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 논고 한길그레이트북스 154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한길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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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사상의 줄기를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한 이론가이다. 그는 정치를 종교와 도덕에서 분리했으며, 정치의 독자적인 영역을 요구한 정치가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오독됐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그 텍스트로만 해석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어떤 의도로 그러한 생각을 내비쳤는지는 고려되지 않은 채, 마키아벨리즘은 “공익을 도외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관행”, 혹은 “정치라는 범주를 떠나 사회의 삶 속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처세방식”이란 형태로 해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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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마키아벨리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홉스적, 플라톤적이라는 말에는 경멸적 의미가 거의 없지만, ‘마키아벨리적’이라는 말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악의 교사’로 독재자들의 정권 침탈을 정당화하고, 국가적 폭력을 합리화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 아이젠하워 역시 마키아벨리를 이론을 비판하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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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키아벨리의 대중적 이미지는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키아벨리즘은 사적이익을 위해서 남을 거리낌없이 희생하는 방법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공익, 특히 국가이익을 위해서 수단의 도덕적 선악에 관계없이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정치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가 총체적인 위험에 빠져 있을 때, 또는 국가 질서가 문란해지고 부패가 만연해 있을 때, 마키아벨리즘은 국가의 생존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국가를 위해’는 개인 혹은 특정 계급의 사사로운 이익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라는 총체적 집단,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중 그리고 개인들의 삶이 보장받는 공동선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개별 인간들의 권리 전반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전체주의 국가나, 군주 혹은 귀족 집단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순수한 군주정 그리고 귀족정을 옹호하진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최상의 정치체제로 공화정, 그 중에서도 기원전 500년 경부터 450년 간 이어져 내려온 로마공화정을 으뜸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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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저서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단연 『군주론』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출세를 위해서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한 책이며 ‘새로운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는지에 대해 서술했다. ‘군주’의 처세가 담겨있는 『군주론』이 가장 대중적이기 때문에 혹자는 마키아벨리와 공화정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출세를 위해 서술했다는 점에서 온전히 그의 생각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은 『군주론』에 대해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일탈이거나, 군주의 위선을 폭로하여 인민이 군주에게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식을 제공하려는 의도로 저술했다 거나, 혹은 군주정은 공화정으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바라봤다는 등의 해석이 제시한다. 『군주론』은 메디치 가의 환심을 사기위해 일시적 필요로 저술된 것이지만 『로마사 논고』는 마키아벨리가 다소 자유롭게 저술한 책이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로마사 논고』에 마키아벨리 본연의 생각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모두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정치’가 담겨 있지만 『로마사 논고』는 군주정이 아닌 공화국에 대한 옹호를 담았다는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의 본연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사 논고』를 필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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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로마사 논고』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논고』는 3장으로 나눠졌다, 제 1권은 성공적인 공화국 수립과 그 유지 방법이 담겨 있다. 제 2권에는 로마의 팽창이 그리고 제 3권에는 로마 공화정에서 위대한 지도자들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논고』는 『군주론』에서 이야기하는 무자비함의 유용성과 인간 본성의 악함을 더욱 정교하고 자세히 서술한다. 하지만 『논고』는 그 방법을 공화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법치질서를 확립하는데 집중한다. 마키아벨리는 혼합정부 형태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데,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지닌 성격을 모두 다 포함한 하나의 정체가 가장 견실하고 안정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여러 정부의 요소들이 함께 있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할 수 있다. 이는 로마 공화정에서 원로원, 집정관 그리고 호민관의 형태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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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고』는 법치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입법가는 모든 인간이 사악하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말에서 치국(治國)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악함은 흔히 생각하는 싸이코패스적인 무자비한 폭력보다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생존추구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규제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행동을 통해 생존하게 된다. 그 형태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사사로운 복수로 불법적인 방법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국가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 따라서 법에 의해 무분별한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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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군주, 귀족, 평민이란 계급적 차이, 혹은 그 사람이 나라를 수호한 영웅이든 상관없이 법은 공평한 저울이 되어야 한다. 로마의 호라티우스는 적장을 모두 무찔러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며칠 뒤 누이동생을 살해했다. 로마인들은 그가 쌓아 놓은 공적과는 상관없이 그를 처벌하고자 재판에 회부했다. 마키아벨리는 제 24장의 제목을 “잘 조직된 공화국은 시민에 대한 상벌제도가 분명하며, 공을 세웠다 하여 잘못을 묵인하지 않는다.”라고 붙였다. 마키아벨리는 호라티우스의 사례를 통해서 공정무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법만이 그 효력을 보장할 수 있고 공동선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피렌체의 정치를 극렬히 비판한다. 피렌체에선 사법적 권한을 외국인이 수행했다. 하지만 외국인은 쉽게 매수가 되어 영내 실력자들을 처벌하지 못했다. 이에 피렌체는 8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사법 시스템을 개편했지만, 소수의 위원들은 항상 소수 실력자들의 앞잡이로 남아있었다. 법은 사람들에게 전혀 공정 무사하지 못했다. 기원전 로마 공화정이 알고 있었고, 마키아벨리도 중요시 생각한 공정한 법은 피렌체,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상관없이 이상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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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인민 그 자체를 믿진 않았다. 그는 평민이란 국가를 경영하는 자리의 적임자가 될 수 없고, 쉽게 자기기만에 빠진다고 말한다. 평민은 무리를 이룰 때야 대담해진다고 말하며, 개개인은 나약하다고 보았다, 또한 “광정에서의 정신과 시청에서의 정신은 다르다.”고 말하며 대중들의 정치적 의사표시와 실제 정치과정의 괴리를 분명하게 내비친다. 하지만 그는 다중은 군주보다 더 현명하고 더 안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 외의 다른 역사가들은 다중은 비굴하거나 거만한 속성을 갖고 있다며 그들을 폄하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다중을 비난하는 결함은 군주에게도 적용되며, 법률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자는 통제되지 않는 다중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즉 그가 비판하는 존재는 법 위에 서있는 통제되지 않은 자들이다. 마키아벨리는 잘 정비된 제도를 통해 명령을 내리는 인민은 군주만큼 침착하고 신중하다고 말한다. 그는 사악한 군주의 위험성을 말한다. “인민의 결함은 말로써 치유되지만, 군주의 사악함은 칼로써만 치유된다.” 는 말의 의미는 인민은 설득할 수 있지만 사악한 군주는 아무도 말릴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군주보다 인민의 입장을 수정하는 것이 훨씬 위험부담이 적고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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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군주와 인민의 역할을 구분한다. 군주는 국가를 창업하는 일이지만, 군주는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군주의 리더십으로 유지되는 국가는 지배자의 공백상태에서 쉽게 무너진다.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새로운 법제도를 설립하여 자신의 후대를 고려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인민들은 이미 조직된 법을 보존함으로써 국가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군주와 인민의 ‘비르투(능력, 역량, 탁월함)’가 합치되는 상황에서 국가는 생존을 영위할 수 있다. 법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는 개별적인 선이 아니라 공동선을 이끌어 오기 때문에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부패한 시대에는 자유가 전복된다. 국가가 설립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법의 관습과 관례는 점차 깨지기 시작한다. 이렇듯 법이 제공하는 활력이 점차 꺼지고 부패가 축적되면서 공화국은 전복된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보전하는 인민들이 강력한 법 집행을 정기적으로 실행하여 사람들에게 법의 실효성을 상기시키고 두려움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들이 종법(從法) 태도를 유지하는데 성공해야만 공화국은 생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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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관심 분야가 바뀌었더라도 마키아벨리의 기본기조는 현실정치이다. 이탈리아의 혼란을 바라본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는 국가는 대체 무엇인가?” 라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강력한 국가를 찾고자 했지, 정당하고 도덕적인 국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 내부의 질서가 우선 보장되어야 하고 국가적 행위에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데 있었다. 그 방법은 엄격한 통치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 제국의 공화주의적 질서를 통해서 강력한 국가, 이탈리아를 통일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마키아벨리의 고뇌를 고려하지 않고, 그의 정치이론을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이라며 비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반영하는 정치가 아닌 철저한 공익을 추구했다. 현대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여러 독재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 명예, 재산을 탐하는 것과 달리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지도자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존재이다. “절대적으로 자기 조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일 때, 정당한 것인지 정당하지 않은 것인지, 도덕적인지 비도덕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양심의 가책을 제쳐 놓고 인간은 모름지기 어떤 계획이든, 조국의 생존과 조국의 자유를 유지하는 계획을 최대한 따라야 한다.”라는 말에서 마키아벨리는 완전하고 완벽한 국가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정치 이상향은 두려운 면이 있지만, 법치 하에서 삶을 보전하는 건, 사적 이익에 몰두한 엘리트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무질서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최악을 피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현실정치의 무자비함을 꿰뚫은 인물이 마키아벨리인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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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동양에서도 마키아벨리와 비슷한 수준의 합리성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 바로 ‘상앙’이다. 중국의 전국시대(기원전 403~221년 사이의 시기)는 외교와 권모술수, 하극상이 빈번했다. 또한 각 군주는 패권쟁탈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국강병론을 현실정치에 반영했다. 군주는 현실정치에 적합한 경세가들을 등용했으며, 그 중 법가는 각 국에 진행된 개혁조치들을 시행함으로써 현실정치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진(秦)나라에서 활동한 상앙은 자기확신에 찬 철인의 내면을 보여주면서, 법치에 의한 강국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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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은 법을 통해 낙후된 현실을 타파하고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한 개혁을 진행했다. 상앙은 인간이란 자기중심적이고 극단적인 이기심에 몰두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따라서 이 이익추구가 무한정 방치될 경우 무질서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간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법에 의한 통치가 필요함을 직시했으며, 형벌을 통해 인간이 평균적인 합리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상앙은 금지규범을 관장하는 법과 군주를 세워둠으로써 중앙 집권적인 군주제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재민지배 체제가 수립했으며, “종법은 종군이다.”임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법을 통해 자율적인 인간을 만들고 결과적으로 무위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법가의 최종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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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와 상앙은 상당히 겹친다. 마키아벨리는 분열된 이탈리아를, 상앙은 분열된 중국대륙을 통합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찾고자 했으며, 이는 뛰어난 리더와 완벽한 법, 그리고 철저한 공동선 아래에서 추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을 절대적으로 도덕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들의 기본적 전제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근거로 법에 의한 통치를 정당화했으며, 인간 전반의 행동을 규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철저한 국가주의는 보편적 인민들에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결국 마키아벨리는 요직에 앉지 못한 채 쓸쓸히 죽었고, 상앙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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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편적인 도덕이 작용하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이상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더 이상 명분은 작용하지 않고 실리를 추구해야 할 때는 도덕적인 수단과, 정당화된 결과는 어떤 의미도 제공하지 않다. 국가가 어려울 때, 우유부단한 태도를 버려야 할 때 도덕은 부차적이다. 오로지 실리, 무엇이 국가이익인지 파악하는 문제만이 중요하다. 명분에 사로잡혀 우유부단한 태도로 기회를 놓쳐 버릴지, 공공이익보다는 사적이익에 사로잡혀 정치영역에서 이전투구의 행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행태를 보면, 우리는 현실정치를 다루는데 있어서 그 합리성이 고대, 근대의 인물들보다 뒤떨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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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자유인가
필립 페팃 지음, 곽준혁.윤채영 옮김 / 한길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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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의 남편은 집안의 실세로서 아내의 행동에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너무나 애지중지한 나머지 아내의 행동에 어떤 제약도 하지 않는다. 이 여성은 일상의 사사로운 행동에 관해서 거의 백지수표를 얻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유로운가? 말 한 마리가 저 드넓은 들판에 서있다. 그 말에는 고삐가 매어있고 안장이 갖춰있어서 사람이 부릴 수 있다. 다만 고삐가 상당히 풀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통제력이 강력하게 작동하진 않는다. 사람은 말을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만 말이 달려가는 방향에 몸을 맡길 뿐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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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예시는 1879년 처음 무대에 오른 『인형의 집』의 중심인물인 노라의 이야기다. 19세기 관례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노라는 남편인 토르발트의 배려 덕분에 다른 여성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와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자유롭다는 결론을 선뜻 내리기 어렵다. 말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고삐가 상당히 풀려있기 때문에 말은 사람의 통제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여전히 말 안장 위에는 사람이 올라타 있으며 언제든지 말의 고삐를 쥘 의향을 갖고 있다. 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노라와 말은 결정권자의 선의와 호의를 통해서 자유를 누리고 있을 뿐, 여전히 그들의 ‘지배’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지배자의 호의 덕분에 자유를 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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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자유인가』의 저자 필립 페팃은 자유의 가치를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 한다. 이는 애덤 스미스를 시작으로 경제계에서 정의한 자유 개념, 즉 원하는 것을 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간섭 방해 강요 따위를 받지 않을 소극적 자유 개념보다 한 단계 향상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소극적 자유를 받아들인다면 노라를 자유로운 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라는 토르발트로부터 당장 간섭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판단할 수 없다. 토르발트가 감정의 변화로 노라의 선택에 간섭할 수 있기 때문에 노라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인형의 집에 사는 인형일 뿐 결코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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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타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개인은 어떤 특정한 선택을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즉 시민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 로마 공화정시대에 타인에 대한 예속의 부재를 요구한 것처럼, 페팃은 ‘개인의 자유’란 시민이 타인에 의해 예속 받지 않는다는 권리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비지배 자유가 보장된 공화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비지배 자유가 확보될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 첫째, 내가 선호하는 선택지를 취할 수 있는 여지와 자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 내가 선호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선택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 타인의 선호에 의해 나의 선택이 구애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우리는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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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자유는 무분별한 자유, 방종이 아닌가? 타인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면, 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가 이야기하는 비지배 자유는 국가의 역할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시한다. 정부는 법적 제재, 세금 부과 등으로 불가피하게 시민의 삶에 간섭한다. 하지만 소유권이나 교통 규칙과 같은 국가의 간섭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한다. 단지 그 간섭이 지배가 될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정부의 간섭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상관없이, 우리가 그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우리가 확립한 규정에 따라서 국가 권력이 행사될 수 있다면 비지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국가의 공적인 지배에 대해서 시민들이 통제 가능하고, 시민들 각자가 타인의 간섭에서 보호받으며 상호평등을 인정하는 사회가 마련된다면, 자유방임주의로 퇴보한 공화주의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비지배 자유는 국내 관계 뿐만이 아니라 국제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다국적 기구나 국제기구와의 관계 속에서 비지배를 향유하는 법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계인들은 리베르(자유인)으로 살아가며 법으로 합당하고도 동등한 보호를 받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에 대한 비지배가 실현되는 것, 그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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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지배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는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전반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정한 자유는 정치적 평등을 전제한다. 아렌트는 자유와 평등을 조화롭게 결합할 수 있는 정치 질서가 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이소노미아’라고 말한다. 평등을 뜻하는 이소스와 법을 뜻하는 노모스의 합성어인 이소노미아는 ‘비지배’를 의미한다. 그는 비지배를 실현하는 방법을 평등한 사람들이 공적인 논쟁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실천적 행위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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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팃과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비지배를 통한 공화주의를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은 길을 같이한다(다만 『왜 다시 자유인가』에서 아렌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페팃이 말한 ‘처다보기 실험’은 한 개인이 현지에서도 타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타인들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는 안 되고 맹종을 강요 받아서도 안 된다. 오직 법적,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때 동등해진다. 이 동등한 관계는 공동체 속에서 내가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위를 보장받음을 이야기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사회가 인간의 법적인격, 도덕적 인격, 개성을 죽임으로써 인간적 존엄을 파괴하는 과정을 말한다. 타인들로부터 인간임을 인정받는 것, 그것은 공동체가 확립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며 필연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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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와 페팃은 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렌트는 정치가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폭력의 정당성을 이야기했지만, 그 이전 단계에서는 시민 불복종을 이야기한다. 페팃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내가 반대하는 법률이 민주적으로 부과되었다면, 나는 그 법을 기존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반대해야 한다. 즉 사람들은 체제 내에서 법률에 이의를 제기하는 편을 택하고 반면 전복적-폭력적 저항에는 비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체제 전복은 민주주의가 꾸려놓은 평등주의를 배척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법을 위반하고, 체포를 받아들이며 정부의 처벌을 감수하는 것이 바로 ‘시민 불복종’이다. 시민 불복종은 처벌을 회피하는 일반 범법자와는 다르게 처벌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법에 맹종하겠다는 것은 성숙한 시민이 아닌 정치적 무관심, 정치적 능력의 퇴보를 은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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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 비지배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지 모른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애초에 정치철학이 제시한 방향에 모두 부합하는 정치체제가 나타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정치철학의 존재이유는 이 책의 번역자 곽준혁 교수님이 말했듯이 ‘가능한 최선의 실현’이다. 정의에 대해서 급진적인 평등을 이야기한 존 롤스,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의식을 말한 아렌트 등, 정치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한 ‘공공선’의 실현을 꿈꾼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을 몽상이라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아렌트는 정치영역에서 사실, 진실은 현실에서 어떠한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거짓말은 정치적 거래에서 정당화될 수 있고, 정치 목표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페팃이 말하고자 하는 비지배 이상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개개인이 자본에 종식되고 소위 말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사회의 변화는 이상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역사가 평가할 문제이지만, 공공선을 위해서 그리고 평등한 사회를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상향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영역 안에 있다. 정치의 잘못된 흐름을 초래한 것은 변화에 둔감했던 대중정당의 무능과 타성에 젖은 정치권력의 부패 때문이다. 기존 정치에 불신을 갖고 변화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책임이 아니다. 만약 시민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도가 잘 구비되어있고, 공적 행위에 대한 정치적 참여가 활발히 이뤄진다면, 시민은 제도를 통해 민주적 절차를 거쳐 특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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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페미니즘 My Little Library 8
박준우 지음 / 한길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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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나 집에 왔어. 오늘 되게 힘들었어.
차가운 것 좀 줘 그리고
발 좀 문질러줘, 먹을 것 좀 가져와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 만들어줘
나 쉬면서 TV 봐야 해.
Shania Twain(샤니아 트웨인), 「Honey, I’m Hom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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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익숙한 이야기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어머님들이 가정을 위해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의 피로를 풀어주는 모습이다. 다만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란 차이가 있겠다. 추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만한 미러링이다. 거울을 통해서 반전된 세계를 보는 미러링은 페미니즘이 사용하고 있는 주된 운동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미러링의 교본이 된 「이갈리아의 딸들」은 성 역할이 반전된 상황을 그려냄으로써 여성의 억압받는 세태를 성공적으로 보여줬다. 정교하고 철저히 연구된 페미니즘 이론보단 대중문화가 고발하는 현실이 사람에게 사회문제의 리얼리티를 보장한다. 이 리얼리티는 문화가 갖고 있는 ‘파워’다. 「노래하는 페미니즘」은 여러 가수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들려준다. 음악 안에 내제한 ‘파워’는 명랑한 메아리가 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공유된다. 이것이 음악만이 맡을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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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년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달리
소녀들에게 결혼이 목표라고 가르치죠
왜 소년들처럼 성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하죠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평등을 믿는 사람입니다.
Beyonce「***Flawless」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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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페미니즘이란 용어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페미니즘 운동의 결론이 양성평등이라면 양성평등 운동이어야지 왜 여성주의 운동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이 논리에 반대한다. 인종차별 폐지가 흑인 인권 운동이듯이, 현재 차별 받는 존재는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사회 운동은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보단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권 평등이라는 천부적 가치 아래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이란 방법을 채택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여권확장론)이라는 이름이 가장 적합하다. 만약 페미니즘이란 명칭이 양성 혹은 성평등 운동으로 바뀌어버릴 경우, 여성들에게 모든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또한 목적과 방법이 명확하지 않은 운동은 소음이다. 수많은 외침은 그 목소리를 분명히 알 수 없게 만든다. 때문에 여성들의 권리 운동은 페미니즘이란 이름 하에 이뤄져야 하며, 이를 통해서만 그들의 목소리를 깨끗하게 들을 수 있다. 사회운동은 선택과 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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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페미니즘도 이러한 갈래 안에 있다. “미국인 가운데 가장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이는 흑인 여성입니다.”라는 말처럼 백인 경찰에 의해 살해 당하는 흑인 중에서도 여성은 더욱 차별 받는 존재다. 자넷 잭슨을 시작으로 비욘세, 리한나 등으로 이어진 블랙 팝은 흑인 여성들의 삶을 고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성적 자기결정권, 주체성을 여실히 음악을 통해 드러낸다. “나는 내가 통제한다”라는 말처럼 자기결정권의 보장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미시시피주나 조지아 주 등에서 낙태금지법을 다시 제정하는 모습을 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 지역의 세력이 백인 중심의 공화당인 것은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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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든, 이성애자든, 양성애자든, 레즈비언이든, 트랜스젠더든
난 제대로 가고 있어. 난 살아남기 위해 태어난 사람
흑인이든, 백인이든, 베이지색이든, 라티노든, 동양인이든
난 잘 가고 있어, 난 태어날 때부터 용감한 사람.
Lady Gaga, 「Born This Way」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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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종차별만이 차별이 아니다.
누구든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소외된다고 생각이 들면
차별받는 것이다.
계급차별은 새로운 인종차별이다.
The-Dream 「Black」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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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매력적인 점은 페미니즘과 더불어 인종, 성 소수자들의 이야기까지 거침없이 밝힌다는 점이다. 음악은 사회비판정신을 담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도구이다. 따라서 레이디 가가의 가사처럼 의견을 밝히는데 거침이 없다. 루페 피아스코는 힙합 문화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꼬집고, 음악과 뮤직 비디오를 통해 위대한 남성성을 고발한다. 소말리아 난민 출신인 케이난은 평화를 바라는 마음,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처절히 가사에 담았다. 흑인사회는 동성애를 금기시한다. 하지만 흑인 음악가들 중에서 최초로 커밍아웃한 프랭크 오션은 동성애를 터부시 하고 조롱하는 흑인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음악 속에서 흐르는 보편적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연대의 장을 마련해준다. 음악이란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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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요코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저자는 비틀스의 해체를 오노 요코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반 아시아적이고 반 페미니즘적인 증오라고 말한다. 애초에 요코가 없었다고 해도 비틀스는 해체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맴버들의 갈등은 깊었다. 비틀스는 해체됐지만 존 레넌은 오노 요코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음악에 페미니즘과 반전평화 등 보편적 가치를 반영하는 음악을 작사, 작곡할 수 있었다. 오노 요코는 과소 평가 되었지만 그 또한 전위 예술가로서 또 음악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선보였다. Cut Piece라는 퍼포먼스로 성차별과 타자의 개입, 실존하는 개인에 대한 고민을 풀어냈다. 그리고 「Yang Yang」, 「What A Mess」 등의 음악을 통해 남성 중심 권력을 비판하고 여성해방을 노래하며 페미니즘을 이야기 했다. 분명 그의 행보에 논란이 될 만한 것은 있었지만, 비틀스라는 혼란의 시기에 함께하여 예술적 역량마저 저평가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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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른 이야기도 해볼까 한다. 저자는 마돈나가 성적, 인종적, 종교적 편견을 깨부수고 성녀와 창녀 이분법을 거부하며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발한 도발적인 페미니즘 메시지를 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도 존재한다. 「코르셋」의 저자 쉴라 제프리스는 마돈나가 성매매 되는 여자들의 복장을 하이 패션으로 정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마돈나는 단지 남자에게 지배력을 갖는 ‘여창’으로 분한 배우에 불과했으며, 실제 성매매 업소를 포함한 세상에서의 권력 행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돈나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이에 대한 통제권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돈나가 보여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계(여성성 자체의 파괴)는 성매매를 정상화하고 패션, 광고 분야 전반에서 성매매를 대중적으로 문제 없게 만들었다. 제프리스는 마돈나가 코르셋을 덧씌움으로써 여성들의 패션을 남자의 색슈얼리티에 복속시켰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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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역설적인 점은 페미니즘을 외치는 팝 음악가들이 여전히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봐도 예쁘고 섹시하다는 점이다. 물론 섹시함이나 섹스어필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체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여긴다면 이는 하나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디어로 이를 접하는 수용자들은 직접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여성 음악가들과 페미니즘을 소비하기 쉽다. 결국 팝 페미니즘이 성숙하려면 음악시상에 종사하는 다수, 또 이를 수용하는 다수가 페미니즘을 접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결론을 피할 수 없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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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도 이에 대한 문제를 피하지 않는다. 아무리 마돈나나 비욘세가 자신의 성적 욕구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하더라도 대중들이 가수의 의도완 무관하게 섹시한 여성, 예쁜 여성으로만 받아들이면 예술가들의 목적은 왜곡된다. 창작자의 의도는 관람자에 의해 재해석된다. 아이유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 대한 재해석으로 「ZeZe」를 발표했을 때 소아성애에 대한 논란에 빠졌다. 아이유는 이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수용자들은 달랐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아이유를 로리타와 엮어 내렸다. 즉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이해의 벽이 존재한다. 비욘세가 코르셋을 장착하고 섹시함을 어필하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여성이란 젠더의 벽을 더욱 고착화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의 범주는 넓기 때문에 이를 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포스트모던처럼),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여성성을 거부하려는 레디컬 페미니즘의 경우 비욘세의 페미니즘에 불만을 가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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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페미니즘을 음악에 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은 아이린의 사례를 보더라도 공인이 페미니즘을 꺼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희망을 찾자면 난 소설과 웹툰을 꼽겠다. 물론 웹툰에는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것도 있지만 「내 ID는 강남 미인」과 같은 성형에 대한 편견을 부수거나 최근에는 「화장 지워주는 남자」처럼 화장에 대한 인식 전환을 보여주는 웹툰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물론 해석은 다양하다.)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노래하는 페미니즘이 대중적이지 않지만, 적어도 그려보는 페미니즘, 낭독하는 페미니즘은 대중성을 얻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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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책할까요 - 내 인생에 들어온 네 마리 강아지
임정아 지음, 낭소(이은혜) 그림 / 한길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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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와 평생을 함께한 네 마리 강아지 까미, 바람이, 샘이, 별이의 이야기다. 까미가 새끼 강아지였던 1990년부터 세상을 떠난 2002년까지 13년, 그리고 바람이와 샘이가 내 곁에서 평생을 살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2015년까지 16년, 그 후로 외롭게 홀로 남은 별이까지 30여 년에 걸친 네 마리 강아지 이야기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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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동반자 반려동물. 외로움을 덜어내 주고 기쁨을 채워주는 나의 진정한 친구.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고, 우리가 웃고 울 때 그들은 옆에 앉아 우리의 감정을 보듬어준다. 이 책의 작가도 인생의 절반을 넘게 이 동물 친구들과 함께했다. 오히려 그들이 없는 삶이 더욱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첫 동반자이자 인간 이상의 선함을 보여준 까미, 그리고 눈이 먼 바람이, 여왕님 같았던 샘이, 그리고 샘이와 바람이의 자식인 별이. 작가의 30년이란 긴 시간을 차지한 그 강아지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3마리를 떠나 보내며 느낀 상실감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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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들이 어렸을 때 저한테 기쁨과 위로를 주었어요. 이젠 제가 돌볼 차례죠. 키우던 강아지가 늙고 병들었다고 버리고 새로 사면, 새로 들인 애들은요? 그 아이들은 늙거나 병들지 않나요?” 늙고 병들었다고 개를 버리는 것은 늙은 우리 개들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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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기 때문에 한없이 선할 수 있고, 인간이기 때문에 한없이 악독할 수 있다. 사람은 강아지를 더 이상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쉽게 떠넘겨버리고, 혹은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강아지들이 자신에게 준 사랑만큼 그 아이들의 남은 여생을 사랑으로 보답해주려고 한다. 동물병원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는데도, 죽은 남동생 옆자리에 바람이의 시신을 묻는 작가님은 그 분이 얼마나 그 동물 가족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을 떠나 보내고 난 뒤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도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작가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보고자 했다. 상실은 또 한번 그들의 소중함을 깨우칠 수 있는 인생의 비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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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한 마리 푸들과 산다. 작가님이 키우던 토이 푸들과 같은 종인 ‘코코’다. 약 6년전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던 난, 외삼촌이 키우던 강아지가 새끼를 낳자 얼른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코코는 우리 가족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존재였다. 수험공부를 하고 집에 늦게 들어온 날 제일 처음 반기던 가족은 코코였다. 또한 혼자 계신 시간이 많았던 어머니에게 좋은 친구가 된 것도 코코였다. 코코는 우리 가족에게 기쁨을 준 한 명의 구성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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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키웠던 탓일까? 우리 가족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재주가 부족했다. 덕분에 코코는 상당히 감정 기복이 심한 아이가 되었다. 좋게 반기다가 갑자기 이빨을 보일 때도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전투태세를 갖출 때도 있다. 덕분에 몇 번이나 피를 봤는지 모르겠다. 또 산책을 나갈 때 다른 강아지나, 어린 아이를 보면 싸울 듯이 달려들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때도 있었다. 누군가는 강아지의 사나운 모습 때문에 키우기를 포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육의 미숙함을 반려동물 탓으로 돌리며 포기하는 건 멍청함을 속이는 일일 뿐이다. 귀여움 때문에 너무나 쉽게 얻은 반려동물을 너무나 쉽게 버리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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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수명이 10~15년 정도인가? 우리 코코는 대략 6살쯤 됐으니 한 절반쯤 지나온 것 같다. 혹은 더 일찍 갈지도 모른다. 죽음은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니까. 물론 아무도 원치 않았을 방문객일 테지만. 작가는 반려견의 죽음을 다른 이들과 아픔을 공유하거나 새로운 만남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 아마 코코의 죽음은 우리 가족이 극복할 문제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다가올 미래란 것은 분명할 테니까.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썬 그 일이 절망으로 다가올지 혹은 정신적 성숙함의 과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겪고 싶지 않은 건 분명한 것 같다. 지금처럼 코코는 편하게 살며 충분히 놀았으면 한다.

"저 애들이 어렸을 때 저한테 기쁨과 위로를 주었어요. 이젠 제가 돌볼 차례죠. 키우던 강아지가 늙고 병들었다고 버리고 새로 사면, 새로 들인 애들은요? 그 아이들은 늙거나 병들지 않나요?" 늙고 병들었다고 개를 버리는 것은 늙은 우리 개들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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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건축기행 - 유토피아를 디자인하다 My Little Library 7
강영환 지음 / 한길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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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건축, 종교 그리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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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건축기행]은 저자가 40여년 동안 여행을 다니며 본 아시아 건축물에 대한 견문기이다. 저자는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간략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여 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황금탑 외에도, 각 종교가 갖추고 있는 특색 있는 건축물을 비교하며 볼 수 있다. 독자들은 다양한 사진을 통해 아시아가 품고 있는 다채로운 건축물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전문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건축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한 명의 여행객으로서 건축을 보고 느낀 바를 말할 뿐이다. 건축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저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아시아의 모습이다. 이 지역을 여행할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역사 공부까지 할 수 있어서 여행의 재미를 더욱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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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이 책을 건축에 담긴 미학을 중심으로 독해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아시아 건축에 상당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 혹은 아시아의 종교적인 건축물들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의 질서를 구축하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가령 남인도 힌두 사원인 ‘벨루르’와 ‘할레비두’는 정치권력과 종교의 결합을 잘 보여준다. 힌두교는 카스트 제도를 영속화 하기 위해 종교적인 정당성을 필요로 했다. 이 사원들은 각각 계급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종교적 경외심을 극대화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런 의미는 유럽의 종교적 건축물과 맞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종교건축물들은 사람들의 경외심을 자극하여 지배적 질서를 안정 시키는데 있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위한 더없이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종교는 과연 민초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을까? 타이와 미얀마는 종교가 보여주는 두 극단적인 삶을 제시한다. 타이 국민의 대다수는 불교신자이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불교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타이의 사원은 지역사회에게 정신과 마음에 안식처를 제공한다. 해발 1,600m 고도에 달하는 산 정상부에는 ‘도이수텝’이라는 사원이 있다. 그 사원에서 승려들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제공하고 부처의 은덕을 베푼다. 그들은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인격을 수양하며 공존을 배운다. 반면 미얀마는 ‘황금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국민 소득은 1.300달러에 불과 하는 세계 150위권의 나라이다. 빈부격차의 극심함은 말할 것도 없다. ‘슈웨다곤’은 휘황찬란한 금빛과 보석으로 물들여 있어, 순간 미얀마를 보석의 나라로 착각할 정도다. 종교적 믿음에 의해, 미얀마 국민들은 자신들이 번 돈으로 금박을 구입한 후 사원에 덫 붙인다. 그들의 노력으로 ‘슈웨다곤’은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민들의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미얀마의 민낯을 볼 수 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장과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파리떼들 그리고 가난에 찌들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 그들은 끼니 이을 돈으로 금박을 입혀 종교 건축물의 신성함을 보강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은 비참함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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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랜드마크란?
한 도시 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그러한 건축물들을 흔히 랜드마크라고 부른다. 가령 파리의 ‘에펠탑’이나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랜드마크로 불릴 만 하다. 저자는 라오스의 ‘비엔티안’을 방문하던 도중 “랜드마크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라오스에는 현대사의 랜드마크로 주목 받는 건축물이 있다. 바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한 ‘빠뚜싸이’이다. 저자는 ‘빠뚜싸이’를 프랑스 건축과 라오스 건축 사의 기형적인 결과물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목적도 없고 건설방법도 아류로 뒤덮인 건축계의 짬뽕이다. 그는 오늘날 목적 없는 랜드마크 조성사업이 한창이라고 비판한다. 탐욕적이고 사적 욕망의 상징물들이 기업, 정치인들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 공격적으로 건축되는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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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저자의 비판이 전통주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목적을 알 수 없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건축물이 우후죽순 건설되는 상황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대부분 종교적인 건축물들이 건설된 배경에는 ‘미’라는 낭만적인 목적만 있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는 지배자의 권위를 보호하고 정당성을 확립하는데 주요 수단이었다. 권위자에게 종교적인 정당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압도적인 건축이었다. 노예들은 지배자의 권위를 위해 건축현장에 동원되었다. 현대의 랜드마크 조성 사업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종교적인 권위와 자본의 권위, 말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본질은 같다. 바로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의 명예의식이다.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요구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건축물을 순순한 미로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 건축물들은 지어질 당시엔 평가를 박하게 받을 지도 모른다. 단적인 예가 에펠탑이다. 에펠탑은 건축될 당시에 파리의 흉물로 취급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를 떠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파리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았으며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지금의 흉물이 나중에는 나라의 상징으로 뒤바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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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어의 장벽, 그리고 고립의 장벽
스리랑카에는 경이로운 유적이 있다. 바로 ‘시기리야’이다. 평원 위, 195m 바위산에 자리잡은 이 유적은 본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거대한 절벽으로 출입을 봉쇄하여 적의 침입을 막고 물과 물자를 공급받을 기술을 마련했다. 이곳을 만든 카사파 1세는 부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형제들의 반역에 대비하고자 거대한 바위 요새에 몸을 숨겼다. 분명 이곳에 성채를 구축한 왕은 자신의 첨단 방어시스템을 자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완벽한 봉쇄는 고립을 자초한다는 것을. 왕은 이 어마어마한 도시를 만들어 놓고도 이복동생의 군대에 의해 패망했다. 천연의 요새가 무너지는데 고작 18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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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떤 장벽이 떠올랐다. 바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이다. 이 장벽의 목적은 중남미 출신 불법 이주자들을 물리적으로 봉쇄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방법이 정말 이것뿐일까? 안보란 국가이익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장벽이 정말 최선의 방법인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장벽 건설에 소모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은 불법 이주민 문제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에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장벽이 난민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수 많은 방법을 찾아냈고 실행해 왔다. 그들이 생존하자는 욕구는 보트에 몸을 실어 대양을 건너게 만들었고 군인들의 총성을 감수했다. 장벽을 만든다고 해도 그들은 ‘자유’라는 가치를 찾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통해 외적을 방어하고자 했고 시기리야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무너지데 각각 30년, 그리고 18년이 소요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미국의 장벽은 온전히 미국을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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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유토피아를 말하다.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3만불(약 3천만원)을 달성했지만 국민들은 불행하다. 세계행복보고서에서 156개국 중 종합 54위에 머무른 것만 봐도 경제적 풍요와는 대비되는 불행한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행복보고서는 국민행복지수(GNH)를 통해서 사람들의 행복한 정도를 측정한다. 그렇다면 GNH는 어디에서 처음 만들어졌을까? 놀랍게도 인구 80만명의 작은 나라, 부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부탄 왕조 4대 왕인 왕추쿠는 왕권을 포기하고 국가를 민주주의체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1970년대에 국민행복지수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헌법에 명시하고 국가 발전의 기준으로 삼았다.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4가지 기본전략은 이렇다. 첫 째는 지속가능하고 공평한 사회를 목표로 하는 경제발전이다. 두 번째는 생태계의 보전과 회복을 중시하는 것이며 셋째로 부탄의 전통과 정체성을 실현하는 문화를 보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앞의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는 국정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행복을 원칙으로 삼은 나라는 달리 또 누가 있을까? 저자는 부탄이 근대화의 물결 안에서도 행복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행복이란 기조 아래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마냥 부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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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은 국가 정책의 기조를 행복으로 삼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구한다. 부탄의 근대화는 분명 느리게 흘러갈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고려하고 최선의 선택을 결정하는데 대한민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는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동네에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한국인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저자는 라오스의 도시 ‘루앙프라방’에 있는 작은 카페에 방문했다. 그 카페에 이름은 ‘유토피아 카페’이다.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그 카페에는 별다른 것이라곤 없다. 단지 매트에 누워 강가를 바라보거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뿐이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카페가 왜 유토피아일까? 유토피아를 직역하면 ‘없는 장소’이다. 너무나도 이상적이고 낭만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수 없는 모순된 장소가 바로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너무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사소한 것에 행복을 얻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유토피아적 공간은 없을지라도 삶의 사소한 순간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 ‘유토피아 카페’는 사람들에게 단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데 그친다. 거기서 무엇을 할지는 사람 나름의 역할에 달려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강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지고 또 누군가는 낮잠을 취할 것이다. 사소하기 그지없지만 그들은 현실의 짐을 덜어냄으로써 행복에 잠긴다. 고되고 힘든 순간 잠시 휴식을 취하고 행복을 만끽할 기회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이 풍요로워 질 것이다. 정말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면 누구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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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람을 한가롭게 만드는 공간이다. 특별히 볼 것도 할 것도 없으니 시간은 천천히 흐르게 마련이다. 목적 없이 빈둥대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잘 기획된 건축적 장치는 오히려 행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구속하기 마련이다. 나른한 강변 풍경과 시원한 바람, 서늘한 그늘, 편하게 드러누울 수 있는 곳이면 평화를 누리기에 족하다. 그 카페의 이름은 ‘유토피아’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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