 시즈카 씨,
그 외의 착하고 순박한 섬 주민들이 있다.
(쓰키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
얼마나 좋으면 그러겠어―’라고 반응하는 이 사람들은 정말 착한 거다.)
어느 날 이 섬에 도쿄 사람인 이사와가 부임해 온다.
그리고 세이는 이사와를 욕망하게 된다. 서서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진 않는다.
이사와는 섬을 떠나고, 세이는 남편 곁에 남는다.
하다못해 둘이 자지도 않았다. (정작 이사와와 자버린 건 친구인 쓰키에다.)
둘 사이에 이루어진 신체적 접촉이란
이사와가 세이의 입술에 손가락 한 번 대본 게 다다.
불륜이라면 흔히 상상하게 되는 ‘화끈함(?)’은 전혀 없는 셈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러나 세이의 일상이나 대화에서 미묘한 긴장은 감지된다.
“그랬어예? 같은 사투리를 쓰는 세이가
이사와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표준말을 쓰며 긴장하고,
”신랑 품에 안기지 못한 티가 다 난다 아이가.“ 라는 시즈카 씨의 농담에 발끈하며,
”당신은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라는 무례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세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1인칭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내면은 읽어내기 힘들다.
오히려 눈에 띄는 건 주변 인물들이다.
불륜남의 아내와 삼자대면을 한 후 이사와와 자 버리고 그와 결혼하겠다는 쓰키에,
곁에 없는 남편과 정사를 나누는 꿈을 꾸며 밤마다 음란한 신음소리를 내는 시즈카 씨,
“쓰키에 씨는 거미 같은 사람이라 난 그녀에게 붙잡힌 것”이라고
말하며 킥킥대는 이사와.
세이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그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거침이 없다.
주인공인 세이는 오히려 독자의 눈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터널을 파나갈 때 제일 끝에 있는 지점을 채굴장이라고 합니더.
터널이 뚫리면 채굴장은 없어지지만,
계속 파는 동안은 언제나 그 끝이 채굴장이지예.”(p.258)라는 세이의 말처럼,
결국 끝에 서 있는 건 세이, 바로 그녀이다.
그녀도 독자도, 끝에 가서야 숨어있던 그녀의 욕망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마지막의 평안해 보이는 세이의 미소가 얼마나 많은 담금질을 거친 것인지.
이 책은 남들이 비난하든 말든 서로 좋아 죽는 뜨거운 불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읽는 내내 바삭거리고 건조한 느낌.
내면이 너무 뜨거워서 정작 표면은 말라버린 느낌.
폭발할 것 같은 열정이 보이나 싶더니 얼른 뒤로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하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짓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다.
건성으로 읽고 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물 냄새보다는 동물 냄새가 나는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세이의 한숨을 느꼈다면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될 것이다.
끝에 다다른 사람은 어떻게든 그들만의 해답을 찾아낸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답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평온한 세이에게, 난 그저 이렇게밖에 말할 뿐이다.
참, 용케도 잘 참아냈군요, 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