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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으로 미술이라는 것에 눈을 뜬것은 대학교에 들어온 후였다. 1학년 때 현대미술에 관련된 수업을 듣게 되었고, 피카소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밖에 모르던 나에게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같은 현대의 거장들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새로운 시선이 열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그림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표현 기법 덕분에 다소 고전적인 방법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우습게 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성서에 나온 익숙한 장면이라든가 꽃·과일을 그린 정물화 같은 그림들은 중·고등학교 때 지겹게 보아왔던 것들이었다. 그 때의 그 그림들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혹은 '이 그림의 화가는 누구일까요?' 같은 시험문제에서 답을 하기 위해 지겹도록 봐야하는 것에 불과했다. 어쩌면 새로운 그림에 열광했다는 것은 지겹던 입시생활을 마치고 모든 것이 새롭던 대학교 1학년 때, 제대로 만나 분출한 감정들의 편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미술서적을 조금씩 보게 되었고 화가나 작품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도 가지게 되었다. (그래봤자 아직 중구난방이고 화가와 작품을 헷갈려하는 일도 다반사지만!) 앞에서 미술서적이라고 거창하게 말을 했지만 전문적인 책은 거의 읽지 않았고, 주로 에세이를 곁들인 그림 감상서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하나가 최영미의 '화가의 우연한 시선'이라는 책이었다. 그리고 '화가의 우연한 시선'이라는 제목은 베르메르의 '연애 편지'라는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표현이었다. 여인들의 얽힌 시선, 환하게 빛나는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 그러나 내게 베르메르는 고전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을 주로 그려온 그의 그림들은 너무 소박해 보였다. 그 당시 열광하던(지금도 좋아하긴 하지만) 마그리트의, 어찌 보면 I·Q 테스트 같은 그림들에 비하면 베르메르의 그림은 너무 작아 보였고, 독창성이 결여되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마음속에서 밀어내 버렸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발견한 건 우연한 일이었다. 가입한 어떤 카페에서 회원 한 분이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올렸었다. 너무나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책이라고. 그러나 남이 열광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의심을 품고 '흥, 그럴까?' 라고 반응하는 것이 나의 성격이었다. 상과 함께 올려진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그림도 작아서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홀린 듯이 무언가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한 그 표정이라니. 더 큰 그림을 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고 마침내 발견한 그림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반듯한 이마, 말갛게 빛나는 눈, 약간 벌린 촉촉해 보이는 입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지닌 입가, 그리고 귀에 고요히 자리잡은 귀걸이. 어찌 보면 단순한 쇠 같기도 한 귀걸이지만 고요한 빛을 내며 그림 전체에 가볍지 않은 무게를 전하고 있었다. 이 그림의 소녀는 도대체 무엇일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당장 서점에 가서 책을 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책이 담긴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 (때로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읽고 싶은 책이 있기 마련이다. 버스 안에서 인쇄 상태가 잘 되었나- 하고 뒤적거리지 않고 말이다.) 집에 도착해서도 중간에 책을 덮고 싶지 않아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새벽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새벽,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어느새 쉬지 않고 책을 읽어 내리고 있었고 마침내 책을 덮은 순간 뻐근해오는 가슴과 더불어 눈에 작게 눈물이 맺힌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 날 밤 나는 이 책을 꼭 껴안고 잠들었다. 앞에서 말한 정말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책이다- 라는 찬사에 진심으로 동감할 수 있었다.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그림에 대해서는 사실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남겨진 건 그림과 베르메르의 이름뿐이고 모델이 누구인지,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베르메르의 딸이라는 설도 있지만 부정확하다. 그녀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자아냈다. 베르메르의 집에서 일하게 된 '그리트'라는 가상인물을 통해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과 감정을 마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처럼 보여주는가 하면, 등장인물간의 감정의 흐름을 무심한 눈빛과 그리트의 담담한 어조로 서술해나간다. 이 감정의 흐름이라는 것에는 물론 베르메르와 그리트와의 교감이 대부분이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색에 대한 느낌과 그 아름다움을 아는 그리트, 그녀는 베르메르의 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점점 자신의 미감을 넓혀가게 된다. 빛이 어떻게 빛나는지, 하나로만 보이는 색에도 얼마나 많은 색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런 그녀를 조금씩 일깨워주는 화가 베르메르. '안정된 표정을 띈, 바다처럼 어두운 회색 빛의 눈을 가진 남자'라고 묘사되는 그는 그리트가 가진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그녀를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그림은 그리트를 파멸시키고, 베르메르를 주저하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림이 가져오는 결과를 알면서도 아름다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그리트와 베르메르, 그들이 가졌던 수많은 생각과 미묘한 긴장들은 수없이 많지만 잔잔하게 묘사되며, 추잡함이나 난잡함은 보여지지 않는다. (제발 롤리타 컴플렉스 같은 건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 그들의 감정이 표현되는 건, 진주 귀고리가 그리트의 귀에 달릴 때이다. 자제되었던 감정은 딱 한 번 폭발하지만, 그 폭발 또한 절제된 고요함이다. 그러나 그 그림은 결국 그리트를 거리로 내몬다. 거리의 광장 바닥에 있는,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 원안에서 그녀는 고민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은 과연 어디인지. 그녀가 선택을 한 순간, 순수했던 소녀시절은 끝이 나고, 그리트는 어른이 된다. 아픔 앞에서도 무덤덤해질 수 있는 그런 어른 말이다.
이 책은 가난했지만 아름답고 총명한 소녀의 이야기이고, 그런 소녀를 그리지 않을 수 없었던 화가의 이야기이고, 그런 화가에게 섬세한 시선을 돌린 작가의 숨결이 묻어있는 책이다. 동시에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해 가는 한 여자의 가슴 아픈 사랑이 묻어난 이야기이고 무심한 듯 그녀를 지켜보았던 화가의 눈빛이 고요하게 빛나는 이야기이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했지만 다가설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열망과 좌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베르메르의 시선으로 이 글이 다시 쓰여졌다면 어떠했을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그는 누구보다도 대상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겠지만 친절하고 따뜻한 눈은 아니었을지 모른다.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위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그리트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그림에 관한 것만 있었고, 그림을 완성해야겠다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와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눈은 그래서 다른 것이다. 충실한 관람객이자 영감을 주는 뮤즈였던 그리트의 눈에서 나는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을 보는 법을 배워낼 수 있었다. 그림 너머에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어내고 만들어내는 법. 그것은 또 다른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는 일인 것이다. 물론 그림을 보는 데 정답은 없는 것이고, 내 의견이 맞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살아온 인생에 따라 그림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책이 유치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 분들과 나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를 잠시 들어본 것으로 하자고 하면 위로가 될까. 무심히 넘어가지만, 그 안에 있는 예기치 못한 세계를 본 것으로 만족하자고. 카메라 옵스큐라를 바라본 세상의 경이로움을 알게 된 그리트의 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