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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황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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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가 내린 어둑한 오후에 나는 피로함을 느꼈고, 일종의 가수면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 이름자 앞으로 온 책을 받았던 것이다. <불안의 황홀> 

고개를 들어 본 하늘은 콘트라베이스의 선이 걸쳐져 있었고, 

마치 물결치듯 흔들리는 사랑의 감정이란 '불안의 황홀'이라는 말이 적합한 듯 했다. 

 

시간은 사실상 규칙적인 무엇이 아니었다. 

낯선 풍경들, 낯선 시간 속에 놓여있던 그 여름날에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생각했던 것이다. 

기차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 내 생각은 자꾸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뒤로만 가고 있었다. 

그런 오후가 있었다. 

 

한 글쓰는 사람이 있고, 

나는 그의 생이 남긴 '흔적'들을 따라가며, 그것은 어쩌면 기차의 움직임과 유사한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스무 살도, 서른 살도, 마흔 살도, 그렇게 지나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긍정과 타자에 대한 전폭적인 이해를 완성한 존재'라는 정의의 어른이란 시절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에 일말의 안도와 일말의 서글픔을 함께 느꼈다. 

언제나 불안의 깊이가 다를 뿐이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채 죽음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망각할 것이다. 음악이나 언어가 지워지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라면 

죽음과 삶 사이에서 질서를 찾는 부단한 오늘의 내 삶도 결국은 소멸하게 될 것이고, 

'아무 것도 남기고 싶지 않은' 그분의 이야기가 문득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행복을 추구하지는 않았으면 

사막에 서 있는 선인장처럼, 그렇게. 

 

나만의 시공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하루를 오롯이 바친 <불안의 황홀>은  

나를 하염없이 불안하게, 동시에 황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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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독고다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가미가제 독고다이 김별아 근대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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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은

"삶이란 건 가까이서 보면 누구나에게 비극이지만, 또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한 사람의 아주 개인적인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떠올랐던 한 단어는 '블랙코미디'였다. 큐브릭의 <Dr. Strangelove>만큼의 지독한 블랙코미디. 시대며 역사같은 개념은 완전히 무시하고도 '살 것만 같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라는, 역사라는 구조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고, 부조리를 겪어내지 않을 도리가 없는 하윤식의 삶을, 그 가족들의 삶을, 또 우리들의 삶을/ 

결국 삶은 비극적인 희극일까, 희극적인 비극일까. 

시간이 흘러, 그 순간들을 이루던 기억들이며 그 모든 순간들의 감정이며, 아이러니며 그런 것들이 윤색되고, 일부 미화되고, '새로운' 해석으로 정의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 비극적 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설사 그 비극적 속성이 오늘날에 와서는 다분히 코믹적인 요소가 되어 버린다 하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역사'보다는 '시대'를 담으려 노력했다고 했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한 두 문단으로 정리되는 '~시대의 민중들의 삶', '사회상' 같은 것들은 그 모든 다른 요소들은 배제한 채, 아주 건조한 '나름 객관적이라고' 정의하는 문장들로 모든 감정이며, 사람들의 생각들을 박제화시키더란 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누구나 다 독립을 갈구하고, 열망하며, 독립투사로서 살았을 법한.  

하지만 그 때도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사람들에게 있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가 되었으며, 나라의 이름이 '대한제국'에서 '일본제국'으로 바뀌어도 그 자체보다는 내 먹고 사는 문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훗날 민족주의니 애국심이니 해서 역사로서 미화된, 희생정신이니 정당화되는 전쟁까지도 다시 보면 지독한 코미디에 다름 아니다. <가미가제 독고다이>는 희극이었다. 아니, 어쩌면 비극이었는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웃음이 나온다는 사실에, 다시 씁쓸해지는, 그런 블랙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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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코브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 디 아더스 The Others 1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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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장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세상은 3차원의 세계라고들 하지만, 

가끔 3차원, 그 너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가슴이 두근 두근 한다. 

아, 나는 이미 책날개에서부터 이 책에 반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무어(Christopher Moore)! 

바다에서 카약타기, 스쿠버다이빙 학, 사진 찍기, 치즈 크래커와 애시드 재즈, 수달 목욕시키기를 사랑하는 남자, 살모넬라균, 교통정체, 무례한 인간들을 혐오하는 이 남자, 

이 남자의 은밀한 세계는 '우울한 코브'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마을 구성원, 그 어느 누구 하나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이가 없었더랬다. 

대마초에 쩔어 사는, 순경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순경스럽지 않은' 남자 시오 - 

왕년의 B급 판타지+에로+액션 여배우, 하지만 다른 화자와 몸을 공유하는 몰리 - 

어류 & 파충류에 성적으로 탐닉하는 약사 윈스턴 - 

 민달팽이"라는 다소 혐오스런?! 별명을 가지고 있는, 메이비스 - 

 그 밖에도, 에스텔, 캣피시, 밸, 게이브, 우리의 스키너까지 

이 마을에 존재하는 그 모든 '존재'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바로 지독한 우울. '정신병'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그 범주의 인간들. 미친 마을 코브는 그래서 우울'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은 코브 마을의 큰 파란을 일으킨다. 항정신성 약물을 중단하게 됨에 따라 금단현상이 발생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커지게 된다. 다소 '판타스틱한' 바다괴물 스티브의 등장까지. 

이 소설은 지독히 우울하면서 지독히도 유쾌하다. 그리고 도대체 이건 뭐, 정신나간 소리들 같은데 가만히 귀기울여 듣고 있으면 아주 정상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너 신경 과민이구나, 시오. 신경 과민인 사람은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남들은 모두 그가 정상이라고 말하지. 반면에 정신병자는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보지만 남들은 모두 그를 비정상이라고 생각해." p.285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사실상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다분히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관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구도 비정상이지 않고, 누구도 정상이지 않다. 주기가 길든 짧든, 우울"이라는 멜랑콜리 -를 느끼는 현대인들은 모두 어느 정도 비정상이고, 어느 정도 정상이다. 모든 극대화된 상황의 정점인 '코브'는 그래서 깊은 우울, 그 동전의 양면인 쾌락 - 섹슈얼리티를 자극하는 - 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울한 인간을 섭취하면서 생존한 포식자, 다소 그로테스크하면서 엉뚱한 이 발상으로부터 '코브'는 탄생했다.  

이 책은 '똑똑한' 괴짜들의 해피엔딩스토리이다. 

그리고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중 하나는, 

우울을 몰아내는 가장 강력한 약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있어, 그가 나에게 있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이야기해 주는 것,  

그리하여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은 '사랑'에 감염된 사람들의 즐거운 'ever after'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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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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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쓰리>를 읽는 내내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브레송의 <소매치기>에는 물건을 훔치는 '손'이 인물과 별개로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브레송은 한 화면에 인물의 얼굴과 손을 함께 담지 않는 기법을 통해 관객은 '소매치기가 일어나는 상황'속에서 오직 현란하게 움직이는 클로즈업된 손만을 응시하게 된다. 영화에서 손은 익명적이며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다. 보는 이는 소매치기를 하는 행위의 '손'과 소매치기를 하는 주체 - 미셸 - 을 분리하게 된다. 그와 함께 익명적이고 무감정한 손의 특성을 주체에게 전가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브레송의 <소매치기>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러한 '손'의 특성을 담지한 '익명적/무감각'한 미셸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마침내 운명의 흐름을 거부하고 맞섰다는 데 있다. '너무 오랜 길을 돌아'서 연인과 만난 미셸의 결말은 그것이 비록 교도소의 창살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희망적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쓰리>의 주인공 또한 제목이 암시하듯이 소매치기이다. 

물건을 빼오는 순간의 긴장, 격정, - 그 순간의 쾌락 - 이 그를 숨쉬게 한다. 

이야기의 가장 큰 대립구도는 기자키와 니시무라이다. 

기자키 -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 심지어 타인의 인생마저도.  

니시무라는 끊임없이 운명을 거부하려 하지만 '알수없는'운명이란데 미끌리어 '그렇게 되고 마는 듯'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 세계는 단단하고 강고했다. 다양한 시간은 다양한 것을 고정해버린 채 적당한 속도로 흐르면서 내 등을 떠밀고 나를 어딘가로 조금씩 이동시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자키와의 만남은 니시무라로 하여금 무언가를 다시 마주하게 한다.

'그 한쪽에서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나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니시무라의 결말은 일면 비극적이다. 하지만 핏물에 젖은 동전이 하늘을 향해 던져질 때, 이번만큼은 니시무라의 운명이/ 혹은 인생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런만큼 그의 결말은 어느정도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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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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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고 싶다는 것. 추상은 구체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행복은 추상에 속한다. 다시말해 행복은 ... 구체적인 희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슬람 정육점>의 인물들은 지극히 보편적이면서 지극히 낯설다. 

나의 주변에서 보임직한 그러한 '일상의 인물'들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음이다. 

우연히 그들과 마주쳤다면, 어쩌면 나또한 ㅡ 그들을 선에서 비껴난 이방인들로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마음이 따듯해지기도, 슬퍼지기도, 무엇보다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내가 도외시하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만큼이나의 거리로서 대했던 누군가들을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동정'이나 '연민'따위의 협소한 감정으로서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다. 

'불행과 비극은 온전히 타인의 것일때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사람은 결코 자신과 닮은 타인을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닮은 이들 - 가난하고 억압받고 무시받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그처럼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 저 불결하고 끔찍한 인간과 내가 전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그 정처모를 '이질감' 혹은 '거리감'의 근원은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또한 나의 모습을 읽었기 때문이며, 어쩌면 그들의 생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감내해내는 우리네 삶의 단편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슬람 정육점>은 - 인간에 대한, 고통-슬픔-위로-'함께 있음'-다시 살아가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지극히 아름답고, 그럼에 눈물겨운 단상이었다. 

그동안 미워하고, 배타적으로 대했던 이들은,  

왕궁의 음탕 대신에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이었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 네번 찾아오는 야경꾼이었고 

그때 그 수영의 고민은 사실 내 모습에 다름아니었음을.  

정작 분노해야 할 대상에 오히려 잠잠하고, 오히려 '살아내기에도' 버거운 이들에게 조그만 분노를 쏟아내는 데 급급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로 표현한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는 유정은 그래서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언어'를 부정하면서도 언제나 모든 걸 언어로 환언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를 듣기위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들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천지가 창조되던 순간의 굉음이란 서도 사실은 보잘것없는 가냘픈 목소리와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은 소리의 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영혼과 유사한 리듬을 지녔느냐에 따라 음악으로 인식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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