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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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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쓰리>를 읽는 내내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브레송의 <소매치기>에는 물건을 훔치는 '손'이 인물과 별개로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브레송은 한 화면에 인물의 얼굴과 손을 함께 담지 않는 기법을 통해 관객은 '소매치기가 일어나는 상황'속에서 오직 현란하게 움직이는 클로즈업된 손만을 응시하게 된다. 영화에서 손은 익명적이며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다. 보는 이는 소매치기를 하는 행위의 '손'과 소매치기를 하는 주체 - 미셸 - 을 분리하게 된다. 그와 함께 익명적이고 무감정한 손의 특성을 주체에게 전가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브레송의 <소매치기>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러한 '손'의 특성을 담지한 '익명적/무감각'한 미셸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마침내 운명의 흐름을 거부하고 맞섰다는 데 있다. '너무 오랜 길을 돌아'서 연인과 만난 미셸의 결말은 그것이 비록 교도소의 창살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희망적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쓰리>의 주인공 또한 제목이 암시하듯이 소매치기이다. 

물건을 빼오는 순간의 긴장, 격정, - 그 순간의 쾌락 - 이 그를 숨쉬게 한다. 

이야기의 가장 큰 대립구도는 기자키와 니시무라이다. 

기자키 -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 심지어 타인의 인생마저도.  

니시무라는 끊임없이 운명을 거부하려 하지만 '알수없는'운명이란데 미끌리어 '그렇게 되고 마는 듯'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 세계는 단단하고 강고했다. 다양한 시간은 다양한 것을 고정해버린 채 적당한 속도로 흐르면서 내 등을 떠밀고 나를 어딘가로 조금씩 이동시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자키와의 만남은 니시무라로 하여금 무언가를 다시 마주하게 한다.

'그 한쪽에서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나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니시무라의 결말은 일면 비극적이다. 하지만 핏물에 젖은 동전이 하늘을 향해 던져질 때, 이번만큼은 니시무라의 운명이/ 혹은 인생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런만큼 그의 결말은 어느정도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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