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자유인가
필립 페팃 지음, 곽준혁.윤채영 옮김 / 한길사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여기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의 남편은 집안의 실세로서 아내의 행동에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너무나 애지중지한 나머지 아내의 행동에 어떤 제약도 하지 않는다. 이 여성은 일상의 사사로운 행동에 관해서 거의 백지수표를 얻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유로운가? 말 한 마리가 저 드넓은 들판에 서있다. 그 말에는 고삐가 매어있고 안장이 갖춰있어서 사람이 부릴 수 있다. 다만 고삐가 상당히 풀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통제력이 강력하게 작동하진 않는다. 사람은 말을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만 말이 달려가는 방향에 몸을 맡길 뿐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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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예시는 1879년 처음 무대에 오른 『인형의 집』의 중심인물인 노라의 이야기다. 19세기 관례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노라는 남편인 토르발트의 배려 덕분에 다른 여성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와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자유롭다는 결론을 선뜻 내리기 어렵다. 말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고삐가 상당히 풀려있기 때문에 말은 사람의 통제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여전히 말 안장 위에는 사람이 올라타 있으며 언제든지 말의 고삐를 쥘 의향을 갖고 있다. 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노라와 말은 결정권자의 선의와 호의를 통해서 자유를 누리고 있을 뿐, 여전히 그들의 ‘지배’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지배자의 호의 덕분에 자유를 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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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자유인가』의 저자 필립 페팃은 자유의 가치를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 한다. 이는 애덤 스미스를 시작으로 경제계에서 정의한 자유 개념, 즉 원하는 것을 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간섭 방해 강요 따위를 받지 않을 소극적 자유 개념보다 한 단계 향상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소극적 자유를 받아들인다면 노라를 자유로운 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라는 토르발트로부터 당장 간섭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판단할 수 없다. 토르발트가 감정의 변화로 노라의 선택에 간섭할 수 있기 때문에 노라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인형의 집에 사는 인형일 뿐 결코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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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타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개인은 어떤 특정한 선택을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즉 시민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 로마 공화정시대에 타인에 대한 예속의 부재를 요구한 것처럼, 페팃은 ‘개인의 자유’란 시민이 타인에 의해 예속 받지 않는다는 권리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비지배 자유가 보장된 공화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비지배 자유가 확보될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 첫째, 내가 선호하는 선택지를 취할 수 있는 여지와 자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 내가 선호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선택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 타인의 선호에 의해 나의 선택이 구애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우리는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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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자유는 무분별한 자유, 방종이 아닌가? 타인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면, 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가 이야기하는 비지배 자유는 국가의 역할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시한다. 정부는 법적 제재, 세금 부과 등으로 불가피하게 시민의 삶에 간섭한다. 하지만 소유권이나 교통 규칙과 같은 국가의 간섭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한다. 단지 그 간섭이 지배가 될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정부의 간섭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상관없이, 우리가 그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우리가 확립한 규정에 따라서 국가 권력이 행사될 수 있다면 비지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국가의 공적인 지배에 대해서 시민들이 통제 가능하고, 시민들 각자가 타인의 간섭에서 보호받으며 상호평등을 인정하는 사회가 마련된다면, 자유방임주의로 퇴보한 공화주의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비지배 자유는 국내 관계 뿐만이 아니라 국제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다국적 기구나 국제기구와의 관계 속에서 비지배를 향유하는 법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계인들은 리베르(자유인)으로 살아가며 법으로 합당하고도 동등한 보호를 받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에 대한 비지배가 실현되는 것, 그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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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지배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는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전반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정한 자유는 정치적 평등을 전제한다. 아렌트는 자유와 평등을 조화롭게 결합할 수 있는 정치 질서가 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이소노미아’라고 말한다. 평등을 뜻하는 이소스와 법을 뜻하는 노모스의 합성어인 이소노미아는 ‘비지배’를 의미한다. 그는 비지배를 실현하는 방법을 평등한 사람들이 공적인 논쟁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실천적 행위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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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팃과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비지배를 통한 공화주의를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은 길을 같이한다(다만 『왜 다시 자유인가』에서 아렌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페팃이 말한 ‘처다보기 실험’은 한 개인이 현지에서도 타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타인들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는 안 되고 맹종을 강요 받아서도 안 된다. 오직 법적,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때 동등해진다. 이 동등한 관계는 공동체 속에서 내가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위를 보장받음을 이야기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사회가 인간의 법적인격, 도덕적 인격, 개성을 죽임으로써 인간적 존엄을 파괴하는 과정을 말한다. 타인들로부터 인간임을 인정받는 것, 그것은 공동체가 확립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며 필연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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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와 페팃은 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렌트는 정치가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폭력의 정당성을 이야기했지만, 그 이전 단계에서는 시민 불복종을 이야기한다. 페팃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내가 반대하는 법률이 민주적으로 부과되었다면, 나는 그 법을 기존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반대해야 한다. 즉 사람들은 체제 내에서 법률에 이의를 제기하는 편을 택하고 반면 전복적-폭력적 저항에는 비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체제 전복은 민주주의가 꾸려놓은 평등주의를 배척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법을 위반하고, 체포를 받아들이며 정부의 처벌을 감수하는 것이 바로 ‘시민 불복종’이다. 시민 불복종은 처벌을 회피하는 일반 범법자와는 다르게 처벌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법에 맹종하겠다는 것은 성숙한 시민이 아닌 정치적 무관심, 정치적 능력의 퇴보를 은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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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 비지배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지 모른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애초에 정치철학이 제시한 방향에 모두 부합하는 정치체제가 나타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정치철학의 존재이유는 이 책의 번역자 곽준혁 교수님이 말했듯이 ‘가능한 최선의 실현’이다. 정의에 대해서 급진적인 평등을 이야기한 존 롤스,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의식을 말한 아렌트 등, 정치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한 ‘공공선’의 실현을 꿈꾼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을 몽상이라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아렌트는 정치영역에서 사실, 진실은 현실에서 어떠한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거짓말은 정치적 거래에서 정당화될 수 있고, 정치 목표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페팃이 말하고자 하는 비지배 이상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개개인이 자본에 종식되고 소위 말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사회의 변화는 이상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역사가 평가할 문제이지만, 공공선을 위해서 그리고 평등한 사회를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상향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영역 안에 있다. 정치의 잘못된 흐름을 초래한 것은 변화에 둔감했던 대중정당의 무능과 타성에 젖은 정치권력의 부패 때문이다. 기존 정치에 불신을 갖고 변화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책임이 아니다. 만약 시민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도가 잘 구비되어있고, 공적 행위에 대한 정치적 참여가 활발히 이뤄진다면, 시민은 제도를 통해 민주적 절차를 거쳐 특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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